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 보고 결혼하나요? 노래 실력도 봐야죠
일가친척 다 모인 시아버지 생신 날... 팔순까지 건강하게 사세요
▲ 수산리 아버지 "이 가방 어떠냐?" 자랑하시는 아버지. 가방은 아버지에게 와서 무조건 멋진 가방이 되었다. 작년 가을. ⓒ 배지영
그러나 나는 올 들어 단 한 번도 아버지 사진을 찍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아버지 몸에 있는 두 가지 암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바로 수술하지 않고, 암 세포를 줄이는 치료를 받아오셨다. 그리고 올해 1월, 8시간이나 걸려서 대장암 수술을 받으셨다. 성공적으로 끝났다 해도 아버지 기력은 많이 약해지셨다.
올해 어버이날은 아버지의 78번째 생신날. 그리고 '진주강씨 호부사공파 수산일가 단합대회' 하는 날. 전북 군산시 옥구읍에 있는 자양중(옛 옥구서중. 남편의 5남매는 이 학교를 다녔다) 체육관에 모이면, 일가들은 아버지 생신까지 축하해주실 거다. 아버지는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시니까 활력 있는 모습을 기대해도 좋겠다.
남편은 막둥이. 누나랑 형이 호롱불에 개구리를 구워먹어도, 남편은 '전빵'(시댁은 문방구와 슈퍼를 겸하며 농사를 지었다)의 과자만 먹었다. 아직 구들에 불을 때던 때라 새벽녘에 방이 차가워지면 부모님 주무시는 방으로 건너갔다. 두 분은 늘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계셨고,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들었다. 그래서겠지, 남편도 집에 오면 시시콜콜 그날 일을 말한다.
"시제 모시러 갔는데 밖에서 만나면 서로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들이 많다는 말이 나와서, 시간이 더 가기 전에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수산리 강씨 자손들이 다 모여 체육대회 하기로 했어."
▲ 수산리 진주 강씨고조할아버지 때부터의 수산리 자손들이 모였다. ⓒ 배지영
내가 자란 동네에서는 아득한 옛날을 '고조 끌텅 할아버지 때'라고 했다. 고조할아버지 때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하고 동급인 셈. 시집와서 받는 두 번째 충격이었다. 첫 번째는 혼인하고 첫 명절에 겪었다. 제사상 앞줄에 선 사람들이 절을 하려고 허리를 굽히면 뒷줄 사람들은 한 발 물러나고, 맨 뒷줄 사람들은 벽에 달라붙는 모습에서.
마침내 5월 8일, 곳곳에 사는 고조할아버지 후손들이 모였다. 아직 100일이 안 된 강두린(남편의 4촌 동생이 낳은 둘째)부터, 1년 14번 제사를 4번으로 줄이자는 우리 어머니(시어머니) 의견에 "강씨 집안 며느리는 대대로 단명하니 종부의 일을 덜어주자"고 제사개혁안에 찬성하셨던, 100살에 가까운 고모할머니들까지.
일가끼리 모여서 제사 지내는 것 말고 무엇을 할까. 우선 강씨 아들들과 이 집안에 장가든 강씨 아닌 사위들이 편을 나눠 족구 경기를 했다. 어르신들은 기저귀 찬 아기들을 보며 "네가 누구 새끼냐?" 하며 지난 세월을 되짚었다. 소년들은 집에 두고 온 마우스를 처절하게 그리워하며 각자 휴대폰 화면으로. 그러다가는 배드민턴을 하거나 운동장을 배회했다.
▲ 축하합니다.일가친척 모이기로 한 날이 우리 아버지 생신이라니, 이건 대행운! ⓒ 배지영
장남 가족의 재롱 보며 부모님 얼굴엔 '부처님 미소'
우리 집 둘째 꽃얄리군은 감기에 걸려서 코를 흘렸다. 많이 흘렸다. 그때마다 닦거나 먹거나 하지 않고 "엄마, 콧물 닦어요" 하며 나한테 달려왔다. 내 옆에는 막내 시누이가 있었다. 멀리 살아서 우리 애들이 고모를 못 알아본다고, 볼 때마다 "서울 고모, 예쁜 고모" 하며 이미지 작업을 많이 한다. 그래도 꽃얄리군이 팍 안기지를 않는다.
"아니, 얘는 강씨 가문 체통 떨어지게 코를 흘리네?"
"예? 강씨들은 코를 안 흘려야 체통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
"근데 수산리(시댁) 식구들은 비염인들이잖아요?"
오전 11시, 이른 시간이었지만 "밥부터 먹자!" 하는 소리에 만장일치했다. 종갓집 큰딸로 태어난 우리 큰시누이 강현숙님은 "엄마, 나는 제사 징그러워서 일찍 시집가 버릴 거야"라고 했다. 출가외인이 된 지 30년, 여전히 종갓집 큰딸 역할을 내려놓지 못해서 백 명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먹을 김치까지 직접 담그며 음식 준비를 했다.
집안의 대장 격인 아버지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모두 가난해서 제사 때만 유일하게 고기와 쌀밥을 먹던 시절, 일족을 먹이고 음식을 싸보내며 1년 14번 제사를 지켜오신 아버지. 돌아가신 분을 잊지 않고, 후손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먹는다는 것에서 제사의 의미를 찾지만,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니 지금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 몸이 아파도 기쁜 자리니까 막걸리 한 병쯤은 즐기신 아버지.
▲ 아주버님네 식구들 무대에...아버지 어머니 얼굴이 유난히 밝아지던 때는 당신들의 장남 식구들이 무대에 섰을 때다. ⓒ 배지영
아버지 어머니 얼굴은 장손(강리규, 고3)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에 유난히 밝아지셨다. 어르신들 흥을 돋우기 위해 부르는 트로트 소리에 아버지 어머니는 완전히 부처님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중에 아주버님네 식구들이 몽땅 나와 춤추고 노래할 때는 소리 내어 "허허허" 웃으셨다. 그러나 내 눈은 매의 눈, 아버지의 단점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옆에 앉은 막내 시누이한테 불만을 대성토.
"우리 수산리 아버지, 좀 경솔하지 않으세요?"
"뭐가?"
"아니, 어머니랑 너무 사랑만 보고 결혼하신 것 같아요. 노래 실력도 봐야지요. 우리 강성옥(남편) 봐요. 어머니 닮아가지고, 저런 무대에는 평생 못 오르잖아요. 형님도 어머니 닮아서 노래 못하는 편이잖아요."
아버지는 노래를 잘하신다. 장구도 잘 치고, 춤도 잘 추신다. 축구도 잘하신다. 무엇보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신다. 나는 둘째 임신했을 때 조산으로 두 달간 병원에 누워 있었다. 의사도, 하느님도, 부처님도 아기의 건강을 장담하지 못할 때, 오직 아버지만이 "아버지가 아는디 애기는 건강하게 돼 있어. 걱정할 것도 없으니까 너만 건강해야 써"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낙관은 작은시누이가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 고등학교를 시내로 다녔는데 아침 첫 버스를 놓치면, 그 다음 버스는 2시간 뒤. 시간이 임박해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 작은딸을 위해 아버지는 1~2분쯤 버스를 가로막고 사람 좋게 웃으시면서 "어이~ 기다려주소!" 하셨다. 물론 작은시누이의 긍정은 아버지 덕분에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았다.
▲ 손 잡자친척끼리 손 잡는 게 좀 어색했는데 잡아보니까 괜찮다고 합니다. ⓒ 배지영
"나는 강씨 집안 사람이지. 이때까지 잘해줬으니까"
잔치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밥 먹고, 노래하고, 서로 손잡고 돌다가 끝났다. 큰아이는 "지겨운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아하니까 참았어요"라고 했다. 일가 어르신들은 눈앞에 자식들이 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을 거다. 내 새끼라도 특별한 날 아니면 만나기 어렵다는 걸 알고 계시기에 "전화해줘서 고맙다", "와줘서 고맙다"라고 하신다.
친척들이 돌아갔다. 회사 일이 바빠서 살림하고는 담 쌓고 살아온 작은시누이가 산더미 같은 설거지 더미를 해체했다. "이거, 언니 집으로 그대로 보내면, 우리 언니 죽어" 하고는 수돗가에서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막내시누이와 나도 거들었다. 당신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기 싫다 하셨던 어머니는 앉아서 딸들을 힘없이 바라만 보셨다.
종갓집 유전자에 큰딸 유전자까지 받아서 '블록버스터급'의 큰일도 무서워하지 않고 치르는 큰시누이가 말했다.
"사람들을 대접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야. 어머니를 보면 슬프네. 그렇게 솜씨 좋은 양반이 음식 장만도 힘에 부쳐서 이제는 못하잖아."
▲ 자매들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세 딸, 강현숙, 강민숙, 강현옥님. 우리 아이들한테 서로 예쁜 고모라고 우겨서 미모에 대한 기준을 못 세우고 있다. . ⓒ 배지영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강씨 집안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고씨(어머니 성함은 고옥희) 집안 사람이라고 생각 하세요?"
"왜?"
"옛날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에 나온 할머니들이요, 당신들은 돌아가시면 절대로 남편 집안 사람이 아니라서 선산에 같이 안 묻힐 거라고 해서요. 어머니는요?"
"나는 강씨 집안 사람이지. 아버지가 나를 많이 위해줬잖아. 처음부터 이날 이때까지 잘해줬으니까."
짐 정리를 마치고는 큰시누이네 집으로 갔다. 큰 산처럼 존재만으로도 잔치를 빛내주신 아버지는 오자마자 침대에 누우셨다. 몇 시간 동안이나 일어나지를 못하셨다. 나는 몇 년 전의 그림 한 장을 떠올렸다. 큰아이가 다섯 살 때에 스케치북 가득 짤막한 막대들뿐인 그림을 그렸다. 유치원 선생님은 그림 한켠에 아이가 불러준 대로 글을 받아 적어주었다.
"할머니네 집에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림에 나오는 2003년 5월은 5일은 우리 아버지 칠순 날이었다. 건강하고 금실 좋은 부모님을 마음껏 뽐냈던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리 사흘간 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며 진심으로 축하를 주고받았던 날. 앞으로 2년만 더 있으면 아버지 팔순이시다. 그때도 아버지 어머니 사진을 걸고 잔치할 수 있을 만큼, 두 분 모두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 어게인 2003년2년 뒤면 아버지 팔순. 그 때처럼 건강한 아버지 어머니 뽐내면서 축하 주고 받고 싶습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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