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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만의 문제 아니다', 대구에서도 5.18 추모식

2.28기념공원에서..."당시 대구 학생 200여 명 진압군에 끌려가"

등록|2011.05.19 11:09 수정|2011.05.19 14:11

▲ 5.18민주화운동 31주년 기념문화제가 18일 저녁 대구 2.28기념공원에서 열렸다. ⓒ 조정훈


"태우고 싶었다 절름발이의 이 땅을 절름발이의 해방을, 삼팔선을
태우고 싶었다 절름발이의 자유를, 민주주의를..."(박남준 시인의 '오월 산불' 중에서)

오월의 노래가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대구에서도 5.18민주화운동 기념문화제가 2.28기념공원에서 '다시 세상의 빛으로, 역사의 중심으로'란 주제로 18일 저녁 7시부터 열렸다.

약 150여 명의 시민과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오월 영령에 대한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 합창, 5.18구속부상자회 대구경북지부장 등의 연설, 시낭송과 추모음악 공연 등으로 약 1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

1부 행사에서 5.18구속부상자회대구경북지부 백현국 의장은 "5.18은 광주만의 학살이 아니었다"며 "1단계로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면서 광주학살을 막을 수 있는사람들을 전부 구속시키고, 2단계는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비호하고, 3단계로 언론의 입을 막는 철저한 시나리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회고했다.

백현국 의장은 또 "5월항쟁은 진행중에 있는 역사의 성전이고 과거의 거울"이라며 "5.18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잘못된 권력에 타협하지 말고 항쟁하고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하는 청년회 강종환 대표는 "5.18을 이끌었던 시민들의 희생과 정신은 한국사회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되었다"며 "그 분들의 희생과 정신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5.18을 맞이하는 오늘에 대한 성찰도 이어졌다.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최수환 대표는 "오랫동안 이 땅의 청년들이 가졌던 정의의 올바름에 대한 가치를 지금의 청년들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정의롭고 인간이 올바르게 사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백현국 의장은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한미우호증진협회 서 아무개 대표가 80년 5월 18일 북한군 특수부대 600명이 내려와서 대한민국 사람을 학살했다고 이야기 한다"며 "민주주의의 꽃을 이루었던 5.18의 기록역사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없다"며 부끄러운 짓을 그만 두라고 요구했다.

▲ 5.18민주화운동 31주년 기념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 ⓒ 조정훈




2부 행사에서는 창작합주단 '여음'이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와 '아리랑'을 부르고 권미강 시인이 '오월의 노래'와 박남준 시인의 시 '오월 산불' 낭송했다. 또 대구에서 활동하는 마임이스트 이상옥씨의 마임, 크로스오버그룹 '씨밀레'의 '오월의 노래', '렛잇 비' 노래 공연 등이 이어졌다.

특히 이상옥씨는 "춤, 몸짓, 노래, 시들은 총이나 칼보다 무서운 힘"이라며 18개의 바람개비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5개의 바람개비를 나뭇가지에 붙여 518의 의미를 되새기는 마임을 해 눈길을 끌었다.

80년 대구에서는..

5.18동지회 대구경북지부 사무국장인 변대근씨는 80년 당시 대학생이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계명대학교 학생대표로 시위에 앞장섰던 그때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 5.18당시 대구에서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
당시 축제기간인 5월 12일부터 15일까지 경북대, 대구대, 영남대, 계명대 등 4개 대학의 학생회와 긴급조치 세대들인 복학생들을 중심으로 비상계엄 철폐, 전두환 군부독재 퇴진, 언론자유 보장,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4일부터는 학교 밖으로 나가 시민들에게 홍보했다.

- 당시 경찰과의 마찰은 없었나?
14일 계명대학교 학생 500여 명이 대구백화점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던 중 골목마다 지키고 있던 진압군인들에게 잔인하게 진압당했다. 당시 전경이 아닌 포항에 있던 해병대가 경찰복장을 하고 진압을 해서 많이 다쳤다. 200여 명 정도가 50사단 연병장에 끌려갔다. 군인들은 학생들을 좁은 실내에 몰아넣은 뒤 최루탄을 터트리고 심한 구타를 하기도 했다. 소식을 들은 경북대와 영남대, 그리고 계명대 후발대 학생들이 시내로 나오는 과정에서 군부 진압군에 맞서 경찰서를 타격하면서 시위가 과격해졌다.

- 그 다음날은 어떻게 됐나?
당국은 15일 계명대에 휴교령을, 4개 대학 시위주도부들에게는 수배령을 내렸다. 지도부가 도피하면서 시위가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계명대 대표로 서울에 올라가 '전국대학생회장단 회의'에서 대구의 사태를 알렸다. 이날 서울역에서 10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으나 지도부의 해산조치에 따라 무력하게 해산하고 말았다.

- 대구는 광주보다 먼저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나는 17일 이화여대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22일 대구로 압송되어서야 광주의 비극을 알았다. 그렇지만 대구에서는 광주보다 앞서 피바다가 될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다치고 50사단 연병장에 끌려가서 군홧발에 짓밟혔다.

- 5.18에 대해 평가한다면?
5.18은 광주만의 비극이 아니다. 전국의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동참해서 5.18민주화운동을 이끌어낸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전국에서 기려야 할 행사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이룬 민주화를 지금의 정권이 과거로 되돌리려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5.18민주화운동 31주년 기념문화제의 모습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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