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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23회)

녹두패(綠豆牌) <3>

등록|2011.03.29 09:29 수정|2011.03.29 11:18
중원의 제왕들이 많은 여인과 상관하기 위해 사용한 비방은 오석산(五石散)이다. 다섯 가지 돌가루를 이용한 것이지만 부작용이 심해 삼분의 이가 요절했다. 그러나 장삼봉이 이끄는 삼봉파가 궁에 들어와 세력의 가지를 친 것은 선도식 비술이 양생에 크게 조력했기 때문이다.

여인과 상관해도 자신의 몸엔 조금도 지장을 초래하지 않은 선도식 비방이 유행하는 듯 했으나, '관계하되 사정은 않는다'는 접이불루(接而不漏)로 인해 즐거움이 시들해지자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 버렸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박노인은 마음에 담아 둔 비방을 털어놓았다.

"중원엔 머리에 꽂은 금보요나 팔찌, 또는 반지를 통해 잠들어 있는 사내의 욕기를 깨운다는 말이 있다오. 몸에 두른 그것들이 움직일 때마다 미세한 가루가 날려 상대를 자극하기에 그런 방법을 쓰는 모양이오만, 이참에 내게 신발을 주문한 항아님은 어떤 용도로 쓰는지 말해 준다 했으니 참으로 궁금하다오."

박노인은 스스럼없이 말하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것이 이레 전의 일이었다. 초검관으로 나선 경기관찰사 유국진(劉局軫)은 박노인의 사체를 경기 감영으로 옮기고 검시에 들어갔다.

나이가 쉰이 넘은 데다 음식을 부실하게 먹었으니 체신은 그다지 건강하진 않았으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근육이 단단한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산에 오르거나 달음질 치는 습관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초검관의 검시기록이 작성되자 의원과 항인에게 관찰사의 물음이 날아갔다.

"사체의 정황은 어떤가?"
"살빛은 문드러져 허옇게 되었고, 입은 벌린 채 눈은 감았습니다. 머리가 아래쪽에 있고 복부는 팽창했습니다."

"머리가 아래쪽에 있다?"
"예에, 사또! 다른 사람이 밀어서 목숨을 잃었다는 증겁니다. 스스로 강물에 투신할 경우 반드시 다리가 아래쪽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검의 임자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다른 사람이 밀어 강물에 빠진 거로 보입니다. 복부가 팽창한 것은 살아 있을 때 물을 마신 증거니 두드리면 소리가 납니다."

"눈은 어떤가?"
"눈알이 빠져나왔습니다. 입과 코에서 흰 물거품이 쏟아지고 가슴 쪽에 검은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충격이 가해진 상흔으로 보입니다."

관원들이 경기감영으로 떠난 뒤 정약용은 동관(東館)이라는 내반원을 방문했다. 이공수가 쉰이 넘은 나이로 세상을 버렸지만 궁 안에 흘러 다닌 얘기엔 죽는 순간까지 상감의 은총을 받았으며 내명부 소속의 여인들에게 선망 받는 인물이었음을 내시교관 추성운(秋聲雲)이 일러주었다.

"그 분은 벼슬자리가 상선(尙膳)에 이르렀는데도 결코 교만하지 않았으며 저에게도 여러 가지 도움될 만한 서적들을 주었습니다."

이른바 성의학(性醫學)으로 불리는 덕이 높은 도인들의 구름같은 행적을 적은 도전(道典)이었다.

모든 게 추성운에게 도움 되는 건 아니었고 성행위를 통한 남녀의 몸이 어찌 손상되고 그것을 치료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이 성의학 교전엔 '치상(治傷)'으로 설명되었다.

그는 이 책자에서 한 가지 터득한 게 있었다. 충화자(冲和子)라는 정력이 절륜한 도인이 남긴 말이었다.

정욕을 극한 정도까지 추구해 색정의 향락에 빠지면 반드시 몸을 망쳐 병에 걸린다. 이것은 무절제한 황음을 불러들인 값비싼 대가다. 애당초 색욕으로 얻어진 병이므로 이를 치유하기 위해 이열치열의 성행위만 가능한 것은 숙취가 해장술로 풀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제왕의 모습에서 기력이 쇠해졌는지 평시와 다름없는지를 아는 건 내관이 지녀야할 것으로 날곤충의 촉각 같은 것으로 설명했다.

사가와는 달리 궁에 들어오면 지켜야할 법도가 적지 않다. 특히 사내의 거시기가 없는 이들에겐 가장 중요한 게 위계질서다. 그걸 무시했을 때엔 어느 귀신의 손에 목숨이 도망갈지 몰랐다.

"추내관 보기엔 적이 있을 것 같은가? 종2품 상선에 있는 자가 하룻밤 사이에 목이 졸려 살해되고 자액으로 위장할 만한 배포 큰 짓을 저지를 위인이 궐에 있겠는가?"

"나는 그 분이 살해당했다곤 믿지 않습니다. 나으리께서 그리 말하시니 살해당했다 생각되나 개인적인 소견으론 그런 일을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근래, 그 분과 다투거나 원한 살 만한 사람이 없었는가?"

"시생이 알기론 그렇습니다만 오래도록 중전마마께서 자식을 낳지 못하시니 해괴한 말들이 떠다녔습니다. 후궁의 누군가 회임하여 아드님을 순산하면 그 분이 장차 조선을 치리하게 될 것이라구요. 허나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수빈 소생의 왕자님이 있는데요. 다만, 중전마마가 아직 젊고 전하의 용체 활력이 넘치신데 그런 걱정은 아직 이르지요."

"궁안엔 전하의 피를 받은 사내가 있잖은가?"
"그게 중전마마의 걱정거리지요. 궁을 시끄럽게 하는 건 왕자님이지요. 지금이라도 아드님을 회임하면 그 분이 조선의 제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중전마마 입장에선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지요."

정약용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탐색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바, 상감을 오래도록 보필한 공이 이공수 내관에게 있다 들었네. 그렇다보니 벼슬이 종2품 상선에 이르렀고···. 이걸 중전마마 쪽에서 보면 원수와 같지 않았을까? 궁 안이니 중전마마께서 무슨 일을 꾸밀 수 있기가 쉬웠을 테고. 어떤가?"

"생각으로야 가능한 일이겠으나···, 그리하자면 많은 사람을 속여야 하고 회유하거나 매수해야 합니다. 재물 또한 적지 않을 것이며 나중에 탈이 날 수도 있음을 무시할 수 없지요. 나으리께서 그리 말하시니 그렇긴 합니다만, 요근래 상감께서 수빈 처소에 자주 가신다는 말씀이 나올 정도니 가볍게 볼 일은 아니나 내가 생각하는 바론···."

"뭔가?"
"아, 아닙니다. 괜히 해본 말입니다."

"어허, 이 사람 왜 이러나. 하고 싶은 말을 아니하면 몸에 병이 되고 장차 추내관이 사헌부에 올 일이 생긴다 그 말이야."
"예에?"

"그러니 아는 바 있으면 귀띔하게.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닌가. 상선이란 종2품 자리에 올랐지만 누가 알아주기나 하던가. 궁안의 꽃들이나 제 욕심 채우려 아양을 떨 뿐이지. 아니 그런가?"

"···."
"어허, 이 사람 보게. 어서 말을 하래두."

추내관은 얼굴을 바짝 숙인 채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눈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실은 몇달 전 상감께서 미행(微行)을 나가셨답니다. 무감과 이내관을 대동하고 성문을 나섰는데 어느덧 걸음이 다방골에 이르렀답니다. 그곳에서 곤욕을 치르는 사람을 보고 이내관이 안타까운 마음에 끼어든 모양입니다. 사연을 알아보니 그 자는 점 치는 점쟁이인데 음식 값을 치르지 못해 곤욕을 당한 모양입니다. 대금을 이내관이 치러주자 점쟁이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랍니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 음식을 먹고 가격을 치르지 않으면 '용을 만나고 봉을 아우를 이'를 만날 수 있다는 점괘였답니다. 상감을 만날 거란 생각은 아무래도 점괘를 잘못 푼 것 같다고 돌아가더랍니다. 그 점쟁이가 돌아가면서 준 게 바로 '전(前)' 자 였어요."

"앞 전?"
"예에. 문가에서 점쟁이가 뒤돌아보며 하는 말이, 만약 어디를 가고 싶으면 지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면 인연을 얻을 것이라 했답니다."

"인연을 얻었소?"
"글쎄요···. 굳이 인연이라 할 것까진 없지만 돌아오던 길에 이내관은 갖바치를 아비로 둔 설이(雪伊)란 계집을 만났답니다. 점쟁이 말이 생각나 그 처자에게, 만약 무슨 일이 있거나 오갈 곳이 없으면 운니동에 있는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답니다."

추내관은 머뭇거리며 다음 얘기를 우물거렸다.
"뒷얘긴 자세히 모르지만, 며칠 후 전하께서 이내관 집에서 자고 오신 일이 있습니다. 미행 나갔다가 육신이 곤고해 잠시 쉰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다 했습니다만 야릇한 소문이 궁에 떠돌았어요. 전하가 만난 처녀는 궁인이 아니었지만, 타고난 몸이 다시 없다는 소문이었어요. 이런 여인을 사랑하면 사내는 장수할 수 있고 두 사람이 관계하면 할수록 수명을 누리고 복록을 쌓아간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후 알게 된 일이지만 전(前)은 이내관의 승승장구를 나타내는 글자였습니다. 이 글자엔 꽃(花)과 달(月)이 있고 이로움(利)까지 있습니다. 만약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일에 불(煎)을 얻어 바짝 졸이면 되고, 학문하는 선비면 '미인의 힘을 빌려 어떤 일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목이 졸린 사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궁 안 내명부에서 중전마마 다음 자리는 숙의 박씨였다. 상감이 중전마마와 혼례를 치르기 전부터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으므로 내명부 살림살이는 직접 나서지 않는다 해도 훤히 꿰뚫는다는 능구렁이였다. 걸핏하면 그녀는 궐 안의 인맥을 들먹였다.

"지금 내의원에 봉사로 근무하는 이가 우리 집안 먼 친척이다. 벼슬 직제로 본다면 내의원 도제조 역시 남이라고 할 수 없는 나완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깝다 할 수 있다. 조정은 고약한 중전의 패거리들이 궁 안을 자기네 세상인 양 진을 치고 있어 상감께선 이들을 두고 보시지만, 나라의 장래로 볼 때는 방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내명부에 뿌리 내리려면 무엇보다 중전과 수빈 박씨의 세를 꺾어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중신들을 규합해 우리의 세를 늘리는 것도 방책일 수 있으나 확실한 것은 중전의 몸에 왕자 아기씨가 잉태되선 안 된다는 것이다. 주상의 연치가 적지 않으니 앞으론 회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했다."

"하오면?"
"그렇다고 내의원에 손을 써 좋은 약재로 탕약을 만들어 주상의 건강을 회복시킨다는 게 얼마나 맥없는 짓이냐. 그러나 모든 걸 포기하고 뒷짐 진 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방법이 있습니까?"
"없는 건 아니네."
"말씀해 주십시오, 마마님."

"내가 아는 바, 이공수 내관이 계집 하나를 주었는데 그 애가 상감을 모신 게 한 달 전이라 했네. 그렇다 보니 이내관에게 은밀히 청을 넣어 그 아이가 받은 녹두패를 가져오라 했네. 헌데, 지금껏 소식이 없으니 죽일 수밖에."

"예에?"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되는 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야. 다행히 이내관이 내 청을 들어준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형부에 있는 궐자의 손으로 입을 막아야겠지."

이날 밤 이내관은 자신의 처소에서 목이 졸려 죽은 후 자액으로 위장 돼 대들보에 매달린 신세가 됐다. 형부에서 포교들이 곳곳을 조사하던 중 경기감영에 파견된 서과가 돌아왔다.

"요즘 이내관은 담비 가죽으로 뭔가를 만들었다는데 죽은 자의 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만, 죽기 전 어찌나 왼손을 강하게 쥐었는지 손을 부드럽게 만들어 펼쳤답니다. 안에서 나온 건 기름종이에 쓰인 배년붕반(配年朋半)이란 글자와 뒷면에 물 수(水) 자가 쓰인 것입니다."
"물 수라?"

[주]
∎오석산(五石散) ; 한식산이라 불리는 중원의 제왕들을 요절시킨 성력을 키우는 다섯 가지 돌가루
∎초의(貂衣) ; 담비 가죽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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