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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들이 저리 날뛸 줄 '아무도' 몰랐다

<쥬라기공원>과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등록|2011.04.22 18:51 수정|2011.04.22 18:51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는 과학의 불확실성

티라노사우루스(영화 "쥬라기공원"중에서)자동차를 공격하는 티라노사우루스 ⓒ 쥬라기공원


고목 둥치 같은 거대한 대퇴부 근육을 꿈틀거리며, 육중한 티라노사우르스가 숲 속에서 튀어나와, 진흙탕 속에 뒤집힌 승합차를 장난감처럼 이리 저리 굴린다. 차안에서는 주인공이 잔뜩 겁에 질려 비명을 질러대고, 공룡은 코끼리 상아 같은 하얀 이빨을 수시로 드러내며, 차에 갇힌 주인공을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대든다. 차는 날카로운 송곳니에 서서히 찢겼다.

티라노사우루스(영화 "쥬라기공원"중에서)티라노사우루스가 자동차 타이어를 물어뜯고 있다. ⓒ 쥬라기공원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 <쥬라기 공원>의 한 장면이다.

지금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괴상한 물질 방사능에, 경제대국이면서 과학대국인 일본정부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당연히 생전 처음 접하는 일본 국민은 방사능이란 괴물 앞에서 벌벌 떨고 있으며, 혹시나 자국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전지구가 노심초사 하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과 일본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비슷한 점이 많다. 먼저 최첨단 과학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쥬라기공원은 호박 속 공룡의 유전자를 찾아내 15종의 공룡을 복원, 거대한 인공 공룡 동물원을 만들었으며, 일본 원자력 발전소는 강제 핵분열을 일으켜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인공 물질을 만들어 에너지를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쥬라기공원의 공룡들이 통제력을 벗어나 공원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것은, 파충류는 환경에 따라 암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치 못해 발생했다. 즉 암공룡의 알을 인공부화로 공룡의 개체수를 조절했는데, 공룡들은 스스로 수놈이 암놈으로 변해 공원 한 귀퉁이에서 알을 품었던 것이다. 물론, 공원 관리소 직원도 모르게. 일본 원자력 발전소는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아무도 예상치 못한 거대한 쓰나미로 인해 발생했다.

쥬라기공원에서 진정 말하고 싶었던 카오스 이론

쥬리기공원을 보는 것과 읽는 것에는 많이 차이가 있다. 쥬라기공원을 보는 것, 즉 영화는 다양한 공룡들이 머나먼 과거, 즉 쥬라기 시대에서 환생한 것 같은 볼거리에 초점을 맞췄다면, 영화의 원작인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쥬라기 공원"의 이야기를 이끄는 씨줄은 카오스 이론이며, 그 끝의 날줄에 매달려 공룡들이 날뛰는 구조다.

그렇다면 쥬라기 공원의 씨줄, 즉 줄거리를 이끄는 카오스 이론이란 무엇인가. 이를 가장 쉽게 표현한 단어가 나비효과다. 북경에서 나비의 날갯짓이 워싱턴에서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기예보의 원리를 살펴보면 된다.

일기예보는 관측-분석-예측이란 단계를 거쳐 나온다. 현재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분석하여, 앞으로의 날씨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이다. 일기예보는, 어감에도 묻어있듯이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확실하다면 예보란 용어를 쓰지 않고, 확보란 말을 썼을 것이다. 일기예보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의 원인은 분석도 예보기술의 한계 탓도 아니다. 바로 관측의 한계에 있다.

예를 들어, 지구 수평 1m× 연직 1m 간격으로 완벽한 관측망을 구축하였다고 해도(현실적으로 불가능 하지만), 일기예보는 틀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1m의 입방체로 관측 망을 구성하였다고 해도,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나비의 날갯짓 등- 일들을 모두 관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cm 간격으로 관측망을 구축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즉, 과학은 완벽한 실험실(가설)에서만 진실이 존재하고, 자연계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마이클 크라이튼 원작 <쥬라기공원> ⓒ 허관


거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최첨단 유전공학과 전자공학을 동원하여 공룡 동물원을 구축하였어도, 하나의 사소한 오류로 인해 거대한 공룡 공원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고, 끝내는 공룡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는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이 사소한 오류로 쥬라기공원이 있는 섬 전체를 공룡들이 파괴하는 상황을 카오스 이론을 이용하여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북경에서 나비의 날갯짓을 관측하지 못하면, 워싱턴의 폭풍우를 예보하지 못하듯이. 사소한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여, 공룡 공원이 파괴되는 단계를.

그렇다면, 과학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 과학 문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다룬 "과학, 축복인가 재앙인가<박이문 저>" 책 표지 ⓒ


지구촌을 방사능 악몽 속으로 몰아넣은 일본 원자력사고는,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과학 기술 문명이 탄생하기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과학기술문명이 무서운 악몽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하고, 자신의 꼬리를 뜯어먹다 죽은 그리스 신화의 괴물, 우로보르스로 변신했다.
- <과학, 축복인가 재잉인가>

그렇다면 왜 과학을 하는가. 그것은 현재 인류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당면한 문제를 이보다 더 잘 풀 수 있는 도구는 없다.

이와 같은 과학의 딜레마를 일기예보를 통해 살펴보자. 국민들은 일기예보 못 믿겠다고 수시로 투덜대면서도, 아침 뉴스 말미의 일기예보를 매일 챙긴다. 기상청 일기예보보다 더 믿을 만한 정보가 있다면 국민들은 기상청에 불만도 없을 것이다. 안 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틀리든 맞든 기상청에서 발표하는 일기예보는 정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에 바쁜 아침 시간을 쪼개어 기상정보를 듣고, 틀리면 투덜대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수의 대중이 말로나 감성적으로는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매달려 있지만 실질적 행동에 있어서는 과학적 세계관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적 세계관이 그 밖의 세계관보다 효과적이며 따라서 그만큼 신뢰도가 큼을 입증하며, 오로지 과학적 세계관과 인식만이 진리의 범주에 속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 <과학, 축복인가 재잉인가>

과학을 대하는 태도의 전환 필요

과학기술을 떠난 현 인류는 나무 없는 원숭이와 같다. 인류에게서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분리할 수 없듯이, 과학과 인류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과학은 우리 곁을 떠날 수 없다. 과학의 불확실성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안고 살아야만 한다. 그렇기에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지식을 절대적인 진리라 믿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지식의 테두리에 앉아 소통을 꺼리는 것은 진정한 과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자신의 연구행위가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분야가 나누어지고 전문화된다. 과학자의 시야는 좁아지고, 사고는 한 곳으로 깊어진다. 하지만 그 이론이 적용되는 현실, 즉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모든 학문의 집합체다. 다시 말해서 혼돈, 즉 카오스 이론이야말로 자연의 모습에 가장 접근한 이론일 것이다.

그래서, 하버드대 생물학과 석좌교수였으며, 퓰리처상 2회 수상에 빛나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 지성인으로 추앙받는 에드워드 윌슨은 인생의 황혼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종교와 과학의 악수를 제안했는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학문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학문의 대통합을 이루어야 함을 역설하는 책이다. ⓒ


그렇다면 결국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 객관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은 그 개념 자체가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절대주의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중략). 포기할 준비를 해야 되는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 에드워드 윌슨 <통섭>중에서

진리가 코끼리라면, 과학자는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과 마찬가지다. 귀를 만져 본 장님은 코끼리가 부채와 비슷하겠고, 다리를 만져본 장님은 절구와, 등을 만져본 장님은 침상과 같았을 것이고, 마지막으로 꼬리를 만져 본 장님은 새끼줄과 같다고 느낄 것이다. 장님들이 관찰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관찰한 코끼리의 모습은 그들이 서 있던 위치에 따라 달랐으며, 진정한 코끼리의 모습과도 사뭇 멀다.

지금 일본원전사고 때문에 지구촌 관심사로 부각한 원자력산업 발전의 일등 공신이며, 노벨상을 2개나 받은 유명한 과학자인 퀴리 부인이 죽은 이유가, 그가 처음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방사선 때문이었다. 방사선 물질은 스스로 빛이 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기해  했고, 퀴리 부인은 방사선 물질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당연히 방사선에 노출된 퀴리부인은 암에 걸려 죽었다.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처럼 방사선 물질의 한 면만 본 것이다.

퀴리부인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에 죽은 퀴리부인 ⓒ


과학도 유기체처럼 자라고 진화한다. 어디까지 자라날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자랄 것이다. 당연히 지금도 신기하다고 하여 방사선 물질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과 비슷한 행태를 하는 과학자가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과학 없는 인류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원자력, 유전공학처럼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생활이 편리해지면 질수록, 위험은 증폭된다. 이 위험성을 줄이기 위한 최선책은 코끼리의 부분을 만진 장님들이 모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아 코끼리를 그려야 한다. 시야를 멀리보고 서로 살펴야 하는 이유다. 에드워드 윌슨이 주장한 것처럼 통섭의 과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꼬리를 뜯어먹다 죽은 우로보르스로 변해 인류는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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