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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도망쳐 떠난 곳에 대통령이 도망쳐 왔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30) 동구 일원

등록|2011.05.30 12:28 수정|2011.05.30 12:28
대구 동구에 있는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두루 보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구 최고의 '보물' 보유지인 팔공산이 동구에 있기 때문이다. 또 동구를 답사하는 길목에 망우공원도 있어서 그곳을 둘러보는 데에도 만만찮은 시간이 걸리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동구를 답사하는 여정에 팔공산을 포함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팔공산은 별도로 날을 잡아 느긋하게 다녀야 옳다. 다만 망우공원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수성구에 소재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동구의 출입구에 있으므로, 오가는 길에 둘러보는 것이 좋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하자는 말이다.

여정은 둘 중의 하나. 망우공원- 백불고택- 용암산성- 첨백당- 도동 측백수림- 문창공영당- 불로고분군- 독좌암- 신숭겸장군 유적지- 신암선열공원의 순으로 둘러보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 역순이다. 그렇게 다녀야 '왔다갔다, 오락가락' 헤매지 않고 경제적인 답사를 할 수 있다.

▲ 망우공원의 영남제일문 ⓒ 정만진



망우공원은 대구 동구를 떠나 경북 영천 방향으로 가는 출입구에 있다. 물론 동구의 끝은 망우공원 옆을 흐르는 금호강변의 동촌과 반야월이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망우공원을 넘을 때마다 '대구를 떠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만큼 강을 건너는 행위는 사람의 지리적 정체의식을 지배하는 까닭이다. 강은 곧 국경이기도 하고, <공무도하가>나 <서경별곡>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별의 상징적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망우공원에는 볼 것도 많고 생각해볼 것도 많다.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임진왜란 방어의 민간인 주역인 홍의장군 곽재우의 동상이 있고,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임진왜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임란의병관도 산뜻하게 지어져 있다.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1906년-1907년 허물어진 대구 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문도 1980년 이곳에 복원되어 있고,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대구의 독립운동사에서 총본부 역할을 한 조양회관도 있다(1922년 건립). 조양회관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 대구의 청년들이 가장 먼저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던 건물이다(1982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 백불고택 본채와 사랑채 ⓒ 정만진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마시던 옥천이 지금도

금호강을 건너 동촌 안에서 왼쪽으로 비행장 담을 타고 들어가면 둔산동에 닿는다. 둔산은 왕건의 군대가 주'둔'한 '산'이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옻골마을인데, 이 마을은 안으로 들어서면 대단한 옛날 와가들이 즐비하여 답사객을 황홀하게 만든다.

옻골마을의 한옥들 중에서 한가운데에 있는 저택이 흔히 백불고택이라고 불리는 '경주최씨종가'이다. 대구에 남아 있는 주택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본채는 1694년(숙종 20)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1905년(고종 42)에 중건되었다. 이 고가들에 백불고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최씨 문중이 낳은 대학자 최흥원(崔興遠)의 호가 백불암(百弗庵)이기 때문이다.

백불고택에서 동촌으로 곧장 나오지 않고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면서 바로 우회전하면 그대로 도동에 닿는다. 이 길의 끝도 고속도로가 하늘을 덮어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고속도로 아래의 길가에서 오른쪽 산비탈을 보면 주차장이 숨은 듯 들어앉아 있다. 주차장 끝에는 안내판이 하나 댕그마니 서 있다. 용암산성 일대와 옥천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정상까지 가는 데에는 30분가량 걸린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계속 숲 사이를 걷는데도 제법 길이 가파른 탓에 산을 오르는 기분만은 충분히 느껴진다.

답사객이 이 오름길을 오르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정상 우측 비탈에서 뜻깊은 샘 하나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상 턱밑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떠 마시면서 결사항전했던 우물에서 아직도 물이 샘솟고 있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그 이름 옥천(玉泉)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옥천 옆에서 바라보는 팔공산의 전경이 장쾌하게 사람의 마음에 사무쳐온다는 점이다.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팔공산의 위세를 바라보노라면, 등산 끝에 밀려오는 노곤함은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리고 문득 꿈을 꾸는 듯한 무아지경으로 젖어든다. 켜켜이 쌓인 산줄기들이 그려내는 아득한 빗살무늬는 애써 찾아온 답사객을 선사시대의 풍경 속으로 황홀하게 이끌어간다.

▲ 용암산성 옥천 ⓒ 정만진


일제의 광기를 확인하고 싶다면 당장 도동으로

용암산성 옥천에서 내려와 다시 직진하면 100m도 못 가서 작은 다리를 건너게 된다. 거기서 우회전을 하자. 왕건이 견훤을 피해 반야월 방면으로 도주한 길을 한번 따라가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왕건이 앉아 있다가 사라졌다는 시량리[失王里]까지 가볼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 목적은 오늘 여정의 핵심으로 잡혀 있는 신숭겸장군 유적지 방문으로 충분히 달성되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는 다만 첨백당을 보는 것으로 마음을 넉넉하게 채우는 게 좋다.

첨백당은 단양 우씨들이 효자 우효중과 지조 있는 선비 우명식을 기리고, 자녀들의 교육을 행하기 위해 1896년(고종 33)에 지은 건물이다. 첨백당 답사는 마을 어귀에 늘어선 충신 효자 비석군부터 예사롭지 않게 눈길을 끌고, 건물 바로 앞에 즐비하게 자란 아름드리 나무들과 예쁜 연못도 마음을 사로잡지만, 특히 눈여겨볼 것이 따로 있다. 뜰에 말끔하게 자라 있는 소나무 한 그루이다. 그 이름 '광복 소나무'.

해방을 맞아 이 마을 청년들이 심었다. 소나무 앞에는 소박한 비석 하나가 서 있다. 비석에는 세로로 '解放 紀念(해방 기념)'이라고 새겨져 있다.

소나무도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고, 비석도 무릎밖에 안 오는 조그마한 크기이지만, 그 앞에 서면 이 세상의 어느 기념석을 보는 것보다 더 진한 감동이 일어난다. 조금만 세속적 지위를 얻으면 제 돈도 아닌 국민의 세금으로 아무 데나 기념식수를 하고, 그 앞에 자기 이름 석자를 새겨넣은 사각형 기념석까지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한 천박사회를 살면서, 이런 나무와 비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잔잔한 기쁨이다. 사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이 소나무 앞에서만은 왠지 기념 촬영이 하고 싶다.

▲ 첨백당과 광복소나무 ⓒ 정만진



길을 돌아나오면, 용암산성 옥천에서 내려와 주차장에 섰을 때 정면에 바라보이던 작은 봉우리, 개울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향산(香山)을 눈에 담아야 한다. 너무 작아 산이라고 부를 것도 없지만, 그래도 평지에 불쑥 솟은 것이니 결코 봉(峰)은 아니다. 이름이 향산인 것은 향기가 나는 산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인 측백수림으로 울창하게 뒤덮인 풍치를 보면 작명의 연유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런데 향산 앞에서 우리는 문득 말을 잊는다. 얼마 전까지는 어느 답사객도 보지 못했고, 얼마 후면 역시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될 광경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다. 고사한 측백나무나 기타 잡목을 제거하기 위해 측백나무 울창한 절벽에 인부들이 올라가 공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사이사이에 시커먼 굴이 나타난 것이다.

일제가 판 전쟁용 석굴들이다. 천연기념물 측백나무 숲속의 암석을 깨고 뚫어 전쟁용 굴을 판 참혹상을 보면, 일제의 집요한 광기가 두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이 된다. 그런데 그 굴들은 지금만 볼 수 있다. 다시 숲으로 가려지면 앞으로 언제 다시 볼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오늘 당장 도동 측백나무 군락지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리라.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대구 도동 측백수림. 숲 아래에 일제가 판 동굴이 보인다. ⓒ 정만진


삼국시대 고분이 181기나 남아 있는 불로동고분군

향산을 등지고 서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집들 위로 작은 산이 보인다. 그 산 너머에 고분들이 운집해 있다. 바로 불로고분군이다. 만약 걸어서 답사여행을 하고 있다면 여기서부터 걸음을 내디디면 되고, 차량으로 이동 중이라면 잠깐 문창공영당에 들렀다 가도 되겠다.

문창공은 최치원을 말한다. 측백수림을 왼쪽에 두고 비스듬히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금세 나타난다. 영당(影堂)이니 최치원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알면 되겠는데, 불쑥 찾아온 일반인에게 1860년경에 그려진 전신 좌상(全身坐像)을 보여줄 리는 만무하니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아야겠다. 다만 경주최씨 문중이 1995년에 영당 옆에 세운, 대구 최대의 재사(齋舍) 경운재를 보며 찬탄을 거듭하는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면 족하리라.

▲ 불로동 고분군 ⓒ 정만진


▲ 왕건이 망연자실한 채 혼자 앉아 있었던 독좌암(사진의 우측 상단 부분) ⓒ 정만진



불로동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고분군을 보게 된다. 본래는 현재 복원되어 있는 것들보다 훨신 더 많이 있었겠지만, 지금도 삼국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고분을 181기나 볼 수 있다.

비산동, 대명동, 내당동 등지의 고분들이 도시 확장에 밀려 다 사라지고 없고 대구에는 불로동(봉무동, 도동 포함) 고분군만이 거의 유일하게 남았으므로, 대가야 고분군을 보기 위해 경북 고령으로 발검음을 하지 않는 한 불로동은 답사의 필수 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노(老)인이 보이지 않는다[不]고 왕건이 이 마을에 불로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지만, 불로동은 무수한 고분을 거느린 채 당당히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불로동에서 팔공산 방향을 바라보면 봉무동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왕건의 군(軍)대가 부서진[破] 고개인 파군재 아랫마을이다. 그러므로 왕건의 유적이 남아 있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큰 도로 좌우에 남아 있는 독좌암과 독암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독좌암은 왕건이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岩]라는 뜻이고, 독암서원의 이름도 역시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 독좌암은 봉무정 바로 앞 개울가에 있다. 요즘의 동사무소 역할을 했던 봉무정은 개인(최상룡)이 세운 대구 지역 유일의 공공건물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1875년 건축).

▲ 신숭겸 유적지 ⓒ 정만진


신숭겸장군유적지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파군재에서 신숭겸 장군 동상을 쳐다보며 고개를 넘으면 지묘동에 들어간다. 신숭겸이 황포를 대신 입고 적을 속여 왕건을 무사히 구출해낸 신묘(妙)한 지(智)혜의 땅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이 지묘동이 되었다. 마을 뒷산(山)이 곧 왕(王)건이 넘어서 도망을 친 왕산(王山)이다. 이곳이 곧 왕건이 대패하고 신숭겸이 죽은 곳이다.

왕산 바로 앞 일대는 신숭겸 장군을 제사 지내는 표충사를 비롯하여 표충단, 충렬당, 순절비 등등 유적과 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공식 이름은 신숭겸장군유적지이지만, 무심코 보면 한옥으로 된 건물을 여러 채 거느린 깔끔한 공원으로만 여겨진다. 그만큼 이 유적지는 단정하다. 내용으로든 형식으로든 신숭겸장군유적지는 괜찮은 답사지로 추천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서면 어쩐지 마음이 애잔해진다. 왕건이 신숭겸을 위해 세웠다는 지묘사는  조선시대도 아닌 고려 말에 이미 폐사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 속에 파묻혔을 장졸들의 비명 소리 또한 귀기울여 애써 들으려 해도 아득하기만 하다. 그저 신숭겸장군유적지에는 철 모르는 아이들과 그 부모의 유쾌한 웃음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이것이 정녕 역사무상인가.

장군의 유적지 앞으로 작은 도랑이 흐른다. 그 도랑 바로 너머는 대단지 아파트 숲이다. 한때 전직 대통령 한 분이 그 아파트의 80평인가 90평 되는 집에 살았는데, 그래서 그 아파트 덕분에 신숭겸유적지가 좀 더 유명해졌다. 그분은 지금도 저 안에 살고 계실까. 왕이 (서울로) 도망쳐 떠난 바로 그 자리에, 천 년 후 이번에는 대통령이 (서울에서) 도망쳐 왔으니, 이 지묘동은 풍수지리적으로 과연 어떤 땅일까.

▲ 신암선열공원 ⓒ 정만진


신암선열공원은 자주와 독립을 위해 평생을 보내다가 이승을 떠난 대구 지역의 선열들이  모여 계시는 곳이다. 동구청에서 영진전문대학으로 가는 고개의 정점에서 오른쪽에 있다. 하지만 큰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애써 골목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아도 동네 사람들의 웰빙용 공원처럼 활용되고 있는 모습에 마음만 아프다. 여기저기 산책을 하고 있는 저 주민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묻힌 분들 중 어느 한 분의 성명이라도 아는 이가 있을까? 

신암선열공원은 이름부터 고쳐야 한다. 굳이 예를 들자면, 신암선열공원이라는 이름은 '국립대구박물관'을 '국립황금박물관'으로 개명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대구에 한 곳뿐인 선열공원인데 어째서 동네 이름을 붙여놓았을까? 이런 작명은 선열공원의 위상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린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이건 어디에 건의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오늘 여정의 마지막은 작은 궁금증으로 잔뜩 채워진 채 막을 내린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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