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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5)

기다리는 마음

등록|2011.04.30 18:03 수정|2011.04.30 18:03
엄마가 월급을 받는 날은 우리 가족이 모두 밖에 나가 자장면을 먹는 날입니다. 그런 날은 오빠도 언니도 나도 빨리 저녁 시간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이라 날이 일찍 저물지만 시간은 왜 그렇게 더디게 가는 지 해 꼬리가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엄마가 오려면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우리 삼 남매는 조금 일찍 큰길로 나가서 엄마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전차가 지붕 위에 길다란 사다리처럼 전선에 연결된 채 반짝 반짝 빛을 내며 느리게 들어와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선로를 따라 천천히 사라집니다.

전차가 들어올 때마다  '땡땡땡' 종치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종소리는 금새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오빠와 언니는 "감자가 싻이 나서 묵 찌 빠!"를 하며 지루한 시간을 때웁니다. 그리고 몇 번 째 전차에 엄마가 탔을까 알아맞히는 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오빠는 엄마가 몇 번 째 전차에 탔을 것 같아?"
"음... 다섯 번째!"

첫 번째 전차가 지나가고 두 번째 전차가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이제 날은 어둑해지고 조금씩 추위가 몸 안으로 오소소하게 파고 듭니다.

"오빠는 뭐 먹을거야?"
"군만두랑 짬뽕!"
"난 자장면."

세 번 째 전차가 들어옵니다. 언니가 눈을 반짝하며 전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앞으로 달려가지만 언니의 예상은 틀렸습니다.

"틀렸지" 이리와."

오빠가 언니의 팔목을 잡아끌어 손가락 두 개를 겹쳐 내리칩니다.

"앗야! 치이..."

언니는 손목을 맞은 것 보다 엄마가 늦게 오는 게 더 속이 상한 모양입니다. 나는 오줌이 마려웠지만 계속 참고 있었습니다.

"오빠 오줌..."
"가현아 학현이 오줌 좀 누이고 와라."
"오빠가 해!"

언니는 많이 토라져 있었습니다. 오빠가 내 손을 잡아끌어 길 옆으로 가 바지를 내려 줍니다. 그런 사이에 전차는 또 한 대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다섯 번 째 전차가 들어왔지만 엄마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빠와 언니는 말이 없습니다. 추위 때문인지 나는 자꾸 오줌이 마려웠지만 참기로 했습니다.

참을 때까지 오줌을 참다가 참지 못할 만큼 됐을 때 나는 혼자 길 옆으로 가서 바지를 내렸지만 내복 위에 겹쳐 입은 바지가 잘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오줌이 바지를 적시고 척척해지자 나는 어정거리는 걸음으로 오빠 옆으로 갔습니다.

"학현이 너 왜 그래?"

오빠가 묻자 언니가 뽀루통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오빠 얘 오줌 쌌어."

언니가 내 머리를 손으로 쥐어 박았습니다.

"으앙-"

난 울음을 터뜨렸고 언니도 거의 울상이 되었습니다.

"안되겠다. 집에 가자. 학현이 감기 걸리겠다."

우리는 모두 패전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큰길을 벗어나 좁을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입 집 아저씨가 시장에 내다 팔 먹을거리 재료를 잔뜩 마루에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킁킁 땡깡쟁이 어디 갔다 오니?"

주인 집 아저씨는 술만 먹으면 나한테 '땡깡쟁이'이라고 부릅니다. 언니가 나 대신 대답을 합니다.

"엄마 기다리러 큰길에 갔다 와요"
"큰일 났다. 땡깡쟁이 때문에 엄마 도망갔다! 킁킁 학현이 네가 매일 땡강을 부려서 엄마 도망갔다. 이제 큰일 났다."

주인 집 아저씨가 우리 삼 남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렇게 놀려댑니다. 난 갑자기 겁이 덜컥 났습니다.

언젠가 엄마한테 떼를 쓸 때 "자꾸 조르면 엄마 도망간다."하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 방을 보니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이어서 방문이 열리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늬들 어디 갔다 이제 오니? 빨리 들어와서 밥 먹어라."

엄마하고 우리의 길이 어긋났나 봅니다. 엄마는 우리가 전차를 기다리는 사이 청량리 시장에 들러 닭 내장을 사와 맛있는 내장탕을 끓여놓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가 본 적이 있는 청량리 시장에 아줌마들이 쟁반 가득 닭 내장을 얹어놓고 팔던 생각이 났습니다.

돈을 조금만 줘도 밥그릇 하나 가득 주기 때문에 엄마는 가끔 닭내장을 사와 내장 속에 있는 것들을 손으로 훑어내고 전에도 닭 내장을 끓여 준 적이 있었습니다.

언니는 내장탕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자장면 생각을 하면 억울한 지 입을 삐죽거립니다.

"치 오늘은 자장면 먹는 날인데."
"다음에 먹자."

아마 월급을 못 받은 것일까요. 엄마는 월급날 자장면 먹는 약속을 꼭 지켰는데 그 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주인집 아저씨 말처럼 엄마가 도망 갔을까봐 걱정을 했는데 엄마가 먼저 집에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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