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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에 비친 벌교, 그게 다는 아닙니다

[한량바라기의 남도 탐승기 ⑥]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

등록|2011.05.12 18:05 수정|2011.05.12 18:05
벌교와의 재회

순천 선암사를 나와 처음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경남 남해였다. 5년 전 여름, 금산을 오르면서 눈에 담아 두었던 그 아름다운 풍광이 꽃 피는 이 계절에는 어찌 변하는지 보고 싶었던 탓이었다. 하동의 십리벚꽃길이 한창이라면 그 밑의 남해 역시 봄꽃들이 한창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해로 향하던 나의 발걸음은 전혀 예상치 못한 걸림돌로 인해 그 궤를 수정해야 했다. 선암사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벌교' 표지판이 블랙홀처럼 나의 발걸음을 잡아당긴 것이다.      

처음 벌교를 들른 것은 3년 전 여름휴가 때였다. 지금의 아내를 서울에 남겨두고 홀로 여행을 떠난 나는, 소록도를 둘러본 뒤 광주까지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그 버스가 잠시 정차한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벌교였다. 지명에 홀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을까 말까 엄청 고민했던 나. 비록 서울에서 기다리는 여자 친구 눈치 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벌교는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 언젠가 한 번은 꼭 들러야 할 곳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벌교 홍교의 전경꽃 피는 봄의 홍교 ⓒ 이희동


그런데 지금 그 벌교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벌교와의 재회. 남도 유람을 한답시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내가 벌교의 이끌림을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가자, 벌교.     

나는 무엇 때문에 벌교에 이끌렸던가? 요즘 전 국토를 캠핑장화 하는 <1박2일>이 소개시켜준 벌교의 갯벌과 꼬막 때문이었을까? 아님 많은 이들이 혀를 내두른다던 벌교의 살벌한 욕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아니다. 내가 벌교에 끌린 것은 결국 소설 <태백산맥> 때문이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벌교가 <1박2일>의 은지원이 툭하면 꼬막을 캐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 전만 해도 벌교는 분단이란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고 있던, 수많은 희생자들이 차마 눈을 감지 못했던 <태백산맥>의 고장이었다.      

그러니 역사를 공부했던 이로서, <태백산맥>을 감명 깊게 읽은 이로서 어찌 벌교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비록 세월에 많이 바랐을 테지만 벌교에서 시대의 아픔을 보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실에 매몰되어 많이 무디어진 나를 일깨우고 싶었다.      

횡갯다리와 소화다리에 서린 시대의 한      

횡갯다리어설픈 자태 ⓒ 이희동


낙안에서 벌교 읍내로 가는 길에 처음 들른 곳은 조선 숙종 때 만들어졌다던 홍교였다. 당시 그 자리에 뗏목으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 하여 '벌교(筏橋)'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홍교는 그 옆에 일제가 만들었다는 평석교와 이어져 생각보다 엉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홍교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선암사 승선교를 아침에 봤기 때문일까? 왜 그리 어설퍼 보였던지.
    
'홍교'의 지방 사투리와 '다리'가 이어져 횡갯다리라고도 불리는 벌교 홍교는 <태백산맥>에서 빨치산들이 지주로부터 뺏은 쌀을 나눠주는 공간으로 등장하곤 한다. 이로써 우리는 홍교 주변에 지주가 많았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일제가 전남내륙지방을 수탈하기 위해 현재의 벌교읍을 개발하기까지는 벌교천에 이 홍교 하나밖에 없었다고 하니 아마도 홍교 주변은 조선시대까지 이 지역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다. <태백산맥>에서도 벌교의 대지주 김범우의 집이 바로 이 근처라고 하지 않았던가.      

김범우의 집 입구초라한 모습 ⓒ 이희동


김범우 자택허구와 실제 사이 ⓒ 이희동


생각 난 김에 <태백산맥>의 김범우의 집을 찾아 갔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탓에 그 집이 진짜 김범우의 집인지, 김범우는 실존 인물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안내판은 그 집이 단지 벌교의 대지주 김씨 집안의 소유임을, 그리고 초등학생 조정래가 그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았음을 명시하고 있었다. 결국 조정래는 이 집과 그 주인을 모델로 김범우란 인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김범우의 집은 생각보다 작았다. 벌교의 대지주 자택이라기에 큰 마당을 가진 으리으리한 한옥을 상상했건만, 정작 김범우의 집은 언덕배기 좁은 골목 한 구석에 초라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근대와 함께한 지주의 몰락 때문이었을까? 아님 벌교라는 지역이 워낙 작았던 곳이기에 대지주라고 해봤자 변변치 못했던 것일까?

부용교역사적 현장 ⓒ 이희동

김범우의 집을 나와 들른 곳은 부용교였다. 어엿한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1931년 소화 6년에 만들어져 소위 소화다리로 일컬어진다는 부용교. 이는 결국 당시 사람들이 이 다리가 만들어진 시기에 천착한다는 의미일 터, 가슴이 저려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리 건설에 동원되었을까. 아마도 일제는 현재의 벌교읍을 개발하기 위해 부용교 건설을 우선순위로 삼았을 것이며, 박차를 가한만큼 많은 조선인들을 고통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화다리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된 것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오히려 해방 이후였다. 일제는 식민지 말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부용교에 설치되어 있던 쇠 난간마저 공출에 나갔는데, 이후 다리는 방치되었고, 덕분에 해방 이후 한국전쟁 때까지 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난간이 없어서 사람들을 처형한 뒤 시체를 벌교천에 버리기 쉬운 탓이었다.     

<태백산맥>은 이와 같은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소화다리부용교의 전경 ⓒ 이희동


비극의 현장난간 없는 저 다리에서 수많은 이들의 목이 날라갔다 ⓒ 이희동


벌교천부용교에서 바라본 벌교천 ⓒ 이희동


끔찍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죽었던 것일까. 물론 좌우대립으로 인한 학살은 남한 곳곳에서 자행되었던 일이지만 아마도 벌교는 그 규모부터 달랐을 것이다.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벌교는 화순·고흥·순천을 잇는 교통 요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지리산이 가까운 곳으로 한국전쟁 때는 낮과 밤의 정부가 달랐던 대표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국군이 들어와 빨갱이들을 학살하고,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와 군경 가족들을 학살하던 비극의 지역. 이런 저런 생각에 다리 밑을 내려다보니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처연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1박2일>의 장단점

소화다리를 지나 태백산맥문학관에 가기 전 점심을 먹고자 했다. 그래도 여기가 명색이 벌교인디, 꼬막정식을 먹어야 쓰지 않겄나?

자, 어디서 먹을까. 생각 외로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벌교 읍내의 절반 이상이 꼬막 관련 식당이었지만 선뜻 꼬막정식 1인분만 해주겠다는 식당도 찾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간판에 <1박2일>이 들어가지 않은 식당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겨운 <1박2일>전국 어디를 가도 ⓒ 이희동


벌교 곳곳에서 마주치는 <1박2일>의 강호동. 이번 남도여행을 하면서 절실히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유명한 관광지 어디를 가나 <1박2일>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해남 두륜산 케이블카를 가더라도 강호동은 1박 2일을 외치고 있었으며 벌교에서는 전 시내가 그의 얼굴로 도배되어 있었다.

물론 <1박2일> 때문에 국내 여행이 새로운 조명을 받고, 국민들의 국내 여행이 활성화 되고 지역의 관광수입이 증가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국내의 아름다움은 모른 채, 해외로 나간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부작용도 생길 수밖에 없는데 여행의 정형화가 바로 그것이다. 많은 이들이 <1박2일>에 충실하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당장 벌교만 보자.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벌교가 꼬막으로만 기억된다면 이것만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1박2일>이 우리 국내 여행을 다룸에 있어서 자연의 아름다움 그 이상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조선 이전의 역사는 다룰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현대사는 아직까지 거론조차 힘들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1박2일>은 4월 제주도 방문 시 까만 양복에 까만 넥타이를 착용함으로써 4.3항쟁에 대한 조문의 뜻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PD는 아니라고 적극 발뺌했지만 지금의 KBS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터, 나중에 진실로 밝혀지길 바랄 뿐이다.)   

벌교 꼬막정식이쯤은 되야제 ⓒ 이희동


어렵게 찾아 들어간 벌교의 한 식당. 꼬막 정식은 생각보다 비쌌지만, 그래도 그만큼 맛이 있었다. 어쨌든 맛 중의 맛이라는 전라도 음식 아니었던가.

점심도 배불리 먹었겠다. 이제 <태백산맥>에 흠뻑 빠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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