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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이 땅의 모든 산길

사천시 봉명산에서 이명산(물고뱅이 들레길)

등록|2011.05.02 15:48 수정|2011.05.02 15:48
봄이 오면 꽃 피고 꽃 지면 푸른 잎 돋는 이 놀라운 질서를 해마다 보고 해마다 감동한다. 신록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산을 찾는 것이라 믿고 가까운 봉명산에 가기로 했다.

지리산에 둘레길이 생긴 후로 이 나라 모든 산에 둘레길이 생기고, 마침내 봉명산과 이명산에도 물고뱅이 둘레길이 생겼다. 좋지 않게 표현하여 냄비근성이라 폄하하지만 이런 현상은 아마도 우리 민족의 열정적 모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끓어오르는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산 입구부터 신록은 나를 감동하게 한다. 지난겨울 그 추운 날씨에도 가지 속에 저 잎을 위한 싹들을 지켜내서 마침내 이렇게 환한 푸름을 나에게 보여주는 저 나무들은  말 없는 나의 스승이다. 봉명산 군립공원이라는 팻말에서 보듯이 이 땅위에 쓸 만한 곳은 죄다 국립이니 도립, 시립, 군립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다. 뒤집어 보면 그 말이 없이는 보호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치 주의적 발상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봉명산 입구봉명산 입구 사진 ⓒ 김준식


올라가는 처음 약간의 경사로가 있어서 산에 오르는 느낌을 준다. 산길은 사람들이 만든 길이며 산이 사람들에게 허락한 길이다. 산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산을 오른다. 처음 오르막을 지난 뒤 이정표가 나온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알려주는 이정표는 삶에 있어서도 긴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삶에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이정표 ⓒ 김준식


정상으로 가는 길로 가야 한다. 하지만 정상으로 가지는 않는다. 정상 주위를 빙 두르는 둘레길이 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나뭇가지에는 지난겨울을 이긴 푸른 잎들이 이미 내 손마디만큼 자라 있었고 그 사이로 간혹 꽃이 먼저 피는 나무들의 꽃이 보였다. 진달래는 이미 졌지만 철쭉은 잎과 함께 가끔씩 보였다. 이 둘레길의 이름 물고뱅이는 이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자음으로는 무고리이고 우리말로 물고뱅이인데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라는 설과 무기고의 방이라는 설이 있다.

물고뱅이 마을 둘레길 이정표물고뱅이 마을 둘레길 이정표 ⓒ 김준식


총 길이는 5.6km로서 비교적 짧은 둘레길이지만 봉명산과 이명산 두 산을 거치기 때문에 짧지만 여러 풍경을 볼 수 있다. 남도의 산들은 오래된 산들이라 지리산 봉우리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험한 산이 없다. 더욱이 바다에 인접한 산인지라 봉우리는 할머니 등처럼 완만히 굽어있다. 둘레길을 가다보면 남쪽으로 멀리 사천만과 비토섬도 보인다.

희미하지만 바다가 보인다.바다가 보인는 사진 ⓒ 김준식


봄이 중간을 넘어서니 이제 산들은 벌써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산색이 저리 찬란한 것은 단지 녹색 때문인가? 아니면 계절과 공기의 조화 때문인가? 산을 이리저리 돌아서 나 있는 길을 걸어가면서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자신들만의 기념물을 만나게 된다.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지만 돌탑들이 몇 개 모여 있는 곳을 지나면서 사람들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를 원할 것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나름대로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균형과 조화의 입장에서 환경보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작은 돌탑들돌탑 ⓒ 김준식


길을 따라 걷다보면 자연과 내가 하나 됨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자연(길)이 주는 아름다움이 나의 감정을 순화하고 마침내 내가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아름다운 길이 이곳 둘레길에는 있다.

아름다운 길1아름다운 길1 ⓒ 김준식


아름다운 길2아름다운 길2 ⓒ 김준식


길만 아름다우랴 허리를 숙이면 많은 봄꽃들이 산을 꾸미고 있다. 이른 봄에 피어 이미 져 버린 얼레지를 운 좋게 만났다. 자연은 나에게 넓어지라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은 것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름다운 것을 대하는 태도는 나의 삶 전체에 영향을 준다.

얼레지얼레지 ⓒ 김준식


산허리를 돌아 나와 봉명산을 벗어나면 차들이 다닐 수 있는 임도를 만나고, 임도 넘어 아름다운 작은 봉우리들과 마주하고 또 그 길을 사이에 두고 이명산을 만나게 된다. 이명산 들머리부터 편백림이 시작되는데 숲의 정기를 내뿜는 편백 숲을 지나는 기분은 남다르다.

빽빽한 편백림빽빽한 편백림 ⓒ 김준식


편백 숲을 지나 산허리를 지나면 호젓한 숲길을 또 만나게 된다. 산을 느끼면서 동시에 숲을 느끼는 이중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길이다. 혼자 걷는 숲길에서 삶의 이곳저곳에 숨어있는 찌꺼기가 버려지기를 기원해 본다.

호젓한 산길산길 ⓒ 김준식


이명산을 내려와 다시 봉명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뜻밖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시비를 만났다. 여기 이 비가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때 다솔사에 계셨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지만 이곳은 다솔사와도 꽤나 떨어진 곳이다. 내용을 알고 보니 여기에 선사의 거처가 있었다 한다. 님의 침묵이 여전히 가슴에 와 닿은 것을 보면 그 시절이나 지금 시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만해 한용운 선사 시비시비 ⓒ 김준식


이제 길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처음 왔던 곳으로 가는 오르막이 남았다. 신록이 푸르러 지는 이 계절에 산에 오르고 또 산에 있는 길을 걷는다. 길은 어디서나 계속되며 또 어디로든 지나간다. 내 삶도 이와 같이 계속될 것이며 또 지나갈 것이다. 신록이 눈부시다.

눈부신 신록신록 ⓒ 김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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