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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8개월 감옥 살고 어디 간 줄 알아요?"

'부미방' 주역 김은숙씨, 24일 오전 세상 떠나

등록|2011.05.24 09:34 수정|2011.05.24 17:51

▲ 24일 오후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은숙씨 빈소에서 추모객들이 고인의 넋을 기리며 분향하고 있다. ⓒ 유성호


▲ 24일 오후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은숙씨 빈소에서 임수경씨(가운데)가 분향한 뒤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 유성호


[2신 : 24일 오후 5시 20분]

"코스모스같았던 은숙, 부디 평안하여라"

"나도 한 잔 마실까. 아, 뜨겁네."

달달한 삼박자 커피였다. '통일의 꽃' 임수경씨가 배달한 잔치국수를 몇 가닥 먹은 뒤 후식으로 선택한 메뉴. 여느 50대 아줌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입속에 무언가 들어가기만 하면 곧바로 토해냈던 한 달 여 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저건 누가 사왔어? 못 보던 거네?"

완두콩만큼 작고 빨간 열매가 알알이 달린 백량금을 보고 반색했다. 고작 6천원짜리 싸구려 화분이었지만 그는 "예쁘다" "고맙다" 연발했다.

"손 따시면 우리 딸 다리 좀 주무르지."

어머니의 당부였다. 지그시 그의 발목을 눌렀는데 반동이 없다. 손길 닿는 대로 살점은 푹푹 들어갔고, 눈 흰자엔 이미 황달이 앉았다. 혀와 입술은 새빨갛게 피가 맺혔고, 말 하는 중간중간 꾸벅꾸벅 졸았다. 몇 분 간의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가 악수를 청했다. 손을 꽉 잡는데, 그래, 이 사람 투사였지, 싶었다. 엷게 웃던 모습.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난 17일 나는 '부미방' 김은숙씨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딱 1주일 만에 그는 세상과 영원히 작별했다. 24일 아침 출근길 나는 이 비보를 전해 들었다. 임수경씨가 문자를 보냈다. 

'김은숙님 떠나셨어요 오전 7:50분'

빈소엔 가족과 지인 몇몇이 자리를 지키는 정도다. 김씨가 마지막 투병생활을 하던 두달여 기간 동안 곁에서 지켜주었던 통일운동가 임수경씨는 기자들과 만나 김씨의 임종과정을 전달해주었다.

"1958년생입니다. 생일이 안 지나 만 52세구요. 오늘 아침 7시 50분 사망했습니다. 직접사인은 출혈에 의한 다발성 장기부전이구요. 선행요인은 위암입니다. 발인은 26일 오전 9시, 성남 삼성공원묘역에 마련됩니다."

-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무엇이었나요?
"두 딸이 언니의 손을 잡고 밤새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했는데 언니는 혼수상태였어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잠시 쉬었다가) 아주 큰소리로 '사랑해' 했어요. 깜짝 놀랄 정도였죠.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그게 유언이라면 유언이에요."

-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이 계셨는데.
"언니가 너무 아팠으니까. 난 그저 고통이 끝났구나. 이분이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 고통이 끝났구나, 그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불과 1년 전만해도 언니는 서울 창신동 신나는 어린이집 아이들과 제주도 자전거여행을 갔었는데. 1년만에 180도 다른 상황이네? 후훗."

- 작은 음악회 이후엔 주로 어떻게 지내셨나요?
"녹색병원 부원장님이 음악회 열 번만 하면 완쾌하겠다! 하실 정도로 컨디션은 좋았어요. 그러나 치료가 나아진 건 아니니까. 그냥 기분만 좋았던 거죠. 자꾸 토해서 일체 못 먹었는데 그저 먹는 즐거움 정도만이라도 느끼게 해주려고 위에 튜브를 꽂았어요. 먹는 즉시 튜브를 통해 나오는 거죠. 기분은 좋아졌지만 몸은 점점 나빠졌던 거예요."

김은숙씨의 어머니 최금렬(84)씨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김씨와 함께 녹색병원에 입원한 채로 딸을 돌봐왔던 최씨는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빈소에는 고인의 가족을 비롯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 소설가 유시춘씨, 인권운동가 박래군씨, 윤원일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 사무총장,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등이 함께 했다. 장례는 기독교식의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25일 저녁 8시 30분엔 녹색병원 대강당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작은 추모모임이 열릴 예정이다.

소설가 유시춘씨는 이날 트위터에 "불의와 거짓이 권력에 군림하던 동토에서 청년의 정의감을 일깨워 흔들었던 은숙, 나는 미친 시대가 맺어준 그의 언니였다"며 "하얀 코스모스마냥 가녀리고 고왔던 은숙아, 하늘에서 부디 평안하여라, 잘가라, 그대 여윈 넋이여"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워낙 낙천적이고 통이 큰 여자였어요. 굉장히 여성적이고 조용했지만 결단력, 돌파력, 자신감 대단했지요. 몸이 안 좋았지만 나을 것이라는 신념이 무척 강했습니다."

'부미방' 김은숙씨와 오랜 세월 함께 해온 김수영 한겨레출판 주간은 고인을 이렇게 기억했다. 김 주간은 24일 빈소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5년8개월 감옥살이 하고 출옥한 끝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었다.

"엄청난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으니 국회의원 보좌관을 할 수도 있었고 그밖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마산으로 갔어요. 마창지역 노동자 외곽조직에서 교육사업을 하겠다는 거였어요."

출옥 후 심신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선택한 곳도 서울 구로지역 노동야학이었다고 했다. 노동운동을 전전하다 책으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며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뛰어들어 작가로 활동했고 20여 편의 번역서를 내기도 했다는 설명이다.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쉬워서 좋다고 했어요. 하루 4시간 이상 자질 않았고 늘 깔끔하게 지냈대요. 아이들도 밥 굶겨 학교 보낸 일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창신동 노동자 자녀들을 돌볼 때도 방과후 학교에 다니는 맞벌이 혹은 한부모 가정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 뒤지지 않게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이든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다보니 몇 배의 에너지를 쏟게 됐고 결국 그런 이유로 힘에 겨워 병에 걸린 게 아닌지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작은 음악회로 많은 힘을 얻기도 했던 김씨가 최근까지 자신의 병실로 배달됐던 편지와 선물을 받으며 자기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며 후원의 손길에 감사해했다. 김씨의 소식이 알려진 뒤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에게 후원금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오후 들어 손학규 민주당 대표, 이정희 민노당 대표, 권영길 민노당 원내대표, 고은 시인, 영화감독 이미례씨 등이 조화를 보냈다.

[1신 대체 : 24일 오전 10시 30분]

'부미방' 주역 김은숙씨, 24일 오전 세상 떠나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 김은숙(52)씨가 24일 오전 7시 50분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사망했다. 김씨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미국이 눈감고 있는 것에 분노해 문부식, 김현장씨 등 부산지역 대학생들과 함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5년8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동안 김씨를 곁에서 후원해온 통일운동가 임수경씨는 이날 오전 6시경 트위터를 통해 "김은숙님의 온가족이 밤새 병상을 지켰다"며 "마침 주치의 선생님이 야간당직이라 수시로 환자상태를 봐주셨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 제발 힘을 내세요"라고 응원 메시지를 날렸다. 그러나 김씨는 2시간여 뒤에 눈을 감고 말았다.

지난 4월 3일 <오마이뉴스> 보도를 통해 그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5천만원 넘는 후원금이 모였으며,  5일에는 시인 고은, 임수경씨 등 지인들이 함께해 녹색병원에서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김씨는 지난 8일 어버이날을 맞이해 제5회 오월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5.18구속자 어머니, 유족, 부상자 등이 꾸린 사단법인 오월어머니집이 해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어머니들에게 주는 상이다.

김씨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두 딸과 살기 위해 소설과 번역서를 펴냈고, 지난해 가을 위암 말기 판정을 받기 직전까지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했다.

김씨의 빈소는 녹색병원 장례식장 특1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 오전 9시다.

▲ 24일 오후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은숙씨 빈소에서 임수경씨가 고인의 넋을 기리며 헌화를 하고 있다. ⓒ 유성호


▲ 24일 오후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은숙씨 빈소에서 임수경씨가 분향한 뒤 슬퍼하며 분향소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 24일 오후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은숙씨 빈소에서 추모객들이 고인의 넋을 기리며 묵념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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