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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寒)’의 한 곳, 그러나 풍취를 느낄 수 없어

무주 한풍루를 찾아가다

등록|2011.05.21 20:52 수정|2011.05.21 20:52

한풍루무주읍 당산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인 한풍루 ⓒ 하주성




전라북도에는 '삼한(三寒)'이 있다. 세 곳의 찬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하나는 전주천 가에 자리하고 있는 '한벽당(寒碧堂)'이요, 또 하나는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가 바로 무주에 있는 '한풍루(寒風樓)'라고 한다. 세 곳 모두 물에 가까이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맞기에 적합하다.

한풍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한풍루가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14세기경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국여지승람> 무주 누정조에는 '한풍루재객관전'이라고 적고 있어, 한풍루가 객관에 달려 있는 건물임을 밝히고 있다. 한풍루는 선조 25년인 1592년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현감 임환이 다시 지었다.

현판한풍루에 걸린 현판 ⓒ 하주성



주초한풍루의 주초. 화강암을 네모난 형태로 잘라내 사용하였다 ⓒ 하주성



한풍루의 수난, 그러나 당당한 자태로 남아


한풍루는 누마루 밑으로 어른들도 지나갈만한 높이로 지어졌다. 정면 세 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정자는, 이층 누각을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한풍루의 주초는 네모난 모형으로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당한 자태가 남아있어 '호남제일루'라고도 부른다.

한풍루는 수난의 역사를 당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임환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 중수를 하였다. 이러한 한풍루는 한 때는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가 불교포교당으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금호루'란 명칭으로 바뀌기도 했다. 수난의 역사를 당한 한풍루는 1971년에야 제 이름과 옛 모습을 찾았다.

주심포한풍루는 주심포계 팔작지붕이다 ⓒ 하주성



우물천정한풍루는 우물천정으로 조성하고 화려한 문양을 그려넣었다 ⓒ 하주성




아름다운 우물천정, 그러나 굳게 닫힌 문


밖에서 올려다 본 한풍루는 아름다웠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누정은 우물천정을 하고 화려한 색채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기둥 밖으로 뺀 누마루에는 난간을 둘러 멋을 더했다. 이층으로 올라가 한풍루의 풍취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누각으로 오르는 출입구에는 널판으로 짠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도대체 문화재 보호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문을 달아 잠가버리다니.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찾아간 곳이지만, 가는 곳마다 이렇게 문을 달아 닫아놓기가 일쑤다. 문화재보호라는 것이 문을 닫아야 가능한 것인지. 물론 화재 등 위험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할 수가 없는 것인지.   

계단이층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 ⓒ 하주성



잠을통이층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 위에는 문을 달아 굳게 닫아놓았다 ⓒ 하주성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문이 잠긴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으로 난감하다. 같은 문화재인데도 문을 잠그지 않아도 보존이 잘 되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문을 잠근다고 해서 문화재 보존을 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잠가버리고 나서 제대로 간수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최선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각에는 글귀가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그러나 오를 수 없는 누각 위에 있는 글귀를, 아래에서 읽을 수는 없는 일이고 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위로 올라 주변 풍광을 볼 수가 있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적을 수 있을 텐데.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그저 꽁꽁 닫아버린 문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한풍루한풍루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되어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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