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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리필 방실이네 "얼마냐고? 일단 드셔!"

사람의 숨결이 살아 있는 모란 5일장에 가다

등록|2011.03.25 17:15 수정|2011.03.25 17:25

▲ 왁자지껄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는 5일장. ⓒ 이현상



거창하게 경제학을 논할 필요까지는 없다. 21세기 한국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에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시장논리가 채색되어 있다. 경제학 원리를 넘어서 가치관의 영역까지도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의 친서민 이미지 강화를 위한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들이라는 게 얼마나 기만적인가는 재래시장뿐 아니라 골목의 상권까지 대기업의 문어발 빨대로 빨아들이는 SSM 입점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시장은 더 이상 시장이 아니다.

시장(市場). 경제학적인 용어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인문학적 접근이 아직도 가능한 곳이 바로 5일장이다. 겨우내 키운 닭이며 염소를 끌고 장으로 가는 날은 소풍 날 같았다. 달걀이나 산에서 캔 푸성귀와 약초 등을 보자기에 싸서 십 리 밖 장터에 나가 내다 팔고, 그 돈으로 고기 몇 근과 생선 몇 마리 사들고 돌아오던 시절이 있었다.

더러는 장터 국밥집에 모여 높은 자리 나리님들 험담을 늘어놓고 막걸리 몇 잔에 불콰해진 채 달빛을 벗 삼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야 분이라도 풀렸다. 시장은 5일 만에 어울리는 사랑방이요, 놀이터요, 여론의 재생산지였던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 값비싸고 신기한 상품들에 넋을 놓듯이 장터에 가는 것이란 소풍을 가는 것과 같았다. 이런 풍습은 한국 문학의 토양까지도 풍부하게 만들었다. 신경림의 주옥 같은 시들과 김주영의 소설들, 이효석의 봉평 5일장 묘사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등록된 상인 수만 1500여 명

▲ 모란장 입구. 모란역에서 나오면 바로 연결된다. ⓒ 이현상


유년의 추억이나 문학작품 속에 갇혀 있는 5일장을 오늘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서울과 맞붙어 있어 지하철로도 갈 수 있는 모란민속장. 매월 4일, 9일 열리는 모란장은 그 규모면에서 전국 최대라고 할 수 있다. 모란장 상인회에 등록된 상인 수가 1500명에 이르고, 등록되지 않고 통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상인들까지 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

모란시장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선릉역에서 출발하는 분당선이나, 8호선을 타고 가서 역시 모란역에서 내리면 된다. 장날이면 입구를 달리 찾을 필요도 없이 그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나가는 쪽으로 따라가면 된다. 그만큼 북적거리기 때문이다.

입구에는 화훼부가 자리 잡고 있다. 봄철을 맞아 각종 꽃들과 과실수 묘목, 씨앗 등이 즐비하다. 봄을 준비하기 위한 손님들로 입구에서부터 발 디딜 틈이 없다.

넉넉한 인심 유쾌한 흥정

▲ 손수 캐신 나물을 다듬어 팔고 계신 할머니. ⓒ 이현상



▲ 방실이네. 간판도 메뉴판도 없다. 가격도 정해지지 않았다. ⓒ 이현상



▲ 돼지부속물 구이집. ⓒ 이현상



화훼부가 끝나는 지점에서 한 할머니는 성남 오포의 야산에서 직접 캐왔다는 냉이, 쑥, 고들빼기 등을 바닥에 펼쳐놓고 다듬고 있었다. 저울도 없이 대충 집어 봉지에 담아서 3000원을 받는다. 고들빼기 한 봉지를 달라고 하자 한 움큼 더 넣어주신다. 5일장에는 정찰가가 없다. 그저 걸쭉한 입심과 넉넉한 인심, 유쾌한 흥정이 가격을 정한다. 계산기 두들겨 생산원가를 구하고 판매가를 정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아 가격을 정한다.

돼지부속물 전문 구이집을 들러보았다. 간판도, 전화번호도 없어 달리 소개할 방법이 없지만 주인께 여쭈었더니 그냥 '방실이네'로 하란다. 일행 셋이 앉자 여러 가지 부속물을 철판 위에 깔아준다. 가격을 물었다. "일단 드셔" 하신다. 그래도 가격은 알고 싶다고 하니 "뭐 만 원 받으면 되지" 한다. 이런 식이다. 메뉴판도 없이 그냥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있는 만큼 지불하고, 주고 싶은 만큼 안주를 내준다. 안주가 떨어져가자 맛있는 부위만을 골라 한 접시 더 내준다. '무한리필'이 일부 패밀리 레스토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리에 앉아있는 동안 주인아주머니는 가게 앞을 지나는 행인들과 안부를 나누느라 또한 바쁘다. 5일 만에 보는 정겨운 얼굴들인 것이다.

▲ 보따리 만불상을 방불케 한다. ⓒ 이현상


반평 남짓한 보자기에 이제는 마트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소위 '워크맨'류의 카세트 플레이어와 낡은 시계,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의 중고품을 늘어놓고 판다. 일종의 보따리 만물상이라고나 할까. 저게 무슨 돈이 될까 싶기도 하고,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궁금했지만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재미는 있을 것 같다.

2500원이면 막걸리에 안주까지 푸짐하게

▲ 장터 중앙에는 다양한 먹을거리를 팔고 있다. ⓒ 이현상



▲ 안주 공짜, 막걸리 한 잔 2500원. 술과 끼니를 한 번에 해결한다. ⓒ 이현상



▲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선하다. ⓒ 이현상


장터 중앙에는 각종 먹을거리가 있다. 족발에서부터 순대, 돼지껍데기 볶음, 문어숙회 등 안주로 삼기 딱 좋은 메뉴들이다. 한 사람이 5천 원이면 소주나 막걸리 한 병에 푸짐한 안주까지 먹을 수 있다. 칸막이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천정부지 올라가는 물가와 예전 같지 않다는 팍팍한 세상사도 안주삼아 시름을 나눈다. 5일을 근무하고 쉬어야 하듯이 이들도 5일에 한번쯤은 이곳에 나와 가슴 속의 든 말을 꺼내놓아야 한다.

안주는 공짜, 칡막걸리 한 잔에 2500원하는 주막에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서서 무료로 제공하는 부침개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신다. 아마도 '술 고프고', 배고픈 사정을 알아주는 고마운 집일 게다. 여느 장터가 그렇듯이 이런 후한 인심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딱한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다.

애견부에는 대부분 소위 '믹스견'이라고 불리는 강아지들이 나와 있다. 더러는 낯선 풍경과 사람들 때문에 주눅 들어 있었지만 몇몇은 개구쟁이처럼 부산하다. 진돗개와 풍산개의 잡종이라는 강아지의 가격을 묻자 3만5천 원이란다. 키울 형편이 안 되어 선뜻 사지는 못했지만 개는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선량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를 보며 부디 착한 주인을 만나길 빌었다.

모란장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대원천 하류의 복개천 위에 열린다. 길이 약 350미터, 폭약 30미터, 면적 약 3300평에 이르는 대규모 5일장이다. 입구에서부터 화훼부, 잡곡부, 약초부, 의류부, 신발부, 잡화부, 생선부, 야채부, 음식부, 애견부, 가금부로 나누어져 있다. 장터 주변에는 돼지 부속물과 호박죽, 칼국수 등을 파는 음식점이 있다. 3일과 8일에는 식용개와 가금류를 파는 장이 서기 때문에 애견가들은 불편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모란장 공식 누리집은 http://www.moranjang.or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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