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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안 나오네

"딸아, 넌 바보같이 참지 말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렴"

등록|2011.05.22 15:13 수정|2011.05.22 15:13
"난 결혼해서 애 낳으면 아이들 데리고 엄마 집에 자주 올거야."
"뜬금없이 먼소리여?"
"그냥, 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안 나와서 정말 힘들었어, 엄마. 내 아이들에게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안 나와서 힘든 그런 일은 안 만들어 주려고."

폐섬유종이라는 진단을 받고 1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시던 시아버지가 지난 겨울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아무 말없이 잘 지내던 큰딸아이가 느닷없이 저녁 식탁을 차리고 있는 내 어깨를 뒤에서 껴안으며 불쑥 내던진 말이다.

딸아이의 말을 듣고서 멍한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다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울어지지 않아서 힘들다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냥 아무런 마음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 관계라는 게 이렇게 쓸쓸한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서 있었던 것 같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치른 이상한 결혼 

80학번인 남편은 만학도였다. 어렵사리 대학에 적을 두기는 했으나 일 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데모대의 대열에 끼어 앉아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속이 많이 탔다고 했다. 대학 입학금이 없어 3년씩이나 온갖 궂은일을 다 해 봐도 학비를 마련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단다. 하는 수 없이 시골집 외양간에 매어 둔 소를 팔아 겨우 적을 두게 되었지만 정상적인 수업은커녕 날마다 데모하는 일로 한 학기가 지나가 버리고 결국은 휴교 사태까지 생긴 것이다.

땅 한 평 없는 집안의 6남매 장남에겐 살아가는 일이 늘 외줄타기보다도 더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80년도의 세상은 민주화 열기로 뜨겁게 달아 올라 있었다. 강의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 못하고 문이 닫힌 교문을 떠나 남편은 군입대를 했다. 그리고 제대 후 복학해서는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장학금을 타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절박한 현실에서 남편이 택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고 했다.

학비 문제는 장학금으로 해결을 했지만 집을 떠나 학교를 다녀야 하는 그에겐 생활 문제가 남아있었다. 자취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경비는 있어야 했는데 쌀이나 감자 같은 건 시골 부모님이 보내주셨지만 그 당시 영세민 신세를 면치 못했던 그의 부모님에게선 현금 한 푼 보조 받을 수 없었다. 요즘처럼 아르바이트가 흔한 것도 아니었고 학생 신분으로 가장 다가서기 쉬웠던 과외 교습도 그 시절엔 금지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여서 생활비를 마련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고 이런저런 사정들이 얽혀서 우리는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신혼여행도 없는 이상한 결혼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의 희망대로 장학금을 타 학기를 마치고 졸업과 동시에 기업에 입사를 했다.

"급여통장 만들어야 하는데 신용불량자라네"

회사에 입사해서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전화를 했다.

"은행에 한 번 가봐. 급여통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신용불량자라서 안된다네."
"신용불량자? 그게 뭔데?"
"나도 모르지."

그 때가 1987년이었으니 신용불량자라는 단어가 있는 것조차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지금이라면 회사에 입사 자체도 안 되었겠지만 그때는 신용불량자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딸아이를 업고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은행을 갔는데 시부모님이 7년 전에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대출 받은 날부터 5년 동안은 이자를 잘 넣다가 우리가 학생 부부로 사는 동안 이자가 연체되어서 신용불량자가 된 것이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의 품에서 대학 졸업식날 시부모님이 며느리 모르게 아들에게 선물로 주신 학자금 대출 통장이 나왔다. 결혼 당시 방 한 칸 마련도 못했는데 대출금 통장까지 마누라에게 내놓기가 너무 민망해서 계속 품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남편의 첫 월급이 24만 6000원이었는데 대출금은 39만 원에 연체 이자가 2년 이상 밀려있었다. 은행원 앞에서 어떻게 하면 신용불량자를 면할 수 있냐고 묻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이를 업은 채 울고 서 있으니까 은행장이 나와서 나를 행장실로 데리고 들어가 앉혔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행장은 빚을 지금 갚으면 신용불량 부분은 어떻게 해결을 해 보겠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빚을 해결하고 나서 걸어오는 데 금방이라도 푹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내가 분명 아주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걸음이 헛놓였다.

며느리 앞에서 숨기기에 급급한 시어른들

그런 일을 시작으로 시댁과는 사사건건 좋은 일이 없었다. 며느리 앞에서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숨기기에 급급한 시어른들을 보면서 차츰 아무 것도 아는 체를 하지 않게 되었다. 시댁에 일이 생겨 버스를 너댓번씩 갈아타고 찾아가도 웃을 일이 별로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밥을 먹는 시간에도 누구 한 사람 따뜻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방에 켜져 있는 TV 소리가 아니면 사람 소리가 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외동 며느리였던 나는 아무리 마음을 붙여보려 해도 쉽게 정이 가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늘 나를 부르실 때 옆집 어떤 여자 부르듯 ㅇㅇ이 엄마, 그렇게 부르셨다. 아이가 생기기 전엔 딱히 뭐라고 부르시질 않다가 딸아이가 생긴 뒤론 ㅇㅇ이 엄마, 그렇게 부르셨다. 며느리를 부르는 호칭이라고 하기엔 들을 때마다 뭔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며느리 입장에선 그저 참는 수밖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었다.

시어른에게 노란 베옷을 갈아입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 30년 동안 한 집안의 며느리 노릇을 하면서도 시어른들과는 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 처음 결혼하던 때엔 시집 돌담 빛깔까지도 정답게 느껴졌는데 하루 하루 힘든 세월이 가는 동안 예쁜 일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슴 답답해 하며 살다 보니 손 한번 잡아보는 일도, 마주보며 후하게 웃어 볼 일도 없이 이렇게 영면을 하게 되는구나, 살아간다는 일이 무엇이었기에.

그리운 마음 한 자락 없다는 게 그저 쓸쓸해서 멍하니 서 있는데 옆에 있던 딸아이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늘 시댁에 갈 때면 혼자라서 참 외로웠는데 딸아이가 자라서 이렇게 옆에 서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되었다.

"힘든 일 있으면 아이들 데리고 엄마 집에 자주 갈거야"

산에서 내려온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덮고 누웠던 이부자리부터 걷어 버렸다. 오후 내내 이사라도 가는 집처럼 시아버지의 손길이 갔던 물건들을 끌어 내어 차에 실었다. 고인의 옷가지나 서너가지 태워 버리는 걸로 알고 있던 내겐 낯선 모습이기도 했다. 어제까지도 소용에 닿았던 물건들이 하루 사이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쓰레기로 변해 버리는 걸 보면서 비로소 시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그런 모든 일들을 눈으로 가슴으로 담아 놓았던 딸아이가 기어이 내게 "난 아이 낳으면 엄마 집 자주 데려 올 거야." 그런 말을 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너도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자연히 어느 집 며느리가 되겠지. 며느리 자리라는 게 그런 거더라. 속엣말 한 마디 나눌 상대가 없는 시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참는 것밖에 없었거든. 그렇게 참으면서 마음을 닫아 버렸단다. 사람 사이에 마음을 닫아버리는 일처럼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니. 우리 딸은 엄마처럼 그렇게 바보같이 참지 말고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했으면 싶어. 알았지?"

"알았어 엄마, 난 힘든 일 있으면 아이들 데리고 엄마 집에 자주 갈거야. 그럼 엄마가 옥수수도 삶아주고 열무김치도 담가 주고 그럴 거지 응?"

"그러자. 어디 그렇게 한번 살아 보자." 

먼 훗날의 일 같지만 세월은 참 금세 지나간다. 내가 그새 딸아이와 이런 얘기를 나누는 행복한 나이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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