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가끔 일요일에도 엄마는 늦게까지 일을 했습니다. 엄마를 기다리는 게 지루할 때면 나는 괜히 이방 저 방을 기웃거립니다. 특히 양복이네 방을 들여다 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 방에서는 영자의 고운 분 냄새가 배어 나왔고, 예쁜 꽃무늬 수가 놓인 흰천으로 살짝 덮어서 화장대로 쓰고 있는 사과 궤짝 한 옆에 세워 둔 꼬마 신랑, 신부의 목각 인형도 내가 만져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날은 영자도 양복이도 어쩐 일인지 한가하게 방안에서 뒹굴면서 잡지를 보느라고 내가 들어가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책 속에는 거의 벌거벗은 여자가 한 껏 폼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야 죽인다 죽여!"
"어머머 이 여자 좀 봐!"
"이 여자한테 비하면 넌 탱자 씨알만 하다 그치?"
"그래서? 그래서?"
엎치락뒤치락 시시덕 거리던 양복이와 영자는 그때서야 날 발견하고는 얼른 책을 치우며 '얘는 언제 들어왔냐?'는 표정을 짓습니다.
"하여튼 어디서 이상한 책만 들고 들어 온다니까."
"우리 심심한데 영화나 보러 갈까?"
"요즘 빨간 마후라 안 본 사람이 없대. 그거 보러가자 응? 우리, 학현이도 데리고 갈까?"
영자 언니의 말에 내 귀는 쫑긋해지고 마음은 벌써 흥분이 되어 '안 데리고 가면 어쩌나'하는 걱정까지 앞섰습니다.
"학현이는 돈 안 받겠지? 데리고 가지 뭐..."
양복이가 마지 못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영자는 벌써 무릎걸음으로 화장대 앞으로 가서 얼굴에 분칠을 하고 내 입술에 빨간 연지를 발라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숱이 별로 없는 내 짧은 머리카락을 한 줌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려 작은 분수 모양으로 묶고 요리조리 훑어보며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준비 끝! 이제 영화 보러가용!"
이미 양복을 꺼내 입고 마당에 서 있는 양복이 옆으로 영자가 내 손을 잡고 팔랑거리는 나비 모양으로 붙어 섰습니다.
나는 극장에 따라 갈 흥분으로 오빠나 언니한테 내 출타를 알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극장 안에는 영화가 시작되려는지 불이 꺼여 있었고 처음 보는 대형 화면에는 청량리 시내에 있는 '라라사진관'의 간판과 함께 간지러우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성우의 목소리가 극장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어둡고 가파른 계단을 주춤거리며 내려가 앞 부분의 좌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화면이 너무 커서 멀미가 날 듯 어지러웠습니다. 남녀 배우의 포옹장면이 나오면 쑥스러워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나는 잠이 든 척 했습니다.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하늘에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영화 속 남자들은 군복차림에 모두 빨간마후라를 둘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환하게 켜지자 사람들이 웅성웅성 일어섰습니다.
영자는 영화의 내용에 감동한 것인지 남자 배우의 멋진 모습에 반한 것인지 분간하긴 어렵지만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영화 잘 만들었다 그치? 최무룡 진짜 잘 생겼다 그치?"
양복이는 들어갈 때와 달리 극장을 나설 때는 남자 배우가 영화 속애서 그랬던 것처럼 양복 윗도리를 어깨에 걸치고 잔득 멋을 부린 폼으로 영자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영자의 손은 내 손을 잡고 천천히 청량리 시장 골목을 따라 집으로 향했습니다. 봄이 오려는지 바람이 그다지 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 귀에는 빨간 마후라의 노래 소리가 맴돌았습니다.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집에 돌아 온 엄마는 내가 없어졌다며 동생을 잘 보살피지 못한 오빠와 언니를 나무라며 나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사정을 알게 된 언니는 극장에 따라가지못한 것도 억울한데 엄마한테 꾸중까지 들어 얼굴이 잔뜩 부어 있었고 오빠는 시무룩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날 엄마는 늦었지만 서둘러 가족사진을 찍을 계획이었던 모양입니다. 영자는 자기 때문에 이런 소동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지 엄마한테 영화가 얼마나 재미 있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아줌마도 꼭 보세요"란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더니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분홍색 땡땡이 무늬의 손수건을 가지고 나와서 "빨간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사진 찍으면 더 멋있을 거야"하면서 내 목에 감아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엄마의 표정은 부드러워졌고 우리는 그날 사진관에 가서 가족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한복 한 가운데 브로치를 달고 두 손을 얌전히 포개고 앉은 엄마와 그 옆에 분수 모양의 머리와 빨간 마후라를 두른 나와 단발머리와 통통한 볼을 가진 언니 그리고 버짐이 번진 얼굴에 입을 꼭 다물고 어쩐지 쑥스러운 표정의 오빠가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이후 처음 찍은 그때 가족 사진 속의 엄마는 단정하고 젊어 보였습니다.
그 방에서는 영자의 고운 분 냄새가 배어 나왔고, 예쁜 꽃무늬 수가 놓인 흰천으로 살짝 덮어서 화장대로 쓰고 있는 사과 궤짝 한 옆에 세워 둔 꼬마 신랑, 신부의 목각 인형도 내가 만져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야 죽인다 죽여!"
"어머머 이 여자 좀 봐!"
"이 여자한테 비하면 넌 탱자 씨알만 하다 그치?"
"그래서? 그래서?"
엎치락뒤치락 시시덕 거리던 양복이와 영자는 그때서야 날 발견하고는 얼른 책을 치우며 '얘는 언제 들어왔냐?'는 표정을 짓습니다.
"하여튼 어디서 이상한 책만 들고 들어 온다니까."
"우리 심심한데 영화나 보러 갈까?"
"요즘 빨간 마후라 안 본 사람이 없대. 그거 보러가자 응? 우리, 학현이도 데리고 갈까?"
영자 언니의 말에 내 귀는 쫑긋해지고 마음은 벌써 흥분이 되어 '안 데리고 가면 어쩌나'하는 걱정까지 앞섰습니다.
"학현이는 돈 안 받겠지? 데리고 가지 뭐..."
양복이가 마지 못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영자는 벌써 무릎걸음으로 화장대 앞으로 가서 얼굴에 분칠을 하고 내 입술에 빨간 연지를 발라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숱이 별로 없는 내 짧은 머리카락을 한 줌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려 작은 분수 모양으로 묶고 요리조리 훑어보며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준비 끝! 이제 영화 보러가용!"
이미 양복을 꺼내 입고 마당에 서 있는 양복이 옆으로 영자가 내 손을 잡고 팔랑거리는 나비 모양으로 붙어 섰습니다.
▲ 학현이와 바둑이 ⓒ 장다혜
나는 극장에 따라 갈 흥분으로 오빠나 언니한테 내 출타를 알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극장 안에는 영화가 시작되려는지 불이 꺼여 있었고 처음 보는 대형 화면에는 청량리 시내에 있는 '라라사진관'의 간판과 함께 간지러우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성우의 목소리가 극장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어둡고 가파른 계단을 주춤거리며 내려가 앞 부분의 좌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화면이 너무 커서 멀미가 날 듯 어지러웠습니다. 남녀 배우의 포옹장면이 나오면 쑥스러워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나는 잠이 든 척 했습니다.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하늘에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영화 속 남자들은 군복차림에 모두 빨간마후라를 둘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환하게 켜지자 사람들이 웅성웅성 일어섰습니다.
영자는 영화의 내용에 감동한 것인지 남자 배우의 멋진 모습에 반한 것인지 분간하긴 어렵지만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영화 잘 만들었다 그치? 최무룡 진짜 잘 생겼다 그치?"
양복이는 들어갈 때와 달리 극장을 나설 때는 남자 배우가 영화 속애서 그랬던 것처럼 양복 윗도리를 어깨에 걸치고 잔득 멋을 부린 폼으로 영자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영자의 손은 내 손을 잡고 천천히 청량리 시장 골목을 따라 집으로 향했습니다. 봄이 오려는지 바람이 그다지 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 귀에는 빨간 마후라의 노래 소리가 맴돌았습니다.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집에 돌아 온 엄마는 내가 없어졌다며 동생을 잘 보살피지 못한 오빠와 언니를 나무라며 나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사정을 알게 된 언니는 극장에 따라가지못한 것도 억울한데 엄마한테 꾸중까지 들어 얼굴이 잔뜩 부어 있었고 오빠는 시무룩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날 엄마는 늦었지만 서둘러 가족사진을 찍을 계획이었던 모양입니다. 영자는 자기 때문에 이런 소동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지 엄마한테 영화가 얼마나 재미 있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아줌마도 꼭 보세요"란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더니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분홍색 땡땡이 무늬의 손수건을 가지고 나와서 "빨간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사진 찍으면 더 멋있을 거야"하면서 내 목에 감아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엄마의 표정은 부드러워졌고 우리는 그날 사진관에 가서 가족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한복 한 가운데 브로치를 달고 두 손을 얌전히 포개고 앉은 엄마와 그 옆에 분수 모양의 머리와 빨간 마후라를 두른 나와 단발머리와 통통한 볼을 가진 언니 그리고 버짐이 번진 얼굴에 입을 꼭 다물고 어쩐지 쑥스러운 표정의 오빠가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이후 처음 찍은 그때 가족 사진 속의 엄마는 단정하고 젊어 보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