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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과 떠난 북촌여행

북촌 한옥마을 문화탐방

등록|2011.05.06 15:10 수정|2011.05.06 15:10

북촌 한옥마을 5경 오름-북촌 한옥마을 8경 중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5경, 오름 포토존에서 본 풍경이다. 고개 길을 오르면 6경 내림이 있는데, 그곳에서 사진촬영을 하면 서울 전경 모두와 멀리 남산 타워까지 사진촬영이 가능해 인기가 높다. ⓒ 박태상







4월 중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소위 강남 교육특구 소재 양전 초등학교 김현룡 교장선생님이었다. 그 옛날 초등학교 재학 시절 훈화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존경스러운 교장선생님~~  내용은 35명 정도의 선생님들께서 관광버스 한 대를 타고 문화체험학습을 떠나려고 하는데, 옛 선비정신과 북촌 한옥마을이야기를 묶어서 문화탐방 해설을 맡아줄 수 있는가하는 제안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문화전도사'를 자처하는 처지에서 5월 일정이 너무 빠듯한데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응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지식과 재치로 무장한 젊은 선생님들을 옛 선비이야기로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었다. 봄날의 북촌 한옥마을이 너무 예쁘니 감수성이 예민하신 여선생님들이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금세 빠져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탑골공원 후문에서 ‘백탑청연’에 대해 양전초등학교 선생님들께 해설하는 필자- ‘백탑청연’은 탑골공원에 있었던 백탑 주변에 거주하면서 실학사상과 북학사상을 펴나갔던 연암 박지원과 그 제자들인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의 끈끈한 학문적 만남과 풍류정신을 상징하는 말이다. 역사소설가 김탁환은 이들의 이야기를 장편소설 ??열하광인??에서 잘 표현했다. ⓒ 박태상



'백탑청연'은 탑골공원에 있었던 백탑 주변에 거주하면서 실학사상과 북학사상을 펴나갔던 연암 박지원과 그 제자들인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의 끈끈한 학문적 만남과 풍류정신을 상징하는 말이다. 역사소설가 김탁환은 이들의 이야기를 장편소설 <열하광인>에서 잘 표현했다.

일주일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책자를 만들기 위해 주력했다. 워낙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정통신문을 통해 체험학습 신문을 만들어오라고 주문하는 선생님들이 아니신가? 함부로 제작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애 엄마가 무지 고생했다. 사실 아이보다 애 엄마가 체험 학습하느라 고생이 더 많았다. 

남편은 방콕(?) 시키고 눈도 못 뜨는 아이를 새벽부터 깨어서 등산 가방을 매게 하고는 저 남쪽 순천만부터 경주까지 기차를 타고 학습체험을 다니곤 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다녀와서는 글쓰기는 남편 몫이다. 그러니 아이를 붙들고 글쓰기 기초이론을 가르치면서 또 한편으로는 솔선수범하여 체험학습 신문 만들기에 밤을 지새우면서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어느 집 부모들이나 한번쯤은 고생을 해봤음직하다.

담당 부장선생님과 통화하여 출발지점을 낙원상가 앞 인사동 입구로 잡았다. 탑골공원 주변부터 탐방하기로 했다. 탑골공원 주변은 "한국문화의 산실"이다. 조선 말기에는 소위 연암 박지원을 포함한 백탑파들의 '백탑청연(白塔淸緣)'으로 유명한 공간이다. 소위 조선조의 '後四家'(또는 '燕門四家'라고도 불림)들이 실학을 연구하고 북학사상을 전파하던 공간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제자인 박제가가 집필한 <白塔淸緣集序>에는 선비를 좋아했던 연암의 인간적인 멋이 잘 드러나 있다.

한양의원 터- 일제 강점기 의학계의 중진 박계양 선생이 운영하던 병원 터로 당시 민족주의자였던 우국지사들인 홍명희, 정인보, 최남선선생 등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시국을 한탄하며 민족저항의 길을 모색하던 사랑방이었다. 이들은 120년 전의 백탑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 박태상



내 나이 18 ~ 19세 때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이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에도 밥을 안치시더니 의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하셨다.

연배가 다르고 처음 본 사람을 이렇게 환대한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덕을 갖춘 교양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웅은 영웅을 알아 본다'는 것이 이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제자 박제가는 연암의 인품에 반해 그의 제자로 입문하게 된다. 

당시에 연암의 학문이 높다는 것이 소문나고 인품도 훌륭하다는  말이 퍼져나가자 연암의 집 근처로 당시 성리학에 염증을 느끼면서 신분제도의 혁파와 이용후생의 새로운 학문의 추구에 관심이 많았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연암은 1773년 무렵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의 처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실학사상을 다듬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연암 선생의 서재 북쪽에 아정 이덕무의 사립문이 마주 서있었고, 척재 이서구의 사랑이 서쪽 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서화고동의 감식가이자 화가였던 관헌 서상수의 서재가 있었다. 북동쪽 코너에는 영재 유득공의 집도 있었다. 이제 이들에게 박제가도 합류하게 된 것이다.

조광조 집터 - 조선조 중엽 유학적 이상주의를 꿈꾸며, 개혁을 시도하다가 관학파와 공신들의 역풍을 맞아 사약을 받고 희생된 사림파의 영수 조광조의 집터가 낙원상가 앞 횡단보도 위에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 급히 길을 건너야 하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에 세워져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 박태상



박제가는 연암과 연문사가의 집을 한번 방문하면, 시간 가는 줄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숙박하면서 시문과 척독(尺牘, 편지글)을 짓고 술과 풍류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이들은 서화는 물론이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주변에는 음률에 밝은 효재 김용겸도 살고 있었다.

당시 거문고를 잘 연주하던 음악가로 김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새로 조율한 양금을 즐기기 위해 홍대용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김용겸이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김용겸은 책상 위의 쟁반을 번갈아 두드리며 시경의 한 장을 읊조리게 되었다. 흥취가 한참 무르익자 그는 문득 일어나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홍대용과 연암이 뒤를 따라 찾아 나섰는데, 수표교에 달빛이 휘영청 밝은 곳에 김용겸이 무릎에 거문고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서 달을 바라보면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달빛이 은은한 곳에 술상과 안주를 차려놓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밤새도록 놀다가 취흥이 도도할 때 비틀거리며 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백탑근처부터 종각과 수표교 다리 부근까지가 한국문화와 풍류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연암은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 한문소설 12전(傳)과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저술한 <열하일기>를 남겼다.

정선의 <양반전> 스토리텔링 동상 - 강원도 정선 <아라리촌>에는 정선을 공간배경으로 삼는 연암 박지원의 풍자소설 <양반전>을 스토리텔링한 동상들을 조각으로 세워놓아 정선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 박태상



탑골공원 근처에는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자들이 모여서 시국을 논하던 곳이 문화유적으로 표석이 새겨져 존재하고 있다. 한양의원 터가 바로 그곳이다. 종로구 낙원동 146에 계성빌딩 앞에 위치한 한양의원 터는 일제 강점기 의학계의 중진 박계양 선생이 운영하던 병원 터로 당시 민족주의자였던 우국지사들인 홍명희, 정인보, 최남선선생 등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시국을 한탄하며 민족저항의 길을 모색하던 사랑방이었다. 이들은 120년 전의 백탑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 낙원상가에서 인사동으로 접어드는 종로세무서 골목 입구의 길목 횡단보도 중간에는 조선조 유학의 개혁을 부르짖다가 관학파의 역공을 받아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조광조의 집터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조광조(1482~1519)는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영수로  유교적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었다. 1519년 조광조 등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의 제거였다. 이른바 위훈 삭제운동으로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결국 조광조 일파는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이다.

운현궁 ‘노안당’-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대원군 이하응이 섭정, 집무를 보던 운현궁 사랑채가 바로 ‘노안당’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논어??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의 이념을 담고 있다. ⓒ 박태상



조광조 집터를 보고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초교 앞을 지나 대원군의 주거지였던 운현궁으로 들어갔다. 운현궁에서는 구한말의 역사를 좀 더 상세하게 공부하기 위해 문화 해설사를 초빙하여 대원군과 명성왕후에 대한 역사공부를 했다.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로서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이다.

대원군은 이곳을 무대로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어린 아들 대신에 정치를 담당했다. 대원군은 고종 1년인 1864년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연달아 짓고, 1869년(고종6년)에 이로당과 영로당도 세웠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고종 전용 정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었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한 개혁정책을 논의하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락당은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의 안채로서 고종 3년 1866년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왕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고 교정에 서있는 인촌 김성수선생 동상 앞에서 인증 샷- ‘리틀 고려대학교’라고 할 정도로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학교 교정과 유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일본 관광객들에게 사진 촬영 장소로 인기가 있는 장소이다. 중앙고 교문 앞 문방구에는 배용준과 박용하의 사진이 들어있는 관광 상품을 팔고 있어 이색적이었다. 35명의 일행 중 10여 명은 10 Km 이상을 걷는 강행군에 뒤처져 막상 사진 촬영 할 때는 실종되고 말았다. ⓒ 박태상




운현궁을 나선 후 곧바로 헌법 재판소 앞을 지나 돈미약국 건너편 골목 안에 있는 가회동 11번지 북촌 한옥마을로 접어들었다. 골목 길을 접어들면 바로 동림 매듭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은 전통 매듭 기능전수자인 심영미 선생이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2004년 4월 문을 열었다. 노리개, 유소, 돌끈 등 각종 매듭을 제작하는 과정을 실연하여 일반인에게 체험의 장을 마련해주고 있어서 특히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한옥마을길을 꺾어 계속 올라가면 가회민화박물관, 북촌젓대공방, 한상수자수박물관이 이어져 나타난다. 자수박물관 못 미쳐서 고개 길 앞에 포토 존 동판이 놓여 있다. 이곳이 바로 북촌 3경이다. KBS TV 인기 현장 방문 프로그램인 '1박2일'에서 북촌한옥마을에서 북촌 8경을 설정해 보여줌으로써 일약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북촌 3경에서 사진촬영을 마친 후 바로 고개 길을 내려가 계동으로 접어드는 곳에 위치한 명문고교 중앙고등학교 교정에 진입해 중앙고과 고려대학교를 창건한 호남 갑부 인촌 김성수선생의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했다. 교문을 들어설 때 경비아저씨가 현재 수업이 진행 중이므로 입장을 불허한다고 말해서 일시 당황했다.

할 수없이 교무실의 교감선생님께 전화연락을 부탁해서 통화하면서 우리나라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사들의 문화학습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왔으니 탐방을 허가해달라고 졸라서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일본, 중국 관광객 등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서 학생들의 수업권이 침해받고 있어서 취한 조치로 생각이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희동 집터 -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새로운 조형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교육자로서, 그리고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행정가로서 한국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일본에서 귀국 후 10년 만에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 서양화적 수법을 가미한 풍(風)을 개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양화가로서 고희동의 자화상이 유명하다. 현재 원서동의 집터는 2년째 공사 중이다. ⓒ 박태상



중앙고교에서 좀 더 고개를 내려가 창덕궁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창덕궁 궁벽 조금 못 미쳐 원서동 고희동 집터가 나온다. 고희동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자화상을 그린 화가인데, 나중에는 미술평론가로 널리 활동했고, 일제 강점기의 검열과 압박에 맞서 동양화로 전향해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고희동 집은 2년째 공사 중에 있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담벼락에 세워진 트럭에 올라 집안을 겨우 촬영할 수 있었다. 

다시 중앙고 정문 앞을 지나 고개 길을 넘어 돈미 약국 앞을 거쳐서 북촌 한옥마을 31번지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일본, 중국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한옥마을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공간이다 소위 북촌 8경 중 5경부터 7경까지 몰려 있는 곳이다. 오름과 내림에 각각 포토 존 동판이 새겨 있어서 사진촬영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이다. 담임을 맡고 있는 학년별로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초등학교 코 찔찔이(?) 모습이다. 아이들을 오래 가르치다 보면 선생님들의 마음도 동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북촌 한옥마을 제6경 ‘내림’ - 포토 존으로는 가장 인기 있는 장소이다. 한옥마을의 단아한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저 멀리 현대화된 서울전경이 모두 내려다보이고 심지어 남산 타워까지 흐릿하게 보이니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 박태상



북촌 8경 근처 전망대에서 보면 인왕산과 삼각산 봉우리가 오롯이 보인다.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1883년 일본을 거쳐 조선에 와서 본 서울의 풍경은 매우 낯설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울을 둘러싼 산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바로 삼각산 봉우리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벌어졌을 때 프랑스사람들은 여기에 '수탉의 볏'이란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산의 들쭉날쭉한 봉우리에 붉게 홍조를 띤 해가 비치는 모양이 마치 수탉의 볏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수탉의 볏'을 떠받치고 있는 뾰족한 봉우리가 북악이다. 이는 서울에 더 근접해 있고, 원형 광장을 가로질러 그 반대편에 남산이 자리 잡고 있다. …(중략)… 다만 남산은 나무가 빽빽한 데 반해 북악은 듬성듬성하다. 양쪽 다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다."(퍼시벌 로웰,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예담, 2001 참조)라고 당시 북악 주변의 서울풍경을 묘사했다. 그런데 지금은 북촌 한옥마을만 해도 많은 집이 있고 사람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으니 서울 거주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북촌 5경과 6경이 있는 31번지 일대는 11번지보다도 더욱 한옥이 집단적으로 많이 조성되어 있다. 골목길의 오름과 내림 자체에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눈 아래에 서울의 현대화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저 멀리 남산타워까지 내려다 보여 전망이 가장 좋은 공간이다. 6경의 오름을 올라서 미음갤러리 앞을 지나 작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초록빛 담쟁이가 싱그러움을 뽐내는 이준구 가옥이 등장한다.

에콰도르대사관저- 대체로 대사관저는 독일대사관저를 비롯해서 성북동에 많다. 에콰도르 대사관저만 특이하게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하고 있어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 박태상



이 집은 1938년경 가회동 31번지에 세워진 주택으로 당시 세도가 민대익 일가의 소유였던 곳이다. 민대익은 민영휘의 맏아들로 이 필지뿐 아니라 가회동 일대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민영휘는 구한말 세도가인 민씨 집안의 영수로서 민비의 친척조카였다. 그는 이 집과 형태가 비슷한 서양식 주택을 여러 채 건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일제 강점기 상류계층의 서양식 가옥 형태를 잘 보여주는 2층 양옥이다.  이준구 가옥을 지나 골목 끝을 나가면 다시 개활한 대 전경이 펼쳐진다. 소위 가회동, 계동, 성북동으로 이어지는 한옥과 신식 양옥의 조화가 이루어진 부자촌이 눈앞에 보인다. 새로운 절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골목 오른쪽 끝에는 중남미의 에콰도르 대사관저가 자리 잡고 있다. 관저 앞에서 펄럭이는 에콰도르 국기는 노랑·파랑·빨강의 삼색기로서 노랑은 다른 색의 2배 크기이며, 중앙에 문장이 있다. 1822년 콜롬비아·베네수엘라와 함께 속했던 옛 대 콜롬비아 공화국(Great Colombia Republic)의 삼색기에 문장을 첨가한 것이다. 노랑은 부와 태양과 농장을, 파랑은 하늘과 바다와 아마존 강을, 빨강은 독립운동에서 흘린 피를 나타낸다고 한다.

맹사성 집터 - 지금은 북촌 동양문화박물관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맹사성은 조선조 초기의 유명한 청백리이자 불의와 권력남용에 냉혹했던 판관으로도 유명하여 후세의 사표가 되고 있다. ⓒ 박태상



이와 대조적으로 북촌 한옥마을 31번지 왼쪽 골목길로 올라가면 끝자락에 북촌동양문화 박물관과 '하루고양이 갤러리'가 나타난다. 두 곳 모두 외양상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특히 동양문화박물관 안에는 조선 초기 청빈관료의 상징인 맹사성의 집터가 자리 잡고 있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듯이 흥(興)이 졀로 난다/탁료계변(獨醪溪邊) 금린어(錦鱗魚) 안주(安酒)로다/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亦君恩) 이샷다"의 <강호사시가>로 유명한 고불古佛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고, 매양 출입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태종 때는 사헌부대사헌이 되었을 때, 지평 박안신과 함께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 조대림(태종의 딸 경정공주의 부군)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으므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서 처형될 뻔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권력의 남용과 횡포에 대해 냉엄했던 대사헌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북촌 8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계단 길과 맑은 하늘길이 위치하고 있으며 경복궁과 삼청동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서 보면,  아름다운 기와지붕과 삼청동의 아기자기한 카페의 지붕이 속내를 드러낸다. 아랫마을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설치된 강화유리벽 사이로 삼청동과 북악의 푸른 색채의 영기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길 아래로 카페 촌으로 내려오니 각종 여성 의류, 모자,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들로서 일본, 중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마침 한 의류가게 앞에서는 SES출신의 가수이자 연기자인 탤런트 유진이 CF화보 촬영을 하고 있었다. 다양한 눈요기를 하고 인사동으로 내려와서 삼계탕으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북촌한옥마을과 옛 선비 문화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덧붙이는 글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은 발로 직접 뛰며, 걸으면서 발견해야 한다. 탑골공원으로부터 운현궁을 거쳐 북촌 한옥마을까지는 상당한 거리다. 우리민족의 단아한 멋과 맛은 <느림의 미학> 속에서 얻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빡빡한 일정때문에 참여한 선생님들께 슬로우 탐방의 진미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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