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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은 이어진다

은희경 장편소설 <새의 선물>

등록|2011.05.17 11:17 수정|2011.05.17 11:53

새의 선물은희경 ⓒ 문학동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과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 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이렇게 나를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p22~23)


은희경 작가는 <새의 선물>(문학동네)로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마음에 들어서 작가의 책이 나오는 대로 사서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소설(개정판)을 다시 읽었다. 이미 한 번 읽은 소설이건만, 다시 손에 잡은 소설, 새벽 4시가 넘도록 밤을 하얗게 새워 읽었다.

지난 95년도에 출간했을 때 처음 읽었던 것이 그때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독서일기를 80매 노트에 차곡차곡 한 권씩 써서 모으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그냥 일기장 뒷면에 독서일기를 함께 쓰기도 했었고 두서없이 썼던 그 노트들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그때 읽고 쓴 책의 느낌을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숨겨지거나 나타나지 않은 면면이 있기 마련이다. '보여지는' 그 모습 그대로는 상대방을 다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중적인 태도를 대부분 취하고 산다. 내면적인 나의 모습과 남 앞에 보여지는 나를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가지고 있다. 사람들 앞에 나를 드러낼 때, 나의 맨 얼굴은 보이는 내 뒤에 숨는다.

홀로 있을 때,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때 맨 얼굴의 내 모습으로 돌아간다. 보여지는 나는 대외적이고 사회적인 얼굴이다. 위선은 아니더라도 외형적인 모습에 더 많이 치중하고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얼굴을 보여준다. 한 사람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있는 그대로 한결같은 한 모습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이다.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진희)'는 애어른 같은 조숙한 아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진희의 입을 통해 열두 살에 이미 다 성장했고 성장이 멈춰버렸다고 말한다. 은희경 작가는 어땠을까. 성장소설 형태를 담고 있는 이 소설 속엔 작가 은희경이 녹아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열두 살 진희의 눈을 통해 삶의 허위를 벗겨내는 이 소설은 서른여덟 살의 진희가 카페에 앉아서 남자와 만나 얘기를 하고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현재)부터 시작된다. 카페에 앉아 과거로의 문이 열린다. 열두 살에 성장을 멈춘 진희는 할머니와 이모와 함께 산다. 엄마는 진희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지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그리움도 없다.

어떤 남자와 서울로 간 엄마는 진희를 낳았지만 혼자 있다가 우울증을 앓고 요양원에서 나와서 자살을 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진희가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한 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않았기 때문'이다. 열두 살에 '삶을 완성'했다는 진희, 열두 살에 인생의 이면을 보아버렸고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태생적 불행과 그것으로 인한 불리한 삶의 입지가 삶의 이면을 일찍 보아버리게 했고 조숙한 아이가 되게 했고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진희의 이모는 스물 한 살인데도 조숙한 어린조카 진희보다 더 어린 짓을 서슴지 않아 보인다. 진희의 눈을 통해 철없던 이모가 차츰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진희 자신도 성장해간다. 천방지축 이모가 사랑을 하고 절친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기는 실연과 친구의 죽음, 그리고 또 다른 사랑에서 사랑으로... 그렇게 새로운 사랑으로 상처를 덮어가는 것을 목도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유하면서 열두 살 진희도 훌쩍 성장한다.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고 붙여 놓았던 것들도 하나씩 지운다.

"그때 1969년 겨울, 나는 조그만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운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마침내 목록을 다 지운 나는 내 가운데 손가락 마디에 연필 쥔 자국이 깊게 파인 것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p13)

열두 살 진희...1969년, 70년대를 바라보는 1969년 겨울로 끝나고, 다시 현실인 90년대가 되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서른여덟 살의 90년대도 열두 살이었던 60년대와 똑같이 세상은 흘러간다.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은 여전히 이어진다'고 작가는 말한다. 결국, 작가는 인간의 모든 상처는 사랑하면서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은 이어진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네 삶은 상처투성이다. 위악과 허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사랑과 배신으로 받은 상처를 또 다른 사랑으로 덮어가면서 우리의 생은 계속된다. 사랑이 전부다. 사랑으로 우리는 아파하고 사랑으로 고민하고, 또 사랑으로 성숙한다는 것을, 모든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덮어가면서 살아간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또 다시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여전히 이어진다.
덧붙이는 글 책: 장편소설 <새의 선물>(개정판)
저자: 은희경
출판: 문학동네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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