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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하기 가장 쉬운 교도소, 여기겠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34] 상인동과 화원읍 일원

등록|2011.06.21 14:57 수정|2011.06.21 14:57

▲ 진천 고인돌 ⓒ 정만진


달서구는 인구가 60만을 넘는 '큰' 기초자치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달서구를 둘로 나눈다. '한쪽은 월배, 다른 한쪽은 성서' 식이다. 상인동, 진천동, 대곡동으로 대표되는 월배 쪽은 밖으로 나가면 경상북도 고령읍에 닿고, 용산동, 이곡동, 장기동으로 대표되는 성서 쪽은 경상북도 성주읍에 닿는다. 그만큼 달서구는 광활하다.

그러므로 달서구는 그 자체만 순회하는 것보다는 고령으로 가는 길과 성주로 가는 길로 나누어서 답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 두 갈래 대도로가 달성군을 또 다시 두 지역으로 크게 나누기 때문이다. 물론 신도시 개발지인 성서 일대에는 역사의 자취가 별로 없으므로, 답사 여행의 목적에 한정해서 보면 달서구의 중심이 상인동 쪽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달서구를 지나 달성군까지 아우르는 답사 여정은, 비슬산 일원은 별도로 하고, 셋으로 대별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1) 달서구 상인동 일원(태극단 기념비, 월곡역사박물관, 진천 고인돌)- 달성군 화원읍 일원(화장사 고인돌, 상화 묘소, 화원동산, 인흥서원, 문씨세거지)
(2) 달서구 성서 일원(2.28기념탑, 계명대 박물관, 신당동 석장승)- 달성군 하빈면 일원(이윤재 묘소, 삼가헌, 육신사)
(3) 달성군 옥포면 일원(용연사)- 논공읍 천황당- 현풍읍(향교, 석빙고)- 달성군 구지면 일원(도동서원, 홍의장군 묘소)

오늘은 (1)의 여정을 답사하려 한다. (1)의 여정은 서부정류장을 거쳐 달서구 관내로 진입하면서 시작된다. 이 여정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역사의 현장은 1973년 12월에 건립된 '태극단 독립운동 기념탑'이다. 상원고등학교 야구장 뒤 도로변에 있는 이 탑은 대구상업학교(상원고 전신) 학생들이 일제 식민지 폭압에 처절하게 저항했던 불굴의 민족의식을 기념한다. '일군(日軍) 입대를 거부하고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지 말자'는 호소문을 살포한 36명의 학생은 1943년 5월 9일 비슬산 약수터에 모여 태극단을 결성하지만 결국 피체, 고문 끝에 죽고 중상을 입는 등 처참한 탄압을 받는다. 그 현장을 달서구 답사의 출발지로 삼는 것이다.

▲ 대구상고 태극단 기념비 ⓒ 정만진



상원고 맞은편의 대구지하철공사 왼쪽 도로로 200m 가량 들어가면 월촌APT단지 아래에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월곡역사박물관은 임란 당시 약관 24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종전 직후 국가적 논공행상에서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과 함께 1등공신으로 인정을 받을 만큼 맹활약을 펼쳤던 우배선 장군을 기려 세워졌다.

월곡은 우배선 장군의 호로, 월곡역사박물관 일대는 소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다. 공원 안에는 주인이 죽자 사흘 동안 울기만 하며 먹기를 끊더니 이내 목숨을 거둔 장군의 말을 기념하는 의마비가 특히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의병장 월곡 우배선 선생 창의 유허비와 장군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 월곡 역사박물관 ⓒ 정만진



이 길에는 대구 전체를 답사할 때에도 결코 빠뜨리면 안 될 중요한 방문지가 있다. 바로 민족시인 이상화의 묘소이다. 그런데 찾기가 묘하다. 알고 보면 쉬운 길이지만, 이정표도 없고 대로변도 아니어서 지나치기에 아주 십상이다. 누구에게 물어도 별로 시원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가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앞산순환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길(상화로)과 상인동에서 화원으로 뻗치는 대로가 마주치는 네거리를 진천4거리라 한다. 상인동에서 온 길이라면 직진하여 오르막을 오르다가 대원고등학교 가기 직전 육교 아래에서 유턴을 하여 오른쪽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만약 상화로를 달려왔다면, 진천4거리 직전에서 유턴을 한 다음 래미안 아파트를 바라보며 우회전을 하면 된다. 동네 안을 휘젓는 그 두 도로는 200m 가량 진입했을 때 결국 만나서 한 길을 이룬다. 그 작은 골목안 네거리에서 다시 200m 가량은 줄곧 오르막길이다. 그 오르막 꼭지 지점까지 가서 왼쪽 산비탈을 힐끗 바라보면 소로가 아스라히 드러난다. 그 길은 일반인의 차량이나 등산로로 개설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이씨 문중의 산소까지만 이어진다. 상화의 묘소는 그 안에 있다.

▲ 민족시인 이상화의 묘소(왼쪽은 그의 형인 이상정 독립군 장군의 묘소) ⓒ 정만진



상인동을 떠나 화원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두 곳의 고인돌 유적과 만나게 된다. 하나는 진천동에 있고, 다른 하나는 대구교도소 뒤편에 있다. 물론 진천동 유적지는 상화 묘소 가기 훨씬 이전에 있으니 답사를 하려면 그 전에 들러야 한다.

고인돌은 진천동의 것보다 대구교도소 뒤편, 즉 화원 화장사 담장 안팎의 것이 훨씬 더 강렬하게 아이들의 구미를 잡아당긴다. 우선 그 덩어리가 훨씬 크다. 그리고 숫자도 많다. 게다가 절 건물과 어우러져 한데 뒹구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득한 옛날에는 샤머니즘의 중요 무대였던 곳이 세월이 흐르자 사찰 경내로 변한 것이니, 어찌 생각하면 종교의 발달사를 엿보는 기분도 든다.

화장사 안팎의 고인돌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사찰과 교도소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화장사 안으로 들어가 대웅전 옆으로 가면 어른 키만한 고인돌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김장철에 찾아가면 신도들이 고인돌 사이사이에 앉아 배추를 다듬고 간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저 아득한 청동기 시대를 보는 것만 같아 재미가 쏠쏠하다.

화장사 담장 너머가 바로 교도소이다. 종교 시설과 감옥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고인돌이 그 두 시설에 걸쳐 이어져 있는 것 또한 잔뜩 흥미를 돋우어 준다. 교도소 철망 아래에 고인돌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저 철망이 없으면 고인돌을 밟고 탈옥을 할 수도 있겠다' 같은 엉뚱한 상상력이 발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화장사에서 고인돌을 타고 담장을 넘어 길 건너편 교도소 담장 아래의 고인돌로 옮겨갈 수도 있다.

▲ 화원 화장사 고인돌 ⓒ 정만진


▲ 화원 고분군 ⓒ 정만진


상화 묘소를 둘러본 뒤 화원 읍내로 나오면 경북 고령군 다산면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과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의 경계선이 되는 사문진교에 닿는다. 사문진교 건너기 직전 오른쪽의 작은 야산 일대가 '화원동산'이다.

화원동산에는 아직도 동물원이 있다. 한때 아이들의 폭발적 인기를 모았던 동물원이지만 지금은 쇠락하여 존재감을 많이 잃었다. 그래도 신라 경덕왕이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답게 화원동산에는 고분군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 화원 일대가 아득한 옛날 대구 지역의 강력한 세력지였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곳의 고분군은, 대가야의 힘이 점차 왕성해지자 화원의 군장이 위기를 느끼고 달성으로 물러난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화원동산이 지닌 색다른 미덕 두어 가지를 소개해야겠다. 첫째, 화원동산을 방문한 날 마침 운이 좋으면 대낮에 창공을 날아다니는 '인간새'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둘째, 멀리 앞산의 뒷면 풍경이 그 어디보다도 뚜렷하게 조망된다. 셋째, 노을이 질 무렵에는 사문진교와 낙동강물 위로 흐르듯 저물어가는 황혼의 빛깔도 감상할 수 있다.

그래도 화원동산이 답사자에게 주는 가장 뛰어난 선물은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면서 창조해낸 달성습지의 장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물론 이제는 화원동산 정상의 전망대에 올라본들 한때 우리나라 5대 자연습지로 각광을 받았던 달성습지의 반사 상태만 확인될 뿐이다.

운하와 낙동강 개발 논리의 지뢰에 걸려 반쯤 사망한 습지의 실상을 목격하는 안타까움에 눈물겹다는 말이다. 그래도 '고인의 마지막'을 지킨 자식과 그렇지 못한 자식의 차이는 그리 간단히 간과할 일은 아니다. 지금도 거대한 덤프트럭들은 습지를 뭉개면서 낙동강의 목을 짓밟고 있는데, 어찌 그 마지막을 눈물 속에서라도 지켜보지 않으리.

화원동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달성습지 방면 풍경(왼쪽의) 낙동강 물줄기와 (오른쪽의) 금호강 물줄기가 만나고 있는 사이로 덤프트럭들이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 ⓒ 정만진


사문진교를 넘어가면 경북 고령이다. 대구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여행이라면 이제 발길을 돌려야 한다. 화원읍에도 아까 지나온 상화 묘소만이 아니라 들러야 할 곳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흥서원, 문씨세거지 등이 바로 그런 곳들이다.

인흥서원과 문씨세거지는 도랑을 마주 보고 서로 건너편에 있다. 그런데 이 두 답사지는  '옷깃을 스치는 인연' 정도가 아니라 밀접한 상관 관계를 가진 사이이다. 그것을 증거하는 유물이 바로 문씨세거지의 담장 바로 앞밭에 버려진 듯 남아 있는 인흥사지 3층석탑이다.

이곳은 본디 인흥사라는 절이 있던 장소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사찰이 모두 불에 타 없어져 버리자 문씨 문중이 그 절터에 마을을 형성하여 대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마을 이름까지도 '문씨 세거지'로 굳었다.

인흥서원은 명심보감 판본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름높은 서원이다. 이곳의 명심보감 목판본 31매는 국내의 다른 판본들에 비해 용어 구사가 정확하고 오자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율곡 등 고명한 유학자들의 서문과 발문도 실려 있어 뛰어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판본의 편자는 고려 충령왕 때의 대유학자 추적(秋適, 1246-1317) 선생이다. 인흥서원은 그의 20대손 추세문이 세웠다.

▲ 인흥서원 ⓒ 정만진



인흥서원에서 바라보면 문씨세거지가 지척에 보인다. 나무에 가려 인흥사지 3층석탑까지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문익점의 9세손 문세근이 정착한 이래 지금껏 남평문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룬 채 살고 있다. 수십 채의 고가들이 보여주는 뚜렷한 몸채가 장관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사찰은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 답사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지만, 서원을 비롯한 한옥들은 빈 채로 방치되고 있거나, 심지어 무너져 자취를 감춘 곳이 더 많은 실정이다. 건축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사람이 거주하느냐 아니냐 하는 차이로 본다.

사찰에는 스님들이 기거하고 있는데다, 종교시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서원과 한옥 고가들은 관리인이 한 명 있거나 아니면 전무한 실정으로 버려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한옥 고가들이 황폐화의 벼락을 맞게 된 것은 필연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곳 문씨세거지는 다르다. 임진왜란 이후 지금까지 줄곧 수십 채 가옥에 사람들이 거주해 왔다. 인수문고(仁壽文庫)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1만여 권의 장서와 문중 보물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큰 서고까지 지어 마을사람들에게 도서관 역할도 담당 하고 있다.

문씨세거지에는 손님도 맞고 일족 회의도 열었던 수봉정사와, 학문과 수양의 요람이었던 광거당도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지만, 인수문고는 그 독특한 품격에 힘입어 더욱 뛰어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문씨세거지가 비바람 속에 버려진 채 풍찬노숙하고 있는 다른 곳의 한옥들처럼 하루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질 것인가.

오늘도 문씨세거지의 고가들은 나날이 새롭게 빛을 반짝이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꿈은 장자의 나비꿈에 그칠 수밖에 없는 짧고 허망한 운명을 맞이하겠지만.

▲ 문씨세거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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