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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의사 칭호는 이제 그만 가라

등록|2011.04.17 10:10 수정|2011.04.17 10:10

진료실 복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순서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 최성규


먼 옛날엔 의사라는 직업이 없었다. 누가 다치거나 아프면, 경험있는 사람이 이런 저런 조언을 건네줬다.

"거기에 이 약초를 으깨서 발라봐. 나도 발라봤는데 나았다니까."

그런 경험과 지식이 쌓이고 쌓여 병만 전문적으로 보는 직업이 생겨났다.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치료가 가능해졌다. 그러다 사람은 사라지고 병만 남았다. 내가 환자가 되어 병원을 가면 몸으로 느낀다. 1시간 동안 기다렸는데, 정작 진료는 30초 정도. 심한 병만 아니라면 진료는 간단히. 의사와 환자. 환자라는 글자 중에 병을 가리키는 '환'(患)만 남았다. 사람인 '자'(者)는 어디 갔을까?

지인이  보건지소에서 일하면서 좋았던 것을 꼽아보라고 했다. 미뤘던 대답을 이제야 내놓는다. 환자를 환자로 대할 필요가 없다는 거. 환자를 환자로 대하지 않으면 나도 의사일 필요가 없다.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어깨에 침을 맞고 싶단다. 옷을 입고 있으면 어깨가 드러나지 않아서 특별한 아이템이 필요하다. 보건소 소장목록 1호인 '할머니 치마'를 건네드린다.

"이게 뭐요?"
"어머님 어깨에 침 맞으셔야 되잖아요. 자, 이거를 이렇게..."

시범을 보이려 내 머리에 뒤집어 쓰면서 치마를 어깨에 걸친다. 참지 못하고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어머님 웃음소리. 때론 직접 입혀드리기도 한다. 침을 맞다가 베개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생겼다. 주워서 올린다. 핸드폰이 울어댄다. 꺼내서 어머님 귓가에 대드린다.

"침 맞는다고 말하고 빨리 끊으셔야 돼요."

침만 놓는 게 전부가 아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할 수 있다. 하루는 고옥심 어머님이 오셨다. 평소에는 맡을 수 없었던 산뜻한 냄새가 머리에서 났다.

"어머님, 파마하셨어요?"
"아니. 목욕탕 갔다 왔는데."

보건소 오기 전에 몸 좀 따뜻하게 하려고 목욕탕을 들렀는데, 열이 확 올라와서 금방 나와버렸단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손등에 침을 놓았다. 침을 다 놓고 가려는데, 나를 부르신다.

"선생님. 나 목이 타네. 시원한 물 한잔 먹고 잡네."

온탕에 있으면서 몸에 열이 올라 물이 부족한 모양이다. 복도 끝에 있는 정수기에 가서 컵에 물을 받는다. 차가운 물을 받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차면 속에 탈이 날 듯 하다. 다시 뜨거운 물을 조금 넣는다. 물바가지 위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김유신에게 줬던 처녀가 된 기분이었다.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어머님이 움직일 수가 없다. 침을 꽂은 상태에서 움직이면, 침이 몸 안에서 휘어지면서 아프기 때문. 입가에 컵을 대드렸다. 벌컥벌컥 물 넘어가는 소리.

"아이고메 시원하다."

누가 봐도 정말 맛있게 들이키는 저 표정. 어떤 모델도 흉내낼 수 없을 자연스럽다. 입맛을 다시길래, 묻는다.

"한 잔 더 드릴까요?"
"더 먹고 잡네."

또 다시 복도를 가로지른다. 다시 입가에 컵을 대 드리자 벌컥벌컥 숨 넘어가듯 물 넘어가는 소리.

"히야.. 맛있네. 이런 심부름을 시키고 미안하요."
"아니, 괜찮습니다."

종이컵을 치우면서 배시시 웃어드렸다. 내가 물을 떠오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물을 떠 드렸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할머니가 되었다. 어느덧 환자와 의사는 사라지고, 한 할머니와 젊은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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