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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분단, 전쟁, 꼭 우리들 이야기 같아

[서평] <베트남 단편 소설선>

등록|2011.05.10 14:46 수정|2011.05.10 14:46
태어나서 처음으로 <베트남 단편소설선>을 손에 잡고 읽으려 하니 문득 우리 가족사에 비집고 들어온 베트남의 자취가 떠올랐다. 6.25 전쟁 때 남편을 잃고 혼자 몸으로 5남매를 키워온 할머니는 셋째 아들을 베트남 전쟁터로 보냈다. 삼촌은 간다는 얘기를 단 한 줄 편지로 통보한 채 떠났다고 한다. 이제 다시 올 기약도 없는 길을 떠나니 부디 몸 건강하시라고.

겉그림<베트남 단편 소설선> ⓒ 글누림


다행히 삼촌은 일제 라디오, 전축에 갖가지 통조림, 군용 설탕, 과자 등을 한 보따리 안고 개선장군처럼 들어왔다. 죽었던 자식이라도 돌아온 듯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밥이며 떡을 대접했고, 삼촌이 가지고 온 군용 비스켓의 힘을 빌려 난 한 동안 동네 꼬마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삼촌이 결혼하기 전까지 삼촌 곁에 누워 월남 얘기 참 많이 들었다. 베트콩 얘기, 정글 얘기, 월남 사람들 얘기…. 삼촌 얘기에 푹 빠져 살았던 날들이 참 많았지만, 그 얘기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경험했던 절박한 얘기였다는 걸 한 번도 깨닫지 못했다. 얘기 끝에 문득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삼촌의 시선이 주는 의미를 헤아리기에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

여섯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베트남 소설선>을 읽다보니 월남 얘기를 들려주다 먼 산을 바라보던 삼촌의 모습이 떠올랐다. 삼촌이 생사를 넘나들며 겪었던 전쟁이 소설 속 베트남 사람들이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전쟁이라 생각하니 이억 만 리 낯선 땅의 전쟁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굳이 삼촌 때문이 아니더라도 베트남 전쟁은 우리 현대사 경험과 비슷한 면들이 많다. 식민지 경험, 분단과 전쟁, 시장 경제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빈부의 격차, 전통 문화의 쇠퇴, 전통 가치와 새로 유입된 가치의 충돌 등의 주제는 우리도 겪어왔던 일들이다.

베트남에서 태어났지만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프랑스로 가서 자란 <작은 비극>의 주인공 쾅은 프랑스에선 외국인 취급을 받고 베트남에서도 역시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쾅의 이야기를 통해 문득 재일 한국인들의 삶이 떠올랐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삶을 살아야했던 그들, 식민지와 전쟁의 소용돌이가 만들어놓은 비극적 삶은 베트남과 한국인들이 공통으로 겪어야 했던 비극이다.

그들은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지주의 자식을 죽여라!" 하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중병인 몸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두 남자가 그를 뒤따라와 막대기로 머리를 마구 때렸다. 아버지는 예전에 연꽃을 기르던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뒤따르던 두 남자는 증오 때문에 이성을 잃고 연못으로 따라 들어와 아버지의 머리를 미친 듯이 돌로 쳤다. 얼마 후 아버지가 죽은 것을 확인한 그들은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물 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죽었다. 좀개구리밥으로 뒤덮인 수면은 아버지의 뇌수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작은 비극 중에서>

6․25 전쟁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분단이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빚은 비극적인 모습. 그런 비극 속에 가족을 잃고 가슴에 한을 묻고 살아야 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어린 시절 삼촌 곁에 누워 듣던 재미난 이야기가 아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어야 했던 모진 비극,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의 피땀 어린 이야기, 전통 가치와 새로운 가치의 충돌이 빚어내는 생생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베트남과 더불어 과거 우리들의 아픈 모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덧붙이는 글 호안타이 외 6인/조애리 외 8인 옮김/글누림/2011.2/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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