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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순수해서 죽음 선택한 것 같아요"

[인터뷰] 연극 'TAXI, TAXI'의 두 배우, 허린·한송이씨

등록|2011.04.06 18:35 수정|2011.04.06 18:36

▲ 연극 'TAXI, TAXI'의 배우 허린(왼쪽)과 한송이 ⓒ Kim Art Institute Theater


1988년생 허린(23)씨와 1989년생 한송이(22)씨, 둘 다 아직 얼굴이 앳되다. 지난 2일 인터뷰 전에 관람한 연극 <TAXI, TAXI>에서 각각 신인 여배우와 반도체 공장 노동자를 연기한 두 사람. 무대가 아닌 대학로 삼겹살집에서 마주하니 여느 대학생들과 다르지 않다. 적당히 수줍어하고, 또박또박 할 말은 한다.

지난 3월 4일부터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TAXI, TAXI>는 김상수(53) 연출가가 사회구조적 모순을 고발하는 21년 전 원작의 큰 틀에 현재 한국 사회 현실을 녹인 새로운 버전이다. 허린씨와 한송이씨는 자신들이 갓 태어나던 해에 무대에 올랐던 연극에서 오늘날 상처받은 사람들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20대, 사회적 폭력에 희생당한 청춘을 연기하다


허린씨가 연기한 '여자1'은 스타가 아닌 배우를 꿈꾸는 신인 여배우다. '여자1'은 "영화배우냐"는 질문에 "비슷하다"고 머뭇거리지만, 햄 광고에 등장한 자신을 알아보는 눈치에 호들갑 떨며 기뻐할 정도로 순진하다. 하지만 연기 외의 것을 요구하는 힘센 사람들에 의해 몸과 마음을 짓밟힌다. 극 중에서 가장 정신적, 물리적인 폭력에 노출된 역할이다.

"제 직업도 여배우지만 '여자1'의 이야기가 여배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잖아요. 여성, 심지어 여아를 상대로 한 학대와 범죄는 간접적으로나마 많이 봐 왔기 때문에 감정이입은 어렵지 않았어요. 하지만 자신이 더럽혀졌다는 죄책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장면은 표현하기 힘들더라고요."

"살고 싶어요!"반도체 공장 노동자 '천미루' 역의 한송이가 열연하고 있다. ⓒ Kim Art Institute Theater

한송이씨가 맡은 반도체 공장 노동자 '천미루'는 극의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도 비중이 크지 않다. 마치 찰리 채플린이 출연한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처럼 말도 없이 기계적으로 일한다.

한송이씨는 "백혈병을 오로지 연기로만 표현해야 하는 게 어려웠어요"라고 말했다. 줄곧 아픔을 혼자 삼키던 천미루는 종반에 가서야 세상을 향해 "살고 싶다"고 소리친다. 그녀가 연기하기 가장 힘들어했던 장면이다.

"미루는 어리지만 맑고 착한 아이예요. 죽음까지 성숙하게 받아들이던 아이가 마지막에는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됐어요."

두 사람이 연기하는 인물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모르기 어려울 정도로 <TAXI, TAXI>는 이야기의 가공을 삼갔다. 극 중에서 '샴숑'이라고 불리는 반도체 공장에는 가려지지 않는 삼성의 그림자가 있다. 배우는 사회적 타살로 목숨을 잃은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며 연기하고 있을까. 연극을 하면서 인물이 처했던 사건이나 사회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됐냐는 질문에 한송이씨는 "그럼요"하고 힘주어 대답했다.

"지금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딸을 잃은 아버지가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많은 걸 느낍니다. 연극을 하기 전에도 사회적인 기사들을 보기는 했지만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나니까 일단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죠. 작품을 하면서는 어쨌든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으니 피하려는 마음은 없어졌어요. 더 많이 알고 싶어요."

"배우가 되고 싶을 뿐이에요"허린이 신인 여배우 '여자1' 역을 연기하고 있다. ⓒ Kim Art Institute Theater


허린씨가 맡은 역은 바로 얼마 전까지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배우를 연상시킨다. 사망 2주기가 지난 지금에도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진실을 위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고 장자연. 그녀와 같은 직업을 가진 허린씨는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장자연씨 생각이 많이 났어요. 장자연씨는 순수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택했다고 생각해요. 비극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이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죠.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도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안양예고 단짝으로 만나 배우로 재회하기까지

▲ 대학로의 한 고깃집에서 인터뷰 중인 허린(왼쪽)과 한송이 ⓒ 이선필

사회적 폭력으로 희생당한 영혼을 연기하는 배우로서의 중압감을 걷어내고 보면 두 사람은 아직 20대 초반. 또래 여학생들처럼 공연이 없을 때는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친구들과 수다도 떤다.

안양예술고등학교 동문인 둘은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다. 한송이씨는 중학교 때 3년 동안 연극반 생활을 하며 연기의 재미를 알았다. 허린씨는 연기를 하기 전에 쇼트트랙 선수를 준비했지만 아름다운 여자로 살고 싶어 운동을 포기했다. 입학 후에도 연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허린씨는 1학년 워크숍 때 오른 연극무대에서 비로소 관객들의 박수가 짜릿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20대가 되어 배우로 다시 만났다. 허린씨는 영화 <영도다리>의 '상미' 역으로 시작해 공연 쪽으로 연이 닿았고, 한송이씨 역시 간간이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학교 내 극단 활동을 했다.

이들이 재회한 지점은 극단 '현존 퍼포먼스'에서 작년 12월 무대에 올렸던 연극 <캘리포니아>. 이 작품으로 둘은 <TAXI, TAXI>의 오디션 제의를 받았고, 무려 250명 가운데 뽑혔다. 김상수 연출가는 두 사람에 대해 "연기가 산만하지 않고 깔끔합니다"면서 "앞으로 크게 성장할 배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평가했다.

"예술성도 있어야 하는데, 대중들을 코믹한 것만 찾아요"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연극배우만으로 생활하기는 퍽 어렵다. 이들의 출연료는 월급 100만 원.

한송이씨는 "제 나이면 규칙적인 수입이 생겨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힘들어요"라고 속내를 내비치면서도 "흔들리는 순간이 와도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작품 하나가 끝나면 공백 기간을 이용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번다. 주로 하는 일은 대형마트의 명절세트 판매직인데, 일당이 8만 원이라 꽤 짭짤하다고 한다. 

관객이라도 많으면 좋으련만, 공연을 시작한 지 한 달여 지난 <TAXI, TAXI>의 흥행률은 신통치 않다. 허린씨는 "무거운 주제죠,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문화생활을 하면서까지 아프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국 사회는 폭력적인 현실을 굳이 맞닥뜨리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막상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은 의외로 좋았다고들 해요. 이런 연극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야 하는데 홍보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한송이씨는 "연극 자체의 예술성도 있어야 하는데 대중들은 예매 1순위, 코믹하고 즐거운 것들만 찾아요"라고 지적하면서 "초대권부터 달라는 관행도 너무 당연시되어 있어요"라고 연극계의 구조적인 문제도 덧붙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목표는 '배우다운 배우'가 되는 것이다. <TAXI, TAXI>에도 "스타가 되기보다 배우가 될 거예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무대에서 '여자1'의 입을 빌려 소망할 때처럼 허린은 말했다.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존중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누가 신인 여배우와 삼성 노동자를 죽였나?
21년 전 연극 <TAXI, TAXI>의 2011년 판 사회 고발

▲ 연극 < TAXI, TAXI>의 무대 위에 택시 한 대가 놓여 있다. ⓒ Kim Art Institute Theater


대학로에는 지하에서 탑승하는 택시가 있다. 혜화역 대로변에 위치한 극장 '공간, 아울'의 계단을 내려가면 연극 <TAXI, TAXI>를 위해 마련된 낡은 택시 한 대를 만날 수 있다.

3월 4일부터 공연을 시작한 이 작품은 1988년 무대에 올랐던 동명 창작극의 2011년 버전이다. 김상수 연출가는 "엉터리 번역극, 유행만을 좇는 오늘날의 연극계에 제대로 된 작품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등장인물들은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군상들을 대변한다. 신인 여배우는 욕망의 분출구로 사용되고, 권력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꺼져가는 노동자의 생명에 500만 원을 쥐여주며 쉬이 위로한다. 가장 아래층의 약자를 향한 폭력은 하청의 하청을 거친다. 제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우아한' 권력의 횡포를 이 작품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실을 직시하는 이 연극이 외면받는 까닭

세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TAXI, TAXI>는 오히려 바깥의 현실을 오롯이 담고 있지만 관객 몰이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후 4시와 8시 공연이 있는 금요일 저녁. 젊은이들의 소비 1번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극장 내부는 적막한 공기로 가득 찼다. 170석 규모의 객석에는 조명을 담당하는 스태프를 포함해 10명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앉았다. 객석이 감싸 안은 듯한 반원형 구조의 무대는 배우의 작은 호흡까지 전달할 만큼 관객과 가까웠다. 

배우들은 몇 안 되는 관객의 눈을, 혹은 허공을 응시하며 세상에 상처받은 주인공들을 연기했다. 이는 아무리 소리쳐도 듣는 이 없는 사회에 대한 약자들의 일갈을 닮아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지나치게 날것의 현실을 까발려 놓았기 때문일까.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의 관람은 '즐겁지만은 않은' 문화생활이다. 

우리가 애써 보지 않으려 하는 불편한 진실을 이 작품은 아프게 헤집는다. 그러면서도 어둠 속에 꿈틀거리는 생명을 건져 올리고 있다.  

연극 <TAXI, TAXI>는 5월 1일까지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대학로 '공간, 아울'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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