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이렇게까지 해서 드셔야겠어요?
계곡 따라 이어진 검은 선의 정체... 고로쇠 수액 호스
▲ 고로쇠 호스정상을 코앞에 두고 검은 선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고로쇠 수액을 받기 위해 길고 긴 선을 이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에 감탄할 뿐입니다. ⓒ 황주찬
▲ 검은 선정체 모를 검은 선이 계곡을 따라 정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 황주찬
"아빠, 이 줄 만지면 전기 통해요?" "그래, 전기 통하니까 만지면 안 된다."
백운산 등산로 초입에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의 검은 선이 계곡을 따라 정상으로 끝없이 뻗어 있습니다. 산에 오르며 그 선을 무심코 흘려 봤는데 아이들은 검은 선이 낯설고 신기합니다.
지난 23일 늦은 아침을 챙겨먹고 백운산으로 향했습니다. 조계산 다녀온 후 매일 아침이면 두 아들이 들이대는 지도책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산은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높이가 1200m 이상입니다. 차를 몰고 옥룡계곡 끝까지 달렸습니다. 차에서 내려 산을 보니 절반 이상은 오른 듯합니다. 산이 높다 한들 이 정도면 오를 만하다는 생각에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아름다운 계곡을 사진에 담으려 하면 어김없이 그곳에 버티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피해가며 사진을 찍으려 해도 한 두 가닥이 아니라 곤란합니다. 결국 풍경 담는 일은 포기하고 정체모를 선을 유심히 관찰하며 산행에 집중하기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정상과 신선대로 나뉘는 갈림길에 빨간 통이 보입니다. 검은 선은 빨간 통 안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그리고 저는 빨간 통 부근에서 검은 선의 정체를 알게 됐습니다.
그 선은 공사를 위한 전선이 아니었습니다. 등산로 초입부터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오며 아름다운 풍경을 망쳐놓던 검은 선은 고로쇠 수액을 받기 위해 설치한 선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안 순간 허탈한 마음에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꼭 이렇게 까지 해서 고로쇠 수액을 받아 마셔야 할까?
정상 향하는 마지막 길, 차라리 일천배가 낫다
▲ 정상너무 아름다운 풍경에 눈을 가린 걸까요? 칼바람에 눈을 가렸습니다. ⓒ 황주찬
▲ 계단차라리 일천배가 낫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 황주찬
백운산은 여수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주변의 지인들이 이미 정상을 찾은 곳입니다. 그러나 왠지 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이번이 초행길입니다. 하여 이번 참에 두 아들과 멋있게 정상을 밟아 보고자 못이기는 척 길을 나섰습니다.
백운산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등산로를 자세히 알아보려고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산행을 극구 말립니다. 정상을 향하는 마지막 길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곳이랍니다. 차라리 일천 배가 더 쉽답니다. 그런 곳에 두 아들과 함께 오르는 일은 눈물을 머금는 일이 될 거라며 애당초 말리지 않았다고 애꿎은 사람 원망 말고 깨끗이 포기하랍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더 오기가 생깁니다.
조계산도 함께 넘은 실력이라 코웃음 치며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정상을 코앞에 두고 친구가 극구 말렸던 심정을 깨달았습니다. 경사가 절벽에 가깝습니다. 두 녀석도 정상을 앞에 두고 그만 오르겠다고 합니다.
결국 두 녀석을 양손에 끌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높은 산에 오를 땐 어떻게든 두 녀석은 떼놓고 와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결심을 더욱 굳히게 만든 일은 두 녀석의 얄미운 행동 때문입니다.
"니들은 노래가 나오냐? 나는 죽을 맛이다"
▲ 지리산저 멀리 지리산이 보입니다. 날씨만 좋았더라면... ⓒ 황주찬
▲ 옹달샘깊은 산속 옹달샘이라는 말이 딱 들어 맞습니다. 사람들 발길 끊긴 곳에 새 생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 황주찬
두 녀석은 힘들다며 아빠 손을 구원의 밧줄인양 요청하더니 덥석 손을 잡아 이끌자 몇 걸음 떼지도 않아서 함께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 니들은 노래가 나오냐? 나는 죽을 맛이다."
그렇게 정상을 향했습니다. 산 아래는 봄꽃이 지는데 정상 부근은 아직 쌀쌀합니다. 바람은 거세고 기온은 벗었던 겉옷도 한껏 여미게 만듭니다. 바람결에 눈송이도 맞은 듯합니다. 저와 두 아들은 기다시피 올라 힘겹게 정상에 발을 딛고 아래를 내려다 봤습니다. 그리고 와! 함성을 질렀습니다.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칼바람에 오래 서 있지 못했지만 꼬맹이들 눈에도 그 광경은 틀림없이 색다른 경험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정상에 잠시 머물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 불어오는 바람에 황급히 내려왔습니다.
산을 내려가기 전 정상부근에서 마지막 남은 김밥으로 배를 채운 뒤 가파른 길을 또다시 내려갔습니다. 도중에 오르면서 보지 못했던 작은 옹달샘도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 발길이 머물지 않는 그곳에 또 다른 생명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휘감긴 백운산을 보다
▲ 빨간 통빨간 통과 검은 선이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 조용히 있습니다만 그때가 오면 요긴한 물건들입니다. ⓒ 황주찬
▲ 수액 받는 통검은 선을 따라 흘러 내린 고로쇠 수액은 마지막 이곳에 모입니다. 이후, 건강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겠지요. ⓒ 황주찬
가파른 산길을 내려와 시원한 물소리가 가까워지자 또다시 검은 선이 보입니다. 산을 오르는 길에 빨간 통 옆에서 제가 사진 찍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본 큰 애가 재차 묻습니다.
"아빠 이 선 전깃줄 맞아요?"
더 이상 전선이라고 속일 수 없어 사실을 이야기 했더니 그 후, 쏟아지는 두 녀석의 질문에 한참을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질문에 답변이라고 내놓은 말들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왜 사람들은 세상에 더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하필 나무를 찔러서 나온 물을 마실까요? 건강 때문일까요?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도 고로쇠 수액 마시러 간다고 할 때 몇 차례 마지못해 따라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투명한 액체를 마셨는데 그때 마신 물이 이렇게 채취될 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번 산행을 통해 두 아들에게 배웠습니다. 인생길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천지 널려 있는 맛있는 음식 다 맛보기도 빠듯합니다.
그런데 굳이 나무에 구멍 뚫고 받은 수액을 몸에 좋다며 먹어 본들 건강에 득 될 것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고로쇠 수액 마시려면 그 시간에 두 녀석 데리고 산에 한 번 더 다녀오렵니다.
그나저나 정상을 향해 한없이 뻗어 가던 그 검은 선은 어디가 끝일까요? 정상과 신선대로 나뉘는 곳에서 제가 택한 정상 길에는 검은 선이 멈췄는데 신선대쪽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와 두 아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탐욕의 선으로 휘감겨 있는 백운산을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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