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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에서 뒤바뀐 아이, 실제로 있었다

[아는만큼 보이는 법 77] 병원 실수로 친딸과 헤어진 부모 손배 사건

등록|2011.05.12 12:25 수정|2011.05.12 12:25

▲ 출생 시 부모가 뒤바뀌었다는 설정은 드라마에도 간혹 등장한다. 사진은 MBC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의 한 장면. ⓒ MBC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세상이 아무리 삭막해졌다고 해도 가정은 '편안한 안식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사건을 소개할까 한다.

어느 산부인과에서 산모 2명이 딸을 낳았다. 그런데 병원의 실수로 두 아이가 뒤바뀐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부모는 아이가 뒤바뀐 사실을 알게 된다. 최근 방영 중인 TV 드라마 얘기가 아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실화다.

16년 만에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내 딸이 친딸 아니다"

[사례] 고두심(가명·여)씨는 1992년 경기도 어느 산부인과(개인병원)에서 딸을 출산했다. 딸의 이름을 황금란(가명)으로 짓고 애지중지 키웠다. 고씨가 남편과 이혼하는 바람에 금란 양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금란 양이 고등학생이었던 2008년, 혈액형 검사를 하다가 고씨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고씨와 전 남편의 혈액형이 모두 B형인데 금란 양은 A형이었던 것이다.

유전자검사 결과 금란 양은 고씨의 친딸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자초지종을 캐보니 16년 전 산부인과의 실수로 아이가 뒤바뀐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아이를 돌보던 간호사가 금란이를 고씨에게, 고씨의 친딸을 다른 산모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고씨는 2008년 산부인과 원장 A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설 같은 일이지만 실제 상황이다. A씨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고씨가 청구한 내용은 크게 2가지였다. ▲ 가족들에게 위자료로 1억여 원을 지급하라 ▲ 금란이가 태어난 날 병원의 분만기록정보를 공개하라.

먼저 손해배상(위자료) 부분이다. 산부인과는 병원에서 태어난 신생아들을 주의 깊게 잘 살펴서 건강한 상태로 산모와 함께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의사의 기본의무이다. 그런데 A씨는 이런 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이 있었다. 민법의 관련 조문을 보자.

민법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물론 고씨와 금란 양이 금전적인 손해를 보았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16년 동안 친딸과 친엄마로 알고 살아온 이들이 실상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라는 진실을 알고 나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더구나 고씨는 정작 자기 친딸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니 살아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법원은 "병원 측의 과실로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충격 및 고통 등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민법 제751조(재산 이외의 손해의 배상) ① 타인의 신체, 자유 또는 명예를 해하거나 기타 정신상 고통을 가한 자는 재산 이외의 손해에 대하여도 배상할 책임이 있다.

"병원의 실수는 신뢰에 반하는 행위...손해배상해야"

설사 간호사들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어서 A씨에게 직접적인 과실이 없었더라도 그는 면책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원장으로서 간호사들을 관리·감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민법 756조에서는 '사용자책임'이라고 한다). 결국 A씨가 신생아를 잘 살피지 못했거나 간호사들의 관리 책임을 졌거나,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은 매한가지였다.

법원은 "A씨가 의료인으로서 생명과 건강보호라는 막중한 책임이 있음에도, 산모와 출생아를 확인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소홀히 하였다"며 "이는 원고들에 대한 불법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료인을 믿고 자신의 몸을 맡긴 환자들의 신뢰에 반하는 행동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물론 친자식(혹은 친부모)과 16년 동안 떨어져 산 고통과 충격을 돈으로 배상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법원은 A씨의 엄중한 책임을 인정했다. 법원이 고씨와 금란양에게 3천만 원씩을, 고씨의 아들에게 1천만 원 등 총 7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소송의 첫 번째 요구는 고씨의 승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고씨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요구사항, 즉 친딸을 찾는 일이었다. 산부인과의 당시 분만기록을 공개하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A씨는 난색을 표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다른 가정 즉 금란 양의 친부모 가정에 미칠 또 다른 파급효과가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의사로서 다른 환자의 비밀을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료법 제19조 (비밀 누설 금지) 의료인은 이 법이나 다른 법령에 특별히 규정된 경우 외에는 의료·조산 또는 간호를 하면서 알게 된 다른 사람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못한다.

의료법 때문에 난관에 빠진 친딸 찾기

의료법(21조)에 따라 진료기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환자 본인이나 환자 본인 동의를 받은 배우자, 직계존속 등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법원으로서도 이런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딸을 찾고자 분만기록 공개를 요구하는 고씨의 요구를 외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분만기록을 보여주자니 A씨가 의사 윤리를 저버리는 것뿐 아니라 현행법을 어기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분만기록 정보는 신생아와 산모에 대한 정보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에 당사자 동의 없이 의사가 진료기록부를 공개하는 것은 의료법에 따라 처벌(3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되는 사안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고씨는 헌법에 명시된 행복추구권, 모성보호 의무를 들어 분만기록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씨의 말마따나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10조)거나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36조 2항)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법원은 "헌법상 권리들은 법률로 구체화되지 않는 한 헌법조항에만 근거하여 발생된다고 할 수 없다"며 고씨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법원은 이어 "민사소송법에 따라 A씨에게 문서제출명령을 할 수는 있으나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절차법적으로 불이익을 줄 수 있을 뿐 분만기록을 공개할 실체법적인 의무가 생긴다고 볼 수 없다"면서 "분만기록은 의료인의 직무상 비밀이 기재된 문서로, 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법원은 의료법과 민사소송법의 관련 규정으로는 공개의무가 없다고 보았다. 더구나 어떤 사람에게는 분만 사실 자체가 비밀이 될 수도 있는데 이를 공개했을 경우의 파장효과 등 사생활의 비밀보호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법원은 덧붙였다.

1심은 분만기록 공개 불가, 항소심의 해법은?

재판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고씨는 항소하였고 사건은 2심인 서울고법으로 올라갔다. 항소심에서도 섣불리 분만기록을 공개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서울고법은 판결을 선고하는 대신 우회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시도했다.

우선 법원은 문서 소지인에게 비공개로 문서를 제출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는 민사소송법 조항(344조 등)에 근거하여 A씨에게 재판부에 분만기록을 제출토록 했다. 자료를 넘겨받은 법원은 당시 병원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금란 양을 포함해 단 2명뿐이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파악하였다.

법원의 조치로 적당한 방법을 통해 고씨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씨는 수소문 끝에 A씨의 산부인과에서 같은 날 딸을 낳았던 부모를 만나게 되었다. 고씨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유전자 검사를 설득했고 그 결과 금란 양이 그 부부의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법원은 진료기록 공개라는 방법을 쓰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안을 강구해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정리되자 서울고법은 고씨와 A씨 양쪽을 설득하여 조정을 이끌어냈다. 조정 내용은 고씨가 친딸을 찾는데 들인 비용과 위자료 등으로 5천만 원을 포함, 총 7천만 원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2010년 초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의료법이라는 장벽에 막혀 친딸을 찾기 어려울 것만 같았던 고씨는 법원의 배려로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에게 부여된 법적·도덕적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무려 16년 만에 친딸을 찾은 고씨와 친부모를 만나게 된 금란 양은 예전보다 더 행복해졌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 <국회저널> 5월호에 실린 원고를 보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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