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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사라진 1946년 10월의 대구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20) 10·1사건(10월 항쟁)

등록|2011.04.13 17:19 수정|2011.04.13 17:19

<대구시사>의 1946년에 관한 서술<대구시사>의 1946년에 관한 서술 <대구시사> 제1권 통사는 1228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1946년 10월에 대구에서 일어났던 10.1사건(또는 10월항쟁)에 대해서는 1024쪽에 불과 20줄 안팎의 간단한 서술만 하고 지나쳐버린다. 통사는 또 '10.1사건에 대해서는 뒤에 별도의 항목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상술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렇게 지나쳤지만 책은 그 어디에도 '상술'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대구시사>를 쓴 학자들은 상술을 할 계획이었던 듯한데, 누군가가 그렇게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 정만진


10·1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경찰과 노동평의회 사이에 마찰로 시작되어 10월 2일에 1만여 노동자와 학생이 경찰을 무장해제하고 폭도화하여 일으킨 대구에서의 무력 폭동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군정 당국이 계엄령을 발포하여 짧은 시간 내에 진압한 것이긴 했으나 대구에서만 사망자가 27명, 부상자가 61명, 건물 파괴가 156건이나 되는 막심한 피해를 내고 전국적 사회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대구에서 일어난 10·1폭동사건은 계속해서 경북의 여러 지방으로 파급되었고, 그 영향은 심각한 상황으로 나타났으며 가장 피해가 심했던 영천의 경우에는 사망자가 64명 부상자가 49명 건물 전소 10건 건물 파괴 87건이나 되었다. 10월 20일경에는 서울 지역으로 파급되어 서울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고 10월 30일에는 전남까지 소요가 파급됨으로써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0월사건의 소요 파급으로 혼란했던 전국의 치안질서가 평온을 되찾은 것은 11월 중순이었다. 이는 사상적 혼란 속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으로 이후 좌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살해 과정을 거쳐 지금도 우리 민족사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위의 인용문은 1946년 10월의 대구사건을 기록한 대구시 편 <대구시사>의 전문이다. 이 책이 '10·1사건' 또는 '10·1폭동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는 1946년 10월의 대구사태는 '10월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1995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개편 때에는 이 문제로 소위 '국사 교과서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는 것은 아직도 사건에 대한 성격 규명에 다툼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구시사>는 '지금도 우리 민족사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말하면서도 1946년의 대구사태를 단 몇 줄로만 언급하고 만다. 대구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진 민족사의 사건을 왜 이리도 야박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일까. 상당히 세밀한 진술을 보여주는 신복룡 저 <한국분단사 연구>(이하, '신복룡'), 대구경북연사연구회 저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이하, '역사 속의 대구'), 정해구 저 <10월 인민항쟁 연구>(이하, 정해구)의 해당 부분을 참고하여 1946년의 대구사건 또는 대구사태(신복룡의 표현)을 일별해보자.

(대구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로는 식량 부족과 이에 따른 기아(飢餓) 문제였다. 당초 군정은 한국에 식량이 넉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식량부족이란 신생 국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대구의 상황만 보더라도 식량 사정은 그리 열악하지 않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판에 기초한 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발동하고 2월 15일부터 강제 수집에 들어갔다. (중략) 농가가 식량으로 보유할 수 있는 쌀은 1인당 4말 5되뿐이었다. (중략) 시내의 양조장과 두부 공장 앞에는 술지게미와 비지를 사려는 굶주린 시민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고 있었다. (중략) 시민들은 쌀 기근이 사리사욕에 어두운 모리배들의 소행에서 빚어졌다고 지적하면서, 감춘 쌀을 일본에 밀수출하는 등 건국을 방해하고 동족을 착취하는 자들을 인민의 손으로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성토했다. (신복룡,  520-521쪽)

1945년  11월에 쌀 한 말 가격은 140원이었다. 그러나 1946년 9월말에는 1500원으로 폭등하여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배 이상 올랐다. (중략) 게다가 배급되는 식량마저도 군정 관리들이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자신들의 친인척에게 우선 배분하는 경우가 많아 식량을 배급받는 시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으며, 많은 서민들은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역사 속의 대구, 276-277쪽)

두 번째 요인은 경찰의 폭압이었다. (중략) 셋째로는 당시에 만연했던 콜레라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대구에 콜레라가 발생한 것은 8월경으로 1만여 명이 감염되어 있었다. (인용자주: 당시 대구 인구는 10만 정도였으니 콜레라 환자가 1만이나 되었다는 것은 정말 온 도시가 그 병에 짓눌린 형국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콜레라 감염에 대비하여 경비, 통제, 격리를 담당하는 통행검문소의 관리는 허술하기만 했다.

군정 당국은 우선 대구시 주변에 검역소를 설치하라고 지시하고 이에 따라서 간호원과 보조원을 포함하여 하루 평균 100여 명의 의대생들이 교수들의 지도 아래 의사 학생 국방경비대원들로 구성된 기동반에 편입되었다. (중략) (검문 업무 수행에 질서도 없고 인력도 부족한 것을 확인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대구의전 교수 이상요(李相堯)는 콜레라가 발생한 관내에 7월 30일부터 교통을 차단하라고 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이를 이행하지 않은 이유를 따졌다. (중략) 경찰은 5시간 동안이나 이상요를 공무 집행 방해죄로 유치장에 구금했다. (중략) 대구사태의 진원지가 대구의전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신복룡, 522-523쪽)

콜레라로 대구시민 120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중략)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교통도 두절되어 식량 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생사의 갈림길에 선 시민들은 군정에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관리는 대책을 마련하기 보다는 "조선에는 빵, 고기, 과일 등이 많은데 왜 쌀만 요구하느냐"고 질책하였다고 한다. (역사 속의 대구, 277쪽)

"쌀이 없으면 고기나 과일, 빵을 먹으면 되잖아요"

(9월 30일 시위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사상자 1명이 발생했다. 경찰은 그 시체가 행려병자였다고 변명했지만 이를 목격한 군중심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격분해 있었다. 사망자는 대팔연탄공장에 근무하는 20세 전후의 황팔용(또는 황말용)이라는 청년이었다. 10월 2일 아침이 되자 수십 명의 의대생들이 황팔용의 시체라며 사체를 들것에 싣고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 민중들은 경찰서를 포위하여 한동안은 점거했으며 인근 지방의 경찰서와 지서의 무기를 강탈하는 동시에 청사를 점령했다. 1일부터 3일에 걸친 충돌에서 경찰관 사망자 33명, 중경상자 135명, 경찰 가족 사망자 1명, 부상자 33명이 발생했으며, 영천군수와 대구운수경찰서 조사주임이 피살되었다. (신복룡, 523-524쪽)

사망자는 모두 136명(관리 63명, 일반인 73명), 부상자는 262명(관리 133명, 일반인 129명)이었다. 전소된 건물은 10동(관청 4, 일반 6), 파괴된 건물은 766동(관청 240, 일반 526)이었다. (정해구, 156쪽) 

1946년 10월 대구사태의 진원지였던 대구의전(현 경북대의대)허술한 방역 행정을 비판한 이상요 교수를 경찰이 구금한 것은 대구사태를 악화시킨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 정만진


해방 당시 대구의 인구는 10만 정도였다. 그런데 <대구시사>는 1만여 노동자와 학생들이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고 폭도화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했다. 전체 인구의 1/10이 폭도화되었다는 것이니, 아이들을 제외하면 폭동에 참가한 이들의 비율은 더욱 높을 것이다. 그렇게 기득권층에 저항했던 대구가 어느덧 보수정당의 텃밭 노릇을 하고 있는 현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신복룡은 말한다.

'대구사태는 당시 적기(赤旗)가 나부끼고, 노동해방의 구호를 외쳤다고 해서 그것이 공산혁명은 아니었다. (중략) 그것은 단지 굶주림과 압제에 대한 민중적 항쟁이었고, 남로당의 전술이 종속변수로 개입되었을 뿐이다. 대구사태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었던 민중적 소망에 대한 잔혹사였을 뿐이다.'

당연히 대구에는 1946년의 10월을 말해주는 역사유적이 전혀 없다. 아니, 이곳이 사건의 현장이라는 표식도 전혀 없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군가는 세세한 부분까지도 잘 알고 있겠지만, <10월 인민 항쟁 연구>의 정해구, <한국분단사연구>의 신복룡 등 전공 학자들은 지금도 그 진상과 성격을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반면, 정작 대구사람들은 그 누구도 기록을 남기는 일에 뛰어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대구, 4·19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의거를 일으켰던 대구, 1960년대 교원노조의 발상지이자 최고 조직률을 과시했던, 대구, 이승만 정권 때만 해도 '야도'임을 당당히 자랑했던 대구, 그러나 1946년의 10월에 대해서만은 한결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구, 과연 무엇 때문일까.

대구사람들은 1946년 10월을 잊고 싶다

대구 사람들은 10월을 잊고 싶다. 해마다 10월이 되어도 1946년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1946년 당시 '폭도'였던 본인 또는 그 아들딸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내심으로는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상당수 학자들이 공산혁명은 아니었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1946년의 10월 사건에 참여하였다는 이력이 드러나면 그 즉시 '빨갱이'로 몰릴까 봐 대구사람들은 끝없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구시사>가 그처럼 10월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자세하게 적다가는 필연적으로 사람 이름이 등장할 터인데 그렇게 하고도 과연 책이 발행될 수 있을까. <대구시사> 제1권 통사 1204쪽은 '10·1사건에 관하여서는 뒤에 별도의 항목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상술할 필요가 없'다면서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짧은 소개문만 기록하고 있지만, 1228쪽이나 되는 방대한 책을 '쥐 잡듯' 뒤져보아도 상술은 커녕 단 한 줄도 10월에 대해 언급이 없다. <대구시사>를 집필한 학자들은 상술할 계획을 세웠던 모양이나, 누군가가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강제한 듯하다. 그는 (또는 그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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