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우린 더 좋은 음악을 들을 권리가 있어!
[주장] 성공적인 서바이벌과 훌륭한 음악을 위해
3월 31일 방송된 MBC <100분 토론>의 주제는 다름 아닌 '대중음악'과 '서바이벌'이었다. 특히나 얼마 전 재도전 논란으로 화제가 되었던 <나는 가수다>를 비롯하여, 현재 대중음악과 거대 미디어의 결합인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풍을 상당히 심도 있게 다뤘다.
특히 그룹 '부활'의 리더 김태원,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그룹 'N.EX.T'의 신해철을 위시하여, 공연연출가 탁현민과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출연으로 상당히 오랜만에 대중음악에 대한 수준 높은 논의가 이어졌다는 평가다.
이날 <100분 토론>에서 다뤄진 논의는 몇 가지로 축약된다. 서바이벌이나 오디션과 같은 경쟁, 그중에서도 대중예술의 분야인 '음악'이 경쟁의 주가 되는 프로그램의 원인과 장단점, 그리고 방향성의 조율이다.
'서바이벌' 제도가 주는 '장점'이란?
사실 현재 난립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시대의 반영과도 맞닿아 있으며, 방송국 입장에선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시청률이 곧 프로그램의 질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현재와 같은 시대에서, 높은 시청률이 보장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존폐를 논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이미 '아름다움'이 젊은 여성의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되는 시점에서 그녀들의 성형수술을 비판하여 성형외과를 문 닫게 하자는 주장은 허언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현재 잠정 중단된 <나는 가수다>는 분명 시기가 되면 다시 전파를 탈 것이고, 이미 예고된 KBS, SBS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조만간 차질 없이 시청자의 문을 두드릴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100분 토론> 초반에도 나온 얘기이지만 거기엔 환희가 있고, 감동이 있고, 이야기가 있으며 절망이 있다. 한 회로 끝나는 단편이 아닌, 매주 방송하는 중독성 강한 주말 드라마다. 대중들이 그 리얼한 드라마를 가장 높은 곳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사실 강력한 쾌감이다.
특히 그 드라마가 음악과 만나면 그 쾌감은 배가 된다. 3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사람의 가슴을 빠르게 때리는 음악이라는 대중예술, 그리고 연예인 중에서도 단연 '꽃'이라 불리는 가수의 존재는 한국에서 원래가 그러했다. 따라서 <나는 가수다>와 같이 하늘에 떠 있는 그 '가수'들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동안 상실되어왔다고 느끼는 스타와 대중 간의 힘의 역학관계를 되찾는 일종의 신선함이 녹아 있다. 따라서 그 신선함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자는 가차 없이 비판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대중들의 태도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상당히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따라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가진 강점 중 하나는, 이처럼 대중들이 서바이벌이라는 제도를 통해 높은 곳에 앉아 누군가를 심사해야 하는 입장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청자들로 하여금 음악을 가장 집중해서 감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누군가를 심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직관에 대한 믿음과 책임을 동반한다. 이는 결국 음악을 외면하고 길을 걷던 행인들을 끝까지 묶어두게 만드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또한 출연 가수들은 그러한 시청자,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최상의 무대를 위해 노력한다. 이런 그들의 태도는 반드시 감동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삶에 있어 딱히 큰 존재가 못 되었던 대중음악은, 그 순간 모두가 숨죽여 감상하는 커다란 무엇인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를 통해 그동안 소리에 무심했던 대중들이, 이를 계기로 주관적인 음악관을 다시 재생하며 '나에게 있어 좋은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혹은 '어떠한 음악에 관심을 주어야 할 것인가'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가지는 장점은 꽤 명확해진다. 예술은 계량적인 수치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수용자의 주관적인 가치평가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평가와 선호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우선 익숙한 음악의 섭취를 통한 감동의 학습이라고 전제한다면, 서바이벌과 오디션 프로그램은 한국대중음악 발전에 있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존재가 되기도 할 것이다.
성공적인 '서바이벌'을 위하여
그렇다면 이제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의 문제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반짝하는 시청률 상승의 호재로 이용되거나 방송사의 입맛에 맞는 끌려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는 한국대중음악과 대형 미디어 간의 상생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거기엔 물론 절대적이진 못해도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토론에서 지적된 대로 '다양성'의 구축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된 뮤지션들이 후에 흔히들 말하는 대형 기획사가 양산해내는 가수들로 전락해버린다면, 그들의 도전은 진입하지 못하는 또 다른 벽만을 양산해낼 뿐이다. 최근 엠넷에서 방송한 <슈퍼스타K>에서 상위권에 입상한 가수들이 현재 지상파 음악 방송 출연에 알게 모르게 압력을 받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배신행위임을 방송사는 자각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토론에서 신해철이 지적한대로, 프로그램 콘셉트 자체도 가장 앞에 나와 있는 보컬리스트뿐만이 아니라, 연주자와 음악을 만드는 다양한 뮤지션들 모두를 아우르는 지혜가 절실하다. 맨 앞에 나와 있는 가수만을 쳐다보게 하고, 프로그램 자체가 '음악인'이 아닌 '스타'만을 비춘다면 이러한 획일화의 악순환은 그저 반복될 뿐이다.
또한 거기 하나 더 필요한 요소는 '지원자들' 그 자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오디션에 참가하는가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지원자들 자체가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지원자들이 치열한 오디션을 통해 원하는 '가수'의 모습이란 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기획사의 아이돌스타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그 출발부터 어긋난 것임을 스스로 알 필요가 있다.
알겠지만 철저한 기획 시스템과 거대 방송사간의 결합을 통해 탄생되는 대형 아이돌은 하루 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위대한탄생>의 심사위원인 '부활'의 김태원은 심사를 할 때 '계속해서 음악을 할 사람'을 본다고 했다. 그저 막연히 스타가 되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정했다면, 그 자신은 프로그램의 소모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며, 흔히 말하는 '아이돌 고시'의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아닐까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들이 음악에 가지는 '인정'이다. 얼마 전 <나는 가수다>의 재도전 논란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를 깨닫게 했다. 하나는 우리가 그동안 천편일률적인 대중음악에 상당히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긍정적인 발견과, 또 다른 하나는 대중들이 음악에 대해 너무 강직한 자세를 들이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 한 명의 특별한 잘못은 아니다.
이러한 대중들의 경직된 자세는 사실 음악이 주는 각자 다른 감동을 전해주지 못한 거대 방송사들과 돈 안 되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을 거의 말살하다시피 한 대형 제작사 측에 있다. 이러한 돈을 위한 그들만의 커넥션은, 대중들이 그동안 한국대중음악을 인정하지 않고 닫힌 자세를 가지게 된 분명한 원인이다.
때문에 그동안 그들에 의해 강요되고 편중된 주류음악을 접했던 대중들의 인식 안에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대중음악에 대한 근원적인 비난 역시도 함께 심어졌다. 더 이상 한국대중음악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관심조차 멀어지게 만든 원인은 그들 스스로 제공한 측면이 사실 상당히 크다.
따라서 이제 대중들은 스스로 음악이 주는 감동은 인정하고, 오랫동안 그러한 길을 개척한 뮤지션에 대한 관대한 자세도 함께 필요한 시점이다. 존중이 아니다. 대중음악에 대한 '인정'만 있어서도, 지난 20년 동안 노래를 했던 한 가수가 그토록 많은 비난에 쌓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글쓴이 혼자만의 착각일까.
음악이 선물하는 '감동'을 위하여
하지만 이러한 비난도, 27일 <나는 가수다> 방송분에서 김건모가 손까지 떨며 들려준 노래에 의해 약간은 누그러졌다. 왜일까. 음악은 이처럼 형식적인 사회, 법률, 경제적 문제와는 달리, 가슴에 있는 암묵적인 감동에 호소하는 일종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음악은 들린다고 적어도 나는 믿는다.
우리는 더 좋은 음악을 들을 권리가 있다. 더 강한 감동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이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을 빌려 발현된다는 점이 약간은, 아니 사실 굉장히 서글프고 때론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다양한 감동을 느끼는 시작점으로 이용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공연 관람이나 음반 구입과 같이 다양한 음악적 접근방식과, 나아가 스스로 더 좋은 음악을 찾는 자발적인 여행을 하는 대중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훌륭한 대중이 훌륭한 예술을 만든다는 것은 진리니까 말이다.
특히 그룹 '부활'의 리더 김태원,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그룹 'N.EX.T'의 신해철을 위시하여, 공연연출가 탁현민과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출연으로 상당히 오랜만에 대중음악에 대한 수준 높은 논의가 이어졌다는 평가다.
이날 <100분 토론>에서 다뤄진 논의는 몇 가지로 축약된다. 서바이벌이나 오디션과 같은 경쟁, 그중에서도 대중예술의 분야인 '음악'이 경쟁의 주가 되는 프로그램의 원인과 장단점, 그리고 방향성의 조율이다.
▲ 멘토제도를 통해 오디션을 진행하는 MBC <위대한 탄생>. ⓒ MBC
사실 현재 난립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시대의 반영과도 맞닿아 있으며, 방송국 입장에선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시청률이 곧 프로그램의 질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현재와 같은 시대에서, 높은 시청률이 보장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존폐를 논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이미 '아름다움'이 젊은 여성의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되는 시점에서 그녀들의 성형수술을 비판하여 성형외과를 문 닫게 하자는 주장은 허언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현재 잠정 중단된 <나는 가수다>는 분명 시기가 되면 다시 전파를 탈 것이고, 이미 예고된 KBS, SBS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조만간 차질 없이 시청자의 문을 두드릴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100분 토론> 초반에도 나온 얘기이지만 거기엔 환희가 있고, 감동이 있고, 이야기가 있으며 절망이 있다. 한 회로 끝나는 단편이 아닌, 매주 방송하는 중독성 강한 주말 드라마다. 대중들이 그 리얼한 드라마를 가장 높은 곳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사실 강력한 쾌감이다.
특히 그 드라마가 음악과 만나면 그 쾌감은 배가 된다. 3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사람의 가슴을 빠르게 때리는 음악이라는 대중예술, 그리고 연예인 중에서도 단연 '꽃'이라 불리는 가수의 존재는 한국에서 원래가 그러했다. 따라서 <나는 가수다>와 같이 하늘에 떠 있는 그 '가수'들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동안 상실되어왔다고 느끼는 스타와 대중 간의 힘의 역학관계를 되찾는 일종의 신선함이 녹아 있다. 따라서 그 신선함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자는 가차 없이 비판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대중들의 태도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상당히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따라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가진 강점 중 하나는, 이처럼 대중들이 서바이벌이라는 제도를 통해 높은 곳에 앉아 누군가를 심사해야 하는 입장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청자들로 하여금 음악을 가장 집중해서 감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누군가를 심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직관에 대한 믿음과 책임을 동반한다. 이는 결국 음악을 외면하고 길을 걷던 행인들을 끝까지 묶어두게 만드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또한 출연 가수들은 그러한 시청자,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최상의 무대를 위해 노력한다. 이런 그들의 태도는 반드시 감동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삶에 있어 딱히 큰 존재가 못 되었던 대중음악은, 그 순간 모두가 숨죽여 감상하는 커다란 무엇인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를 통해 그동안 소리에 무심했던 대중들이, 이를 계기로 주관적인 음악관을 다시 재생하며 '나에게 있어 좋은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혹은 '어떠한 음악에 관심을 주어야 할 것인가'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가지는 장점은 꽤 명확해진다. 예술은 계량적인 수치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수용자의 주관적인 가치평가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평가와 선호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우선 익숙한 음악의 섭취를 통한 감동의 학습이라고 전제한다면, 서바이벌과 오디션 프로그램은 한국대중음악 발전에 있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존재가 되기도 할 것이다.
▲ 서바이벌 제도의 조건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패널들. 이 날 방송에는 박칼린, 김태원, 신해철, 탁현민, 하재근이 출연했다. ⓒ MBC
성공적인 '서바이벌'을 위하여
그렇다면 이제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의 문제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반짝하는 시청률 상승의 호재로 이용되거나 방송사의 입맛에 맞는 끌려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는 한국대중음악과 대형 미디어 간의 상생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거기엔 물론 절대적이진 못해도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토론에서 지적된 대로 '다양성'의 구축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된 뮤지션들이 후에 흔히들 말하는 대형 기획사가 양산해내는 가수들로 전락해버린다면, 그들의 도전은 진입하지 못하는 또 다른 벽만을 양산해낼 뿐이다. 최근 엠넷에서 방송한 <슈퍼스타K>에서 상위권에 입상한 가수들이 현재 지상파 음악 방송 출연에 알게 모르게 압력을 받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배신행위임을 방송사는 자각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토론에서 신해철이 지적한대로, 프로그램 콘셉트 자체도 가장 앞에 나와 있는 보컬리스트뿐만이 아니라, 연주자와 음악을 만드는 다양한 뮤지션들 모두를 아우르는 지혜가 절실하다. 맨 앞에 나와 있는 가수만을 쳐다보게 하고, 프로그램 자체가 '음악인'이 아닌 '스타'만을 비춘다면 이러한 획일화의 악순환은 그저 반복될 뿐이다.
또한 거기 하나 더 필요한 요소는 '지원자들' 그 자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오디션에 참가하는가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지원자들 자체가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지원자들이 치열한 오디션을 통해 원하는 '가수'의 모습이란 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기획사의 아이돌스타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그 출발부터 어긋난 것임을 스스로 알 필요가 있다.
알겠지만 철저한 기획 시스템과 거대 방송사간의 결합을 통해 탄생되는 대형 아이돌은 하루 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위대한탄생>의 심사위원인 '부활'의 김태원은 심사를 할 때 '계속해서 음악을 할 사람'을 본다고 했다. 그저 막연히 스타가 되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정했다면, 그 자신은 프로그램의 소모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며, 흔히 말하는 '아이돌 고시'의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아닐까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들이 음악에 가지는 '인정'이다. 얼마 전 <나는 가수다>의 재도전 논란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를 깨닫게 했다. 하나는 우리가 그동안 천편일률적인 대중음악에 상당히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긍정적인 발견과, 또 다른 하나는 대중들이 음악에 대해 너무 강직한 자세를 들이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 한 명의 특별한 잘못은 아니다.
이러한 대중들의 경직된 자세는 사실 음악이 주는 각자 다른 감동을 전해주지 못한 거대 방송사들과 돈 안 되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을 거의 말살하다시피 한 대형 제작사 측에 있다. 이러한 돈을 위한 그들만의 커넥션은, 대중들이 그동안 한국대중음악을 인정하지 않고 닫힌 자세를 가지게 된 분명한 원인이다.
때문에 그동안 그들에 의해 강요되고 편중된 주류음악을 접했던 대중들의 인식 안에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대중음악에 대한 근원적인 비난 역시도 함께 심어졌다. 더 이상 한국대중음악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관심조차 멀어지게 만든 원인은 그들 스스로 제공한 측면이 사실 상당히 크다.
따라서 이제 대중들은 스스로 음악이 주는 감동은 인정하고, 오랫동안 그러한 길을 개척한 뮤지션에 대한 관대한 자세도 함께 필요한 시점이다. 존중이 아니다. 대중음악에 대한 '인정'만 있어서도, 지난 20년 동안 노래를 했던 한 가수가 그토록 많은 비난에 쌓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글쓴이 혼자만의 착각일까.
음악이 선물하는 '감동'을 위하여
하지만 이러한 비난도, 27일 <나는 가수다> 방송분에서 김건모가 손까지 떨며 들려준 노래에 의해 약간은 누그러졌다. 왜일까. 음악은 이처럼 형식적인 사회, 법률, 경제적 문제와는 달리, 가슴에 있는 암묵적인 감동에 호소하는 일종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음악은 들린다고 적어도 나는 믿는다.
우리는 더 좋은 음악을 들을 권리가 있다. 더 강한 감동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이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을 빌려 발현된다는 점이 약간은, 아니 사실 굉장히 서글프고 때론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다양한 감동을 느끼는 시작점으로 이용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공연 관람이나 음반 구입과 같이 다양한 음악적 접근방식과, 나아가 스스로 더 좋은 음악을 찾는 자발적인 여행을 하는 대중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훌륭한 대중이 훌륭한 예술을 만든다는 것은 진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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