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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75] 복제인간의 정체성 찾기 <네버 렛미고>

등록|2011.04.11 16:13 수정|2011.05.24 14:13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제인간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되짚다

복제인간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전제합니다. 시대 배경은 대부분 미래사회의 어느 지점입니다. 그리고 원본 인간에게 장기기증을 한 뒤 폐기처분되는 운명을 타고났던 복제인간들이 '생각하는 상품'이 되면서 영화는 극적인 전환을 맞습니다. 그런데 같은 복제인간을 소재로 하면서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됐습니다.

복제인간이 살아가는 무대도 가상공간이 아니라 영국의 전원도시 중 한 곳입니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일랜드>처럼 복제인간을 배양시키고 가짜 기억을 이식하는 최첨단 과학기술이나 그 흔한 컴퓨터그래픽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복제인간의 독백과 회상을 교차 편집하는 가운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조망하는 <네버 렛미고>입니다.

▲ 복제인간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는 헤일셤 기숙학교에서 교장 에미리가 전교생을 상대로 훈시를 하고 있다. ⓒ DNA필름




영화는 기존의 SF 장르와 선을 분명하게 긋습니다. 100대 영문소설로 선정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원작으로 한 품새가 확연합니다. 장기이식을 위해 복제된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함에도 원본의 세계를 위협하지 않을뿐더러, 장기기증을 하고 얼마 뒤 죽는다는 사실까지 덤덤히 받아들입니다. 개중 몇몇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를 증명하면 기증유예 즉, 몇 년 더 살 수 있다는 소문에 관심을 두는 정도니까요. 

대신 영화는 그 어떤 인간들보다 존재의 존엄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색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또한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연적이 되는 두 여자를 통해 여성들의 섬세한 감정 결을 포착합니다. 예정된 삶의 설계도에 저항하지 않는 영화의 숙명론은 관객들을 참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마치 한 편의 정물화를 그리듯 이들의 삶을 클로즈업하며 띄우는 영화의 메시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태어난 이유가 달랐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세상에서 원본인 당신은 인간답게 살고 있느냐고. 혹시 원본인 당신들도 우리 못지않게 빼앗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진정 인간다운 존엄성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되물으니까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준 우정과 사랑에 대한 송가

영화는 '헤일셤 1978년', '코티지 1985년', '죽음 1994년' 등 세 가지 챕터로 전개됩니다. 오프닝 또한 SF 영화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역발상으로 시작합니다. 28살의 캐시(캐리 멀리건)가 수술실 밖 유리창을 통해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토미(앤드류 가필드)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캐시의 독백을 따라 이들의 유년 시절이 묻어 있는 헤일셤 기숙학교로 거슬러갑니다.

어리바리하면서도 한 성깔 하는 토미는 운동도 잘 못하는데다 그림도 못 그려 사내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합니다. 캐시는 그런 토미를 유일하게 챙겨주며 서로의 눈길을 주고받습니다. 여기에 그 둘을 집요하게 뒤쫓는 눈길이 있으니, 루스(키이라 나이틀리)입니다. 

▲ 코티지로 옮긴 뒤 캐시와 토미가 산책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루스. 토미에 대한 루스의 집착은 복제인간의 또 다른 자기 정체성 찾기다. ⓒ DNA필름




그런 어느 날, 아이들이 만든 그림과 시 등을 수거해 가는 마담 마리가 헤일셤을 방문하고 바자회가 열립니다. 마땅히 고를 게 없는 캐시에게 토미는 노래테이프를 선물합니다. 침대에 앉아 노래를 듣는 캐시의 귓가로 영화의 OST가 애절하게 흘러나옵니다. "그대여, 나를 안아줘요. 그리고 '나를 절대로 보내지 말아요.'(Never Let Me Go)"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내리깐 채 홍조 띤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상반신을 좌우로 흔들며 흥얼거리는 캐시. 뒤에서 인기척이 나 돌아보니 루스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영화의 키워드에 해당됩니다. 단짝 친구인 캐시와 루스 사이에 토미가 끼어들면서 셋으로 관계의 폭이 확장된 이들의 사랑과 우정의 편린을 상징하니까요. 그와 함께 오직 장기기증 목적으로 태어난 것을 알게 되면서 희망은 결코 자신들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대신해 줍니다. 즉, 영화 제목 <네버 렛미고>는 짧은 생을 사는 복제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게 해준 우정과 사랑에 대한 성찰이자 송가였던 셈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는 데는 루시 선생이 있습니다. 긴장된 표정으로 꼼짝없이 붙박인 아이들을 향해 그녀는 헤일셤의 학생들은 인생이 정해져 있다며 진실을 말합니다. 어른이 되겠지만 아주 잠깐 뿐. 어른이 되기 전에 몸속의 장기들을 기증하고 나면 삶은 곧 끝납니다. 루시는 "너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알아야만 해. 그래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나지막이 말합니다. 그러나 얼마 뒤 루시 선생은 해직됩니다.

이 대목은 피터 위어 감독의 걸작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연상시킬 만큼 인상적입니다. 학교에서 해직된 키딩 선생이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 아이들이 하나둘 책상 위로 올라가 "캡틴, 마이 캡틴"을 말하며 경의를 표하는 감동적인 장면 말입니다. 키딩 선생이 수업 중에 아이들로 하여금 책상 위로 올라가 세상을 다양한 각도로 보게 했던 그 연대는 하지만 <네버 렛미고>에서는 재현되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캐시의 독백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삶과 죽음으로 갈라지는 수혜자와 기증자

18살이 되면서 셋은 코티지로 거처를 옮기고 장기기증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 묵습니다. 그리고 셋 모두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질풍노도와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캐시는 포르노 잡지를 주워선 토미와 같이 보자고 하지만 그 속내는 자신의 원본을 찾기 위한 방편이었음이 후일 밝혀집니다. 루스 또한 자신의 원본을 찾으러 나섰다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우린 마약중독자나 창녀, 부랑자 등과 같은 쓰레기들을 복제한 것"이라고 절규합니다.

토미는 기증유예를 하고 싶어도 캐시는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자신은 그려 놓은 그림이 없어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헤일셤의 교사들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영혼을 들여다보는 한편 러브체인을 가늠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토미의 고백을 뒤로하고 캐시는 복제인간을 돌보는 간병인이 되어 코티지를 떠납니다. 그리고 1994년 캐시가 루스와 재회하는 그 10년 동안 토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던 그림을 수없이, 그리고 또 그립니다.

▲ 생애 처음떠난 여행에서 바닷가에 버려진 폐선을 보는 세 사람. 폐선은 복제인간들을 사육하다 지금은 문을 닫은 헤일셤을 상징한다. ⓒ DNA필름




이미 두 번이나 장기를 적출당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루스는 캐시에게 셋 만의 여행을 제안합니다. 기증을 네 번이나 해도 의식이 남아 있고, 산소마스크가 제거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더 많은 기증을 위해 몸이 해체되어야 하는 끔찍한 최후를 병실에서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황량한 바닷가에서 루스는 둘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자신이 토미를 선택했던 것은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았던 것 때문이라고. 이제라도 바로 잡기 위해 기증유예 신청을 하라며 집주소를 건넵니다. 그 며칠 뒤 루스는 간을 떼이고 눈을 감습니다. 

마담 마리를 찾은 두 연인 앞에 휠체어를 탄 교장 에밀리가 나타나면서 영화는 반전을 예고합니다. 그림은 아이들에게 영혼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도구였다고. 아이들의 능력을 증명해 헤일셤을 기증윤리를 혁신하는 마지막 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결국 기증유예는 사랑하는 연인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갖기 위한 복제인간들의 간절한 바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내린 토미는 어둠이 드리운 들녘을 향해 울부짖고, 캐시는 토미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음을 토해냅니다.

카메라가 다시 수술실을 사이에 두고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연인에게로 돌아옵니다. 토미는 따듯한 미소를 머금고, 캐시도 부드러운 미소를 띄웁니다. 장기를 적출하기 위해 마취제가 투여되고, 서서히 눈을 감고, 그리고 그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는 캐시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립니다. 이윽고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이 영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캐시의 마지막 독백이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쌍용자동차에서 1년 8개월 동안 13명이 사망했다

캐시의 마지막 독백은 이른바 숙명론을 함의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소름 끼치는 비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헤일셤의 아이들은 학교 울타리가 손을 짚고 넘을 정도로 낮은 데도 옴짝달싹 못한 채 지냅니다. 학교 측이 울타리를 넘어가면 손발이 잘린 채 나무에 묶인 시체가 된다는 공포를 퍼트려 아이들을 순치시킨 결과였습니다. 헤일셤을 개혁하고 아이들의 가능성을 증명하겠다면서 정작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자각할 수 있는 길은 다양한 방법으로 원천봉쇄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영화는 복제인간의 장기기증이라는 잔혹한 소재를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스 간의 우정을 날줄로 사랑을 씨줄로 엮어 가며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고찰합니다. 그리고 캐시의 마지막 독백을 빌려 관객들에게 현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찬찬히 되돌아 볼 것을 권유합니다. 이를테면 한국사회는 과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있는 사회인가, 라고.

한국사회는 인간의 존엄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이후 불과 1년 8개월 동안 자살 등으로 사망한 노동자 등이 13명이나 됩니다. 이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결국엔 우리도 마멸되고야 만다"고 했던 캐시의 또 다른 독백처럼 노동자의 존엄성을 적출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폭력성을 상징합니다. 영화 속 그들이 장기 기증을 요구받고 태어났다면 한국사회의 노동자들은 목숨 기증을 담보로 태어난 셈입니다.

자신의 원본에 맞서 봉기하고 마침내 해방을 맞는 <아일랜드>와는 달리 <네버 렛미고>의 엔딩은 갈가리 찢긴 비닐이 철조망에서 너덜거리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참담합니다. 자살을 선택한 쌍용노동자의 남편을 보내며 아내가 쓴 편지는 더욱 참담합니다. 편지의 행간에는 남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못지않게 두 아이와 함께 감내해 나가야 할 아내의 고된 풍파가 배어 나옵니다. 그래서 이내 가슴은 더 참담해 집니다.  

"오빠 내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내게 한 번만 기대보지 그랬어. 우리 두 아이들 내가 지킬게. 오빠 몫까지 내가 지켜야지. 오빠 도와 줄 거지? 내 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4년 3개월 고마웠어. 그리고 사랑했어. 이 다음에, 이 다음에 우리 다시 만나면 지금처럼 너무 짧게 사랑하지 말고 오래오래 내 곁에 오래오래 있어줘, 부탁이야."
(※ 윗글은 지난 2월 28일 자살 사망한 쌍용자동차 노동자 조아무개씨의 아내가 쓴 편지 중 일부입니다. - 기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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