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노자에게서 배우는, 난세를 나는 지혜

[서평] 김학주의 <노자> 번역본을 읽고

등록|2011.05.23 09:30 수정|2011.05.23 09:30
청년 실업, 물가 급등, 전세 대란, 기름 값 폭등, 가계 빚 위험 수위···. 파탄에 이른, 우리 시대 서민 삶과 살림살이의 서글픈 현주소다. 희망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런데도 정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외려 국민이 정치 현실을 걱정하고 아파할 따름이다. 정상적인 정치라면 정치가 시민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껴야 맞다. 그리고 처방전을 제시하거나 그런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게 도리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다. 대규모 국책 사업 관련 말싸움과 선전들만 요란하다. 이젠 다시 이른바 대권놀음으로 숱한 나날들을 허비할 차례다.

시민이 자신이나 공동체의 생존방식을 정치에서 찾지 못한다면, 이는 정치의 위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공동체 존속이라는 문제에까지 가 닿을 수밖에 없다.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정치나 권력이 시민을 고단한 삶과 불안에서 끌어내지 못한다면, 시민들 편에서는 저항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법 현실 또한 권력 쪽에 굳건히 서 있다. 우리 실정법은 시민에게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법의 정신이나, 욕구의 충돌과 그에 따른 자력 구제까지도 시민은 떠올릴지도 모른다. 누가 평화 대신 급격한 변화와 물리적 충돌을 바라겠는가. 그만큼 우리 시대에 생존을 이어가는 일이 가파르단 말이다. 서글프다. 권력은 자기중심적이어서 늘 그 확장과 유지에만 급급하고, 초법·탈법을 일삼는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연명하는 '힘없는' 자연인들의 연대는 멀고도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자력구제라는 방식 대신 어떤 이들은 욕구의 제어나 다른 방식의 해소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지극히 패배주의 쪽 발상이긴 하다. 해법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극적이다. 하지만 어지러운 시대를 지나는 하나의 생존방식일 수는 있다. 생명은 '살아남음'이라는 지상의 과제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노자 선생과 그의 '도와 덕'이 들어설 여지가 있을까?

"만물을 생성하고 존속케 하는 '도'의 오묘한 작용으로서(163 쪽)" 도를 노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오묘한 암컷의 문이 하늘과 땅의 근본이라 하는 것이다(노자 제 6 장, 김학주 역본, 노자, 162)."

여기서 노자는 도가 여성적이며, 비어 있으며, 약한 것임을 보여준다.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제 61 장, 암컷은 언제나 고요함으로써 활동적인 수컷을 이겨내는데, 고요한 몸가짐으로 겸손하기 때문인 것이다, 279).

노자는 도를 물에 비유하기도 하고(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제 8 장, 166), 치유(致柔부드러움에 이름, 제 10 장, 171 각주 4)와 겸손(不自矜故長스스로 업적을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남보다 뛰어나게 된다, 제 22 장, 197)에 비유하기도 한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낮은 자리를 잘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66 장, 270)" "그러므로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함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故去彼取此, 제 72 장, 302)."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것은 낮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며 교만함보다는 겸손함 쪽에 가까이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도의 상태에 있다는 얘기다. 어렵다는 게 반드시 절망할 처지인 것만은 아니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힘없는 자연인들이나 시민들의 삶과 노동과 일상에 노자가 말하는 '도'의 상태가 깃들어 있으며, 이들이 어렵다고 하여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생명줄을 끊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故貴以身於爲天下 若可寄天下(그러므로 천하보다도 자신을 진실로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곧 천하를 맡겨도 좋을 것이며, 제 13 장, 177)."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人之生 動之死地 亦十有三 以其生生之厚사람이 태어나서 스스로 움직이며 죽을 곳으로 가는 사람도 열 명에 세 명 정도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의 삶을 너무 잘 살아 가려 들기 때문이다, 제 50 장, 257)"

사람은 어려울 때 처신하는 모습에서 그 본성이나 인간 됨됨이를 보인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꼼수를 따르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헤쳐 나가는 것은 사람이 따를 도가 아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올바른 길을 걸으며,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과 그들의 욕구 또한 존중하면서 서로가 욕구를 충족하도록 힘을 쏟아야 할 일이다. 노자는 41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夫唯道 善貸且成그러나 도란 만물의 모든 것을 돌보아주고 또 생성케 해 주는 것이다, 239). 44 장에서는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게 되지 않으며, 오래도록 자신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245)라 한다.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맑음과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른 원칙이 된다(淸靜爲天下正, 제 45 장, 247)."

공동체의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것에 대해서 노자는 여러 차례 이야기한다. "도는 낳아주고 덕은 길러주며, 자라게 해주고, 크게 해주고, 성숙케 해주고, 완성시켜주고, 보양해주고, 보호해주는 것이다(제 51 장,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 育之 亭之 毒之 養之 覆之, 259)."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지금 자애로움을 버리고 용감하려고만 들거나, 검소함을 버리고 은혜를 널리 끼치려고만 들거나, 남보다 뒤지려는 태도를 버리고서 남보다 앞서려고만 한다면, 죽게 될 것이다, 제 67 장, 292)"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사람을 잘 쓰는 사람은 남보다 아랫자리에 처신한다. 이것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 말하는 것이고, 제 68 장, 294)."

자기 욕구를 관찰하며, 지나치게 그것을 충족시키려 하기보다는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롭다고 노자는 조언한다. "罪莫大於可欲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죄는 욕망을 이루려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화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허물은 물건을 얻으려고 애 쓰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제 46 장, 249). "執者失之(물건에 집착하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 제 64 장, 285). 끝없이 먹고 마시고, 물건을 사면서도 부족함을 느끼며 다시 돈을 쓰려고 돈을 따라가는 우리 스스로와 시대 사람들의 지나친 욕망을 돌아보게 하는 얘기다.

노자의 얘기에서, 자연인들의 노동, 그리고 쉼과 놀이의 의미를 건져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45장에서 "躁勝寒 靜勝熱"몸을 심히 움직이면 추위를 이겨낼 수 있고, 고요히 있으면 더위를 이겨낼 수 있다, 247)이라 한다. 노동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불로(不勞)소득이나 금융소득은 도저히 노동과 그 가치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59 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治人事天莫若嗇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일은 농사짓듯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275)"

일상의 '사소한' 일이나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는 자연인들 또는 시민들의 삶이 이른바 명망가들이나 권력 언저리 사람들의 그것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고 노자는 이야기한다.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한 아름의 큰 나무도 터럭 끝 만한 싹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9 층의 높은 누대도 한 줌의 흙을 쌓는 데서부터 세워진 것이며, 천리 길도 한 걸음 내딛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제 64 장, 285)"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천하의 어려운 일이란 반드시 쉬운 일로부터 생겨나고, 천하의 큰일이란 반드시 작은 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63 장, 283)"

세상이 어지러우면 민초들의 삶과 일상은 전투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이 제로섬게임이나 치킨게임의 싸움판이 된대서야 하루라도 편하게 살 수 있겠는가. 권력 지향이나 목적 지향이 아니라 일상의 '살림'과 노동, 쉼과 놀이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어려운 때일수록 노자가 말하는 도와 덕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고 그걸 실제 삶에 적용해 볼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드러움과 물러섬으로 강하고 나아가는 것을 오히려 이겨내는 지혜가 때로 필요하다.

지난달 김학주 선생이 노자를 번역해 우리에게 내놓았다. 그래 노자의 좋은 한글번역본이 하나 더 늘었다. 노자를 찾는 독자들에게 이것보다 반가운 일이 또 있겠는가. 그는 독자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책 앞부분에 본문만큼이나 많이 해설을 덧붙여 놓았다. 고마운 일이다. 이 책의 충실한 각주를 통해 한자나 한문을 잘 모르는 이들도 번역문을 원문과 대비해 가면서 노자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김학주 선생의 지칠 줄 모르는 학구열과 지적 성실성에 감사한다.

노자의 메시지가 우리 시대 '절망할 수밖에 없는' 민초들에게 살리는 기운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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