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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술을 팔 수 있게 해달라"?

[해외리포트] 조지아 주 '일요일 술 판매 허용' 법안 논란... 미국식 민주주의의 시험대

등록|2011.04.16 18:15 수정|2011.04.17 13:00

▲ 조지아 주에서 한인 김선홍씨가 경영하는 술 소매점 매장. ⓒ 고은아


내가 처음 미국에 와서 느꼈던 것은 '미국 사람들 참 보수적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11년을 넘게 이곳에서 산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여기 미국 사람들의 보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바로 지금, 21세기의 미국 조지아 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두 명의 주지사

2011년 3월 16일(현지 시각) 여러 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56명으로 구성된 주 상원을 32:22로 통과한 한 법안이 3월 22일(현지 시각)에는 15:1로 개별 위원회 투표를 통과했다. 그리고 지난 4월 12일(현지 시각) 마침내 180명으로 구성된 주 하원 투표(127:44)마저 통과해 주 의회의 최종 승인을 얻어냈다. 

지금까지 연속 5년째 계속, 투표까지 가지도 못하고 상정 단계에서 낙마했던 이 법안의 이름은 SB(Senate Bill) 10. 발기인은 공화당 소속의 존 블록 의원이다. 내용은 간단히 말해서 '일요일에도 술을 팔게 해 달라'는 것. 현행 조지아 주 법에 따르면, 일요일에 레스토랑이나 바 등에서는 술을 마실 수 있지만 슈퍼마켓이나 술 소매상에서는 술을 사고팔 수 없다.

5년째 표류 중이던 이 법안이 갑자기 급물살을 타게 된 계기는 지난해 말 선거에 승리하고 올해 1월에 취임한 네이튼 딜 주지사가 이 법안에 호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전임자 소니 퍼듀 주지사는 두 번에 걸친 재임기간 동안 이렇게 공언했었다.

"만약 이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서 내 책상까지 오게 되면 나는 반드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 5년간 이 법안은 계속 상정되긴 했지만 인준될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진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딜 주지사는 이 법안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일요일 술 판매를 반대하지만 이 이슈가 시민들의 선거로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겠다."

시민들의 선거. 그렇다. 지난해까지 이 문제를 '돈과 도덕성의 싸움'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강했던 언론이 우호적으로 변한 것도 올해 법안 지지자 측에서 '로컬 컨트롤'로 문제의 초점을 돌렸기 때문인 듯하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이 사안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막지 말고 궁극적으로 주민 투표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자는 주장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법안 발기인도 전임 주지사도 신임 주지사도 모두 공화당 소속이라는 것이다. 남북전쟁 패배 이후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온 조지아 주가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공화당 주로 바뀐 데는 기독교인이 많아 '바이블 벨트'로 알려진 이 지역 정서상 문화적,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많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아들 부시' 정권 당시 불거졌던 동성 결혼 문제라든지, 낙태 문제 등의 사회적 이슈를 거치면서 조지아 주는 급격하게 공화당화해 갔다. 그에 힘입어 2003년 취임한 전임 퍼듀 주지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공화당 소속으로는 1870년대 이후 130년 만에 처음으로 당선됐고, 딜 주지사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민주당의 목소리가 작은 곳에서 공화당 소속 정치인들끼리 한 가지 쟁점을 놓고 다투는 형국이다.

▲ 시사 풍자 작가 마이크 루코비치(Mike Luckovich)가 '일요일 술 판매 허용' 논란에 관해 AJC(2월 8일)에 게재한 만평. 마이크 루코비치는 AJC의 만평가로서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베테랑 작가이다. ⓒ Mike Luckovich


미국은 바른 생활 국가?

하루 24시간 거의 1년 365일 아무 때나 술을 살 수 있는 '술 권하는 사회'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뭐 이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가 다 있나 싶겠지만, 이게 미국이다. 내가 여기서 '조지아'라고 한정 짓지 않고 '미국'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애틀랜타로 이사 오기 전 매사추세츠 주의 소도시 피츠필드에 살 때의 일이다. 미국 온 지 4년이 다 돼 가던 해 여름, 친구가 남편과 딸아이를 대동하고 뉴욕을 거쳐 그 시골까지 찾아왔다. 친구네는 그 다음날 오후에 다시 보스턴을 향해 떠날 예정이어서 나와 친구는 모처럼 함께 보내게 될 하룻밤을 위해 저녁 식사 후 느지막이 슈퍼마켓으로 나갔다.

이 구경 저 구경 끝에 와인과 맥주를 포함해 계산하려는데 신분증을 달란다. 미국 온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금주가가 된 나는 술을 사 본 적이 없어서 깜빡 잊고 나왔고 친구도 사정은 마찬가지. 우리가 어딜 봐서 미성년으로 보이냐고 우겨 봤지만, 원칙은 원칙! 투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가 기분 나빠서 다른 데서 사자고 술 소매점을 찾았는데, 밤이 늦었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할 수 없이 다시 그 슈퍼마켓으로 돌아가서 아까 그 술들을 가져다 계산하려는데, 다시 또 안 된단다. 대체 이유가 뭐냐니까, 밤 11시가 지나서 술을 팔 수가 없다는 거였다. 시계를 보니, 11시 5분. 세상에, 밤 11시면 술을 한창 마실 시간인데 술을 안 판다니……. 할 말을 잃은 친구와 나는 그날 바람 빠진 요리용 청주로 아쉬움을 달랬고 다음날 종일 머리가 깨질 듯 아파 혼이 났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처럼 술은 일요일이 아닌 평일에도 여타 물품과 다른 별도의 판매 시간이 정해져 있다. 매사추세츠 주의 경우 일요일 술 판매가 허용은 되지만 정오 이전에는 살 수가 없다. 전면적인 일요일 술 판매 금지가 행해지는 주는 딱 세 곳(조지아, 코네티컷, 인디애나)뿐이지만 매사추세츠 주와 비슷하게 일요일엔 오후에만 팔 수 있도록 제한하는 곳은 제법 많이 있다. 그리고 술의 범주에서 비교적 도수가 약한 와인과 맥주 등 발효주와 알코올 농도 20도가 넘는 증류주를 구분해서 보자면, 아직도 14개 주에서 증류주의 일요일 판매가 금지되고 있는 상태다.

▲ 미국증류주협회 자료를 근거로 알코올 농도 20도 이상 증류주의 일요일 판매가 허용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에 대해 보도한 <USA투데이>. 파란색으로 표시된 36개 지역이 판매 가능 지역, 14개 회색 지역은 판매 불가 지역이다. ⓒ USA투데이


블루 로의 마지막 심판대

그러면 이렇게 뿌리 깊은 미국의 '술과 거리 두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역사를 살펴보자.    

미국에는 일명 블루 로(Blue Laws)라는 게 있다. 뉴욕주립대학교 사회학과의 데이비드 한슨(David J. Hanson)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 법은 기독교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에 물건 판매를 제한하기 위해 생겨났고, 그 시작이 1617년 영국 식민지 시절의 버지니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법으로 교회 참석을 강제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군인까지 동원했다. 초기의 블루 로들이 '일요일에 하지 말라'고 제한했던 것들로는 일하기, 여행, 여가활동, 요리, 면도, 머리 자르기, 레이스나 귀금속 착용, 빗자루로 쓸기, 침대 정리, 키스하기, 성행위 등 광범위한 일상생활이 다 그 대상이었다. 그러다 점차 기독교인 상인들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교회 출석을 강제하는 법은 사라졌지만 다른 많은 법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 이어졌다. 1920년에 발효돼 1933년까지 계속된 금주법은 블루 로가 극단적으로 확대 집행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한참이 지난 1985년까지도 텍사스에서는 일요일에 냄비나 프라이팬, 세탁기 등 각종 집안 집기들과 자동차 판매가 불법이었다.

▲ 슈퍼마켓 체인인 퍼블릭스의 맥주가 진열된 통로. ⓒ 고은아


21세기가 된 지금 마지막 남은 블루 로의 잔재가 조지아라는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한 축엔 막강한 자금력을 갖춘 대형 슈퍼마켓 체인, 편의점협의회, 주류협회가 버티고 있고 또 다른 한 축엔 풀뿌리 캠페인과 영향력으로 맞서는 기독교연합과 술 소매점 오너들이 포진해 있다.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는 유독 주류만 판매할 수 없는 게 불만이다. 어차피 여는 거, 술까지 팔면 매출이 늘어날 것은 당연지사. 주류협회 또한 주 6일보다 7일일 때 전체 판매량이 늘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연일 주 의회 의원들에게 밥을 사가면서 로비를 펼치고 있다. 미국증류주협회(Distilled Spirits Council of the United States)의 리사 호킨스씨는 <USA투데이>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블루 로를 고수하는 건 말이 안 돼요. 소비자들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각 주에서 추가로 걷을 수 있는 세금 수입을 빼앗는 것일 뿐이에요."

한편 '가족의 가치'를 기치로 내세운 기독교연합 측은 수백 년간 이어져온 전통을 깰 마음이 없다. 언뜻 찬성 쪽일 듯한 술 소매점 오너들의 경우는 주 6일 동안에 팔아 치울 물량을 7일로 나눠야 하는 게 못마땅한 것이다. 게다가 하루 더 가게 문을 열려면 휴일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 종업원 임금에다 가게 운영비까지 출혈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세가 법안 찬성 쪽으로 굳어지는 듯하자 조지아기독교연합의 제리 루콰이어 회장은 WSB 라디오와 한 인터뷰에서 전열을 가다듬듯 이렇게 말했다.

"이제 법안 통과를 저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의 싸움은 로컬 커뮤니티로 옮겨갈 것입니다."

애틀랜타 북서쪽의 캅 카운티에서 술 소매점을 경영하는 한인 김선홍씨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반대했다.

"대형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일요일에 술을 팔게 되면 저희도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겠죠. 그러다 결국엔 영세한 술 소매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게 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즈니스 관두고 대형마트 종업원으로 전락하겠죠."

한편 그의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이 법안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하나같이 찬성이었다. 반대로 슈퍼마켓 체인인 퍼블릭스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아예 이런 법안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애틀랜타 지역 대표 신문인 AJC(The Atlanta Journal-Constitution)의 칼럼니스트 제이 북맨이 인용한 여론조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 메트로 애틀랜타 지역에서는 조사 대상자의 3분의 2가 이 법안에 지지 의사를 표명한 데 반해 시골 지역인 조지아 남부에서는 역시 3분의 2가 반대했다.

▲ 김선홍씨는 일요일 술 판매가 대형 슈퍼마켓을 살찌우고 영세 술 소매점을 벼랑으로 내모는 일이 될 것이라며 법안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 고은아


▲ 슈퍼마켓 안에 와인이 진열된 모습. ⓒ 고은아


미국식 민주주의, 느림의 미학?

이제 주 의회의 승인을 얻은 이 법안은 7월 1일 주지사 서명을 받고 각 지방자치 단체의 주민선거에서 가부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셈이다. 최종 승부는 약 300개에 이르는 지방자치 구역에서 판가름 날 예정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예산 삭감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방 정부들이 선뜻 '일요일 술 판매'라는 단독 사안을 놓고 투표를 부치지는 않을 것 같다. 빠르면 오는 11월에 투표를 하는 곳도 나오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음 대통령 선거 때까지 투표를 미룰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당장 투표를 진행하려면 집행비가 들어가는데, 일요일 술 판매로 나중에 얼마나 수입이 늘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선(先)부담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전망이다.

내가 살고 있는 캅 카운티의 경우 현재 카운티 재정에 3100만 달러의 공백이 있는데, 이 단독 사안 때문에 투표를 할 경우 35만 달러의 추가 경비가 들어간다. 카운티 커미션 체어맨인 팀 리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공언해 놓은 상태다.

어번 대학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래밴드는 <USA투데이>에서 경제불황과 블루 로의 후퇴를 연결시켜 설명한 바 있다. 즉 세수가 줄어드는 불경기 때마다 세금 걷을 곳 찾기에 혈안이 된 정부가 블루 로를 하나둘씩 폐지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정치인들은 당장 눈앞의 지출 때문에 투표를 꺼리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여성들이 노동인력으로 대거 투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폐지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블루 로. 미국은 이 전근대적인 법률을 무너뜨리는 데 한 세기가 넘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더디게 진행되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 물건 종류별로 진열된 슈퍼마켓 안에서 10번 통로의 와인과 12번의 맥주가 눈에 띈다. 조지아 주에서는 슈퍼마켓에서 20도 이상의 증류주는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증류주를 사려면 술 소매점으로 가야 한다.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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