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서평]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고
▲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의 첫 작품 ⓒ 서재호
그도 그 시절 숫자로 불렸다. '174517'. 174517의 원래 이름은 프리모 레비였다. 이탈리아 토리노란 지방 출신으로 24살의 젊고 건강한 청년이었다. 적어도 1944년 1월 독일 SS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까지 그는 프리모 레비일 수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2차세계 대전이 한참 막바지일때 다른 많은 유럽의 유대인들처럼 어느날 나치에 의해 끌려갔다. 그가 촉망받는 화학자라는 경력도 그의 수용소 행을 막아주진 못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강제노동과 가스실이 있는 그 아우슈비치로 던져진 것이다.
이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유대인 청년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번호 '174517'로 살아낸 1년여의 기록이다.
그 시절 6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프리모 레비는 그 극소수의 생존자 중에서도 그 당시를 기록으로 증언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오직 생생하게 증언하는 것만이 그가 살아남은 이유이고 계속 살아가는 동력이라도 되는것처럼 기록하고 또 기록해 나갔다. 당시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고통이었을 텐데도 그는 피하지 않고 글로써 또박또박 옮겨 놓고 있다.
마치 1944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집요하게 묘사했다. 강제노역하고 병에 걸리고 구타당하고 짐승같은 음식을 먹는 그 현장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형편없는 옷과 신발만으로 혹독한 겨울을 나며 버텨내었다. 겨우 죽만 먹으면서도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을 견뎌내었다. 주변의 동료가 가스실에 끌려갈 때도 운좋게 빠질 수 있었고 일상적인 독일군의 폭행과 구타에도 요행히 살아남았다.
제대로 된 목욕도, 잠자리도, 치료도 없었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생존해낸 것이었다. 한마디 더 보탠다면 그는 단지 살아남은 것뿐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었다.
"여기엔 이유 같은 건 없어"
그의 책에 보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는 초기의 이야기부터 묘사된다. 본격적인 강제 노동에 앞서 그들 일행은 이름을 부여 받는다.
"왼쪽 팔뚝에 문신을 새겼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는 문신 174517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 숫자의 의미는 이름이다.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배급받았다."
이책에는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해선 안되는 단어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내일' 이라는 말과 '이유'라는 단어였다. '내일'도 빵과 죽을 먹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고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이 이곳에서 살아갈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독일인 감시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가슴을 찌른다. "여기에 이유 같은 건 없어."
그곳에선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평상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여기서는 문제가 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손톱이 길면 잘라야 하는데, 이빨로 자를 수밖에 없다. (발톱의 경우 신발과의 마찰만으로 충분하다). 단추가 떨어지면 철사로 그것을 다시 달 줄 알아야 한다.
변소나 샤워실에 갈 때에는, 자기 물건을 모두 가지고 가야 한다.언제 어디서든 마찬가지다. 세수할 때는 옷 보따리를 두 무릎 사이에 '끼워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보따리를 도둑 맞을 수 있었다.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아프면 저녁에 신발을 바꿔 신는 의식에 참가해야 한다. 이런 대목에서 개인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한 번에 자기 발에 맞는 신발 한 짝을 (한 켤레가 아니다. 한 짝이다) 골라야 한다. 한 번 고르고 나면 더 이상 교환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용소 생활에서 신발이 대수롭지 않은 요소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된다. 신발이 우리 대부분에게 고문도구라는 게 드러났다. 그것을 신고 몇 시간 행군을 하고 나면 발이 끔찍하게 짓무르고 치명적으로 감염된다. 그렇게 되면 다리에 쇠사슬을 매단 죄인처럼 걸을 수밖에 없다.
발이 감염된 사람은 어디든 제일 늦게 도착하게 되고, 그러면 사정없이 얻어 맞았다. 누군가 뒤쫒아 온다 해도 달아날 수도 없다. 발이 부어오른다.
더 많이 부을수록 신발의 나무나 헝겊과의 마찰을 더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병원밖에 없다. 하지만 '부은발' 진단서를 가지고 병원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 병이 여기서는 치료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그리고 특히 ss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달리면서 오줌누기
수용소에 오기 전에 어떤 직업이었던가는 중요치 않다. 의사였건 교수였건 아니면 랍비였건 부랑자였건, 먹고 자고 싸고 뛰어야 하는 건 똑같았다.
"기상시간이다. 온 막사가 떠나갈 듯 흔들리고 , 불이 켜지고 그들은 이불을 털고 악취나는 먼지구름을 일으키고 누구에게 질세라 급히 옷을 입고 옷을 채 다 걸치기도 전에 얼음같이 찬 공기 속으로 달려나가서 변소와 세면장으로 들이닥친다.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시간을 벌 목적으로 짐승처럼 달리면서 오줌을 눈다. 5분 후에 빵이 배급되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노동의 시간이 끝나고 겨우 몸을 뉘는 잠자리도 편안할 리는 없다.
"난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 늘 같은 사람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기상 시간에 잠시 본 것을 제외하고는 정면으로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보다는 등과 발을 훨씬 더 잘 안다. 그는 나와 다른 코만도에서 일하고 소등시간에야 침대로 들어온다.
그는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뼈만 남은 엉덩이로 나를 밀어낸 뒤 내게 등을 돌리고 코를 골기 시작한다. 등과 등을 마주 댄 채 나는 짚북데기 매트리스 위에서 적당한 면적을 차지해 보려고 애를 쓴다. 내 등으로 서서히 그의 등을 누르다가 다시 돌아누워 무릎으로 그를 밀어본다.
그의 발목을 잡아 그의 발이 내 얼굴에 닿지 않도록 멀리 치워놓으려 한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나보다 훨씬 무거운 데다 잠에 빠져 돌덩이처럼 꿈쩍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옴찍달싹하지 못하는 상태로 나무가 드러난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반쯤 걸친 채 눕는데 익숙해지기로 한다. 나 역시 금세 곯아 떨어진다. 마치 철로 위에서 잠드는 것 같다."
지옥같은 노동이 잠시 면제될 때가 있다. 몸이 아파 병동에 들어가게 될 때이다. 이때에도 얼마나 '적당하게 아픈가'는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심한 노동을 더 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파야 되지만 가스실에 끌려갈 정도로 많이 아파서도 안 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노력이 따른다.
"병동에서 꽤 심각한 설사환자가 적어도 50여명은 된다. 그 사람들은 사흘에 한 번씩 확인을 받는다. 복도에 길게 줄을 선다. 줄의 끝에는 두 개의 양철 대야가 있고 기록부와 시계, 연필을 든 간호사가 서 있다.
환자들은 한 번에 두 명씩 나와서 그들의 설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즉석에서 증명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데 그들에게 허용된 시간은 정확히 1분이다. 간호사에게 결과물을 제출하면 간호사는 그것을 보고 판단한다. 그들이 근처 세척통에 재빨리 대야를 씻으면 다음 두명이 그 뒤를 잇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책 제목 <이것이 인간인가>는 내게 두 가지 뜻으로 읽힌다. 하나는 '어찌 이것을 인간이라 하겠는가'라는 의미가 될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런 것이 인간의 본모습인가'라는 뜻으로도 읽게 된다. 저자는 어떤 뜻으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두 가지 모두 가능한 독법이란 느낌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처음 그들을 태워갔던 열차에 탔던 대부분의 동료가 수용소에서 죽었다. 독일이 패망한 후 소련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해방되었지만 그때의 생존자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동과정에서 또 대부분 사망했다.
극적으로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았고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그의 왼손 손목에 새겨진 숫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기록해내는 게 자신의 숙명이라 믿었기에 끊임없이 쓰고 증언하며 아우슈비츠를 잊어나갔다.
비로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진상에 대해 주목하고 공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비상한 기억력과 용기를 칭송했고 그의 외로운 싸움에 공감해 나갔다. 그의 신산한 일생에 위로의 마음도 전했다. 그는 안도해 했고 감사해 했다. 이제야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그가 1987년 돌연 자살한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자택에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그는 강한 의지의 전형과 같았던 사람이지 않았는가. 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건강하게 승화시켜온 사람이었지 않은가.
사람들은 그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그의 갑작스런 자살이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떠나가 버렸다. 그의 자살에 대한 많은 추측을 남긴 채... 결국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본인만이 아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 단지 그의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나대로 짐작할 뿐이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이름과 나란히 이렇게 적혀 있다 한다.
'174517'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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