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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학살한 국가... 어떻게 잊을 수 있나요?"

[뒤늦게 전하는 안부④-인터뷰] 다큐멘터리영화 <오월愛> 김태일 감독

등록|2011.05.13 15:07 수정|2011.08.14 23:43
1980년 5월의 광주, 그 후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아픈 기억은 점차 잊혀지고 있습니다. 5월 1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오월愛>를 통해 사라져가는 오월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영화의 개봉에 맞춰 배급사 '시네마 달'이 '30년 시간의 강을 건너 뒤늦게 전하는 안부, '안녕히... 지내셨나요?''라는 타이틀로 연재기사를 보내와 싣습니다. - 편집자말

▲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보수단체는 아직도 5·18 민주화운동을 "북 특수부대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까지 찾아가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도 그들이다.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이명박 정부는 5·18 공식 기념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외시켰다. 혹자는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싶을지 모를 '1980년 광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광주를 정면으로 다룬 첫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오월愛>(5월12일 개봉)는 30여 년 전 자행된 전대미문의 국가적 폭력을 현재진행형의 고통으로 감내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주인공은 국가가 시민들을 총칼로 위협한 것도 모자라 가족, 친지, 친구들의 목숨을 앗아 갔던 그 처절한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주먹밥을 날랐던 광주 시민 40여 명이다.

영화 속 시민군으로 참여한 어떤 이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았다"며 아파했다. 취사조로 주먹밥을 날랐던 이는 "그렇게 투쟁한 사람도 있는데, 별로 한 것이 없다"며 겸연쩍어했다. 이전투구로 보이는 현재의 광주에 대해 "전부 씨잘데기 없는 짓"이라는 한탄도, 시민군 출신의 남편과는 "다음 생애엔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는 아내의 농 섞인 볼멘소리도 들린다.

<송환>으로 친숙한 다큐공동체 '푸른영상' 출신 김태일 감독은 "여타 작품들 속에서 엑스트라로 취급되어 왔던 분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김태일 감독과 그의 아내이자 조연출로 나선 주로미씨는 2년간 광주의 그 봄날을 기억하는 60여 명의 '인터뷰이'를 만났다. 버스기사, 자장면 집 사장, 과일 행상 등 생생한 다중(多衆)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5월 광주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다.

돌이켜보면 그들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주연'인 적이 없었다. 인터뷰에 동석한 주로미씨가 "광주의 역사로 인해 아프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고, 또 그들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며 광주가 잊혀져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연유도 거기서 비롯한다. 'No name stars', <오월愛>의 영어 제목이다.

이제까지, 엑스트라들의 광주는 없었다

▲ 김태일 감독 ⓒ 시네마달

- 영화를 보고나서, 감독의 민중적 관점이 참 확고하구나 싶었어요. 30여 년이 흐른 지금, 광주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잡는 것이 영화의 출발이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엔 민중이라 불렀던,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보통 사람들, 그 민초들의 모습을 담고자 했어요. 2000년도 즈음 진주로 귀농하러 내려갔다 1년 6개월 동안 고생을 좀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권정생 선생의 <한티재 하늘>을 읽으면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책은 주인공이 특별히 없고 다중의 시점으로 전개돼요.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고. 보통 민초들의 삶이라는 게 특별하게 다르지 않잖아요. 그들의 애환과 아픔을 바라보는 시선이 또 다른 역사일 수 있다 싶었어요."

- 광주는 분명 영화적인 소재임에도, 작업하기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광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 쉽게 사람들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일 소재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많이 부담스러웠죠. 어떻게 다뤄야 할까, 내가 가진 관점으로 민초들의 시선으로 담는 게 가능할까. 쉽게 작업할 수 있는 소재도 아니고, 무게와 함께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니까요.

하나 자신이 있던 건, 소설 <봄날>부터 모든 자료를 접하고 나서 우리가 중요시 했던 사람들이 다 엑스트라로 묘사됐구나 했던 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간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밖에 취급되지 않았던 이 분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좋겠다, 이 분들을 깊게 다룬다면 우리만의 관점으로 5월 광주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주로미 : "본격적으로는 2008년 겨울부터 자료조사에 들어갔어요. 촬영시작은 2009년 5월 1일이었는데 2년 정도 걸린 셈이죠. '풀빛사'에서 출간된 증언집을 보고서 지금 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맞단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증언이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또 돌아가시는 분들도 실제로 생기고 있으니까, 더 이상 늦으면 안 된다고 결심했죠."

김태일 :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누군가 기록을 해야 한다면, 저라도 그들의 당시 이야기뿐만 아니라 지금의 삶까지 담아보고 싶었어요. 그 분들을 만난 뒤엔 꼭 필요한 작업이란 생각을 굳히게 됐고요."

- 그런 점에서 그간 광주관련 작품들에서 듣지 못했던 생생한 이야기가 반가웠어요.
"작업도 더디고 일이 안 풀릴 때가 많았어요. 구 묘역에 들를 때마다 양인화 선생 부부가 운영하는 평화반점으로 자장, 짬뽕을 얻어먹으러 갔어요. 한참 수다도 떨고 사모님하고도 친하게 되면서 지금은 형, 동생 사이가 됐죠. 그렇게 도움을 주신 분들이 참 많아요.

사실 인터뷰로만 이뤄지면 집중력이 떨어지거든요. 그래도 영화적인 평가보다 가능한 그 분들의 이야기를 살리자는 것이 원칙이었어요. 다들 자신들의 아픈 이야기를 힘들게 해 준 분들이잖아요. 또 어렵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살리면서 지루하지 않게 보이고자 했어요."

"총을 든 사람과 밥을 든 사람의 역할은 똑같아요"

▲ 조연출 주로미씨 ⓒ 시네마달

<오월愛>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는 좀 더 특별하다. 그간 광주에 대한 기억과 증언에서조차 그들은 소외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의 주역에서 비켜났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는다는 영화의 주제와 일맥상통할뿐더러, 그간 우리가 광주에 대해 접하지 못했던 다른 시선들을 제공해 준다.

- 다양한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부지런히 과거와 현재를 오가던 영화가 중간 부분에선 집중적으로 취사조로 활약했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어요.
주로미 : "그간 5·18 관련 작품들을 보면 여성들은 다 비주류였어요. 애초에 우리도 전면적으로 가져가려는 건 아니었고, 총을 든 사람과 밥을 든 사람이 똑같은 역할을 했다는 생각만 있었거든요. 누군가 밥을 해야만 가능한 항쟁이었다는 생각은 들어서 처음부터 여성분들을 찾아다녔는데, 너무 너무 힘들었죠. 여성분들은 당신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을 절대 드러내려 하지 않았거든요."

- 영화 속에서 당시 여고생 신분으로 취사조에 참여했던 분이 동국대 학생이었던 오빠를 찾는 장면은 굉장히 극적이었어요.
"그분은 21일 집단 발포 후 시민궐기가 열린 뒤로 계속해서 취사조에 있었대요. 그때 서울에서 온 한 대학생 오빠가 취사조를 모집했대요. 27일 새벽 유서를 쓴 뒤에 여성들은 도청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지시가 떨어졌을 때도 인솔을 했고요. 우리가 마지막까지 수소문을 했고, 그 오빠가 도청에서 돌아가셨다는 걸 그분께 확인시켜 드릴 수 있었어요.

사실 그분도 처음엔 인터뷰를 냉정하게 거절했어요. 나중에 우리의 의도를 알고서야 수락을 해 줬어요. 그때 30년 동안이나 가족, 남편에게까지 숨겨왔던 당시 쓴 노트도 가져오셨죠. 기뻤던 건, 시사회 후 광주시청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노트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5·18 기록물'에 넣고자 한다는 거였죠."

- <안네의 일기>가 떠오르는데요. 진정성을 가지고 작업을 한 결과가 그런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주먹밥을 지었던 여성분들도 많이 아파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자연스레 이분들을 더 찾게 되고 만나게 되면서 그때 여성들의 심정과 정서와 마음을 더 담아내야겠구나 싶었죠. 총을 들었던 사람들은 자부심이 엄청 커요. 반면 여성들은 총을 안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워하고 죄의식도 크죠. 그분들의 마음이 지금 우리들의 마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진행형의 광주는 이합집산, 이전투구 중?

▲ 다큐멘터리 영화 <오월愛>의 한 장면. ⓒ 시네마달


2009년 5월 1일, 두 사람이 광주로 내려간 첫 촬영일. 공교롭게도 도청 앞에선 철거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았던 촬영은 시작부터 그렇게 적지 않은 충격 속에 출발했다. 그렇다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아시아문화전당 건립을 둘러싼 갈등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오월愛> 역시 아직 아물지 않은 지금, 여기 광주의 상처를 간과하지 않는다.

- 후반부엔 5·18 단체들 간의 갈등도 묘사했는데요.
"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하면서 생긴 넓은 터에 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하면서 광주를 역사에 남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대선공약이었어요. 이 공사비용이 당시 2조였는데, 지금은 6조 이상의 대규모 공사가 됐고요. 그런데 공사가 진행되면서 별관을 허무는 설계안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고 해요. 쉽게 말해서, 지금의 문화전당은 역사적 의의보다 건물을 짓는데 더 가치를 두고 있죠.

편집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도 도청 철거싸움이에요. 광주 이외 분들이 짧은 단락만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거든요. 이 도청철거가 경제적인 이해와 맞물려 있지만, 과연 경제적인 부분이 중요한가, 역사적 의의가 중요한가란 문제를 단순하게 풀고 싶었어요. 별관을 철거하지 않고도 아시아문화전당을 충분히 지을 수 있는데 말이죠."

- 그 분들에게 실제적인 문제는 어떤 건가요?
"동지들이 죽어간 곳인데 허물 순 없다며 철거 반대 싸움을 하고 있죠. 한편으론 5월 관련 단체들끼리도 찬반이 나눠지고, 시민사회단체들도 의견이 나뉘어졌어요. 쉽게 말해서, 국가가 학살을 했는데, 배상이 아니라 보상을 한 거잖아요. 정신적인 보상도 포함되지 않았고요. 또 보상 이후엔 5·18 문제가 해결됐다고들 하고, 돈을 받으면서부터 힘도 약해지고. 민주정부 10년 동안 사람들이 소중한 역사를 잊지 않게 만들어 줬어야 했는데, 김대중 정부 들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자와 '5·18 관련자'를 한 울타리로 엮어 보상이 진행된 거죠."

- 그런 아픔도 단순히 돈이나 경제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김태일 : "쉽게 말해서 내란음모와 관련된 사람들 중엔 국회의원도 있고 지위도 높잖아요.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싸운 분들보다 보상액이 몇 십 배가 되고. 그런 것들도 광주항쟁 참여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죠. 아픔과 생활고속에서 살아왔는데, '아, 내가 폭도에서 투사로 변한 것뿐이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나'라는 좌절과 실망을 준 거죠. 어려 어려움을 겪은 회원들은 단체를 이끌어가는 소수가 전당 건립 예산으로 복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말에 동참하게 된 거고요. 애정을 가지고 광주를 보지 않는다면, 하나의 목소리를 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얽혀 이합집산 하는 걸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죠."

주로미 : "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분들도 다수거든요. 하지만 왜 철거를 반대하고 별관이 중요한지 공론화될 기회가 없어요. 지역매체들까지도 단체들이 지저분하게 이권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하고. 우리가 촬영하며 느낀 바로는 사실 내부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런 목소리들이 제대로 담기지 못하고 있어요."

- 최근 문화관광부가 도청 별관은 남겨두겠다고 발표한 건 어떻게 봐야할까요?
"한 광주 지역 여론조사에서 67%가 철거를 반대했어요. 그럼에도 문화관광부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고 있는 거죠. 국가에게 5월은 지우고 싶은 역사잖아요. 실제 작년 행사 때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부르지 못하게 하기도 했고. 사적지 자체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곳이 없어요. 하나하나씩 흔적을 없애가고 있죠. 도청을 허물지 않고도 전당을 만들 수 있는데, 정부는 돈 몇 푼 던져주고 단체들을 밀어붙이고 있는 거예요. <오월愛>를 통해 국가가 국민을 학살하고, 국가가 기념하는 5월 광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간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5월 광주는 계속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 참, 1980년 5월에 감독님은 뭘 하고 있었나요?
"아내랑 동갑내기인데, 영화 속 내레이션과 똑같아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뉴스에 나오는 것만 알았죠. 대학에 가면서 광주를 알았고요. 제가 해왔던 작업은 깊게 보면 다 광주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부채감이랄까? 누구는 목숨까지 버리면서 저런 일을 했는데, 대학 나와서 나 혼자 편안히 먹고 사는 것도 그 당시엔 쉬운 선택이 아니었잖아요.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언젠가는 광주를 꼭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 그간의 영화들도 그렇고, 원래 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나 봐요.
"원진레이온 관련 다큐멘터리 편집을 하면서 '푸른영상'에 들어갔는데, 그때 (<송환>의)김동원이 형이 장기수 선생님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어요. 자연스레 장기수 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죠. 한국사회가 오랜 분단체제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베이스를 갖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건 큰 장점인 것 같아요."

- 영화의 말미, 도청에서 함께했던 신부님이 "끝까지 살아남아 증언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했는데, 결국 이 말이 영화의 주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렇죠.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한다는 건 힘든 일이잖아요. 아픈 역사를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되고요. 많은 사람이 죽어갔던 광주항쟁이 이루고자 했던 게 다 이뤄지지 않았기에 아프지만 계속해서 광주를 기억해야 해요. 한국사회의 의무이자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것 중 하나가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거고."

주로미 : "그래서 광주는 계속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된다고 생각해요. 작업 중에 만났던 김춘배 시인이 '영화든 뭐든 광주에 대한 예술작품이 도서관 하나는 꽉 채워야 한다'고 했던 말에 공감이 가요. 그 도서관에 <오월愛>가 끼어있는 작품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이후에도 그 도서관을 채울 수 있는 작품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고요."

- 그 바람과 달리 현실의 상황은 너무나도 빈약해요.
"맞아요. 그래서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겠죠. 특히나 젊은층의 경우 실업문제나 취업문제로 인해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잖아요. 최근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냐'란 설문에 다수의 중·고등학생들이 '돈'이라고 답했대요. 이 국가와 정부가 행복의 조건 중 10% 밖에 되지 않을 경제적인 돈의 가치에 모든 걸 걸게 만들고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 도청도 경제적 가치로만 보고 쉽게 허물어도 되는 걸로 가져가고 있는데, 사실 사회적 분위기와 환경을 모두 그런 식으로 몰고 간다는 거죠.

하지만 80년 5월의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 10일 동안 최악의 폭력과 고립 속에서 가장 행복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었다는 거거든요. 그때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시민들 각자의 힘을 보여준 거죠. 현실적으로 지금은 더 나은 조건에 놓여 있잖아요. 분명 국가나 정부가 저지르는 잘못에 대해서 분명히 노라고 얘기하며 시민들의 연대로 막아야 돼요. 4대강도 한 번 파괴되면 복구할 수 없잖아요. 이런 것들을 막아내고,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해요."

- 마지막으로 <오월愛>를 볼 관객들에게 얘기하고픈 게 있다면요.
"솔직히 누구보다 꼭 봤으면 하는 층이 청년, 학생들이거든요. 부모세대들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측면도 있고, 워낙 경쟁사회로 가는 대세의 흐름을 막을 순 없겠지만, 청년, 학생들이 80년 5월을 자기 삶속에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모든 가치가 거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상구네'의 후속 프로젝트는 '민중의 세계사'
<오월愛>의 제작사는 온 가족 프로덕션 '상구네'다. 장모님에게 제작비를 선지원 받은 김태일 감독은 2009년 5월 광주의 대인시장 뒷골목에 작업실 겸 생활공간을 꾸렸다. 전문스태프를 꾸리는 대신, 24시간 내내 조언과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아내가 조감독으로참여했다.

또 올해로 열다섯이 됐고 기획 즈음 중학생이 됐던 아들 김상구도 일반 학교를 다니지 않은 덕에 촬영보조 스태프로 참여할 수 있었다. 광주의 시장통과 현장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며 직접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아들은 이제 "지금은 웬만한 대학생들보다 광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다. 아버지의 촬영 현장에 함께 하며 부쩍 성숙한 아들은 이제는 "양인화 선생님처럼 살고 싶어요"라는 어른스런 다짐과 함께, 아버지에게 "이제 가족을 위한 일을 할 때가 됐다"는 경제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가족 프로덕션'으로 <오월愛>를 마친 김태일 감독의 후속 프로젝트는 바로 '민중의 세계사'다. 그간 비전향 장기수, 인혁당, 빨치산 등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기저로 농민, 노동자 등 줄곧 '민중'들의 삶을 그려왔던 김태일 감독은 앞으로 제3세계는 물론 유럽, 아메리카에 이르는 민중사 10부작을 기획 중이다. 사실 광주 이야기를 이 10부작의 말미에 넣을지 현재처럼 서두에 꺼낼지에 대해 조연출과 첨예한(?) 갈등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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