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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엔 좀 애매한' 만화, 근데 왜이리 짠하냐

[리뷰] 대한민국 청소년의 우울한 현실, 웃음으로 승화한 최규석

등록|2011.05.27 11:21 수정|2011.05.27 11:21
내가 어른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내가 겨우 삽 한 자루 가진 사람들을 향해 왜 저깟 산 하나도 옮기지 못하느냐는 터무니없는 책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 깨달았다. 아이가 세월만 흐르면 되는 게 어른이란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실 어른은, 아니 어른도 별 힘이 없다.
-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 중에서 

취재를 필요로 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 가끔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만나거나, 혹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그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듣는 한마디가 있다. 바로 '아저씨'라는 호칭이다. 물론 그 '아저씨'가 원빈 주연의 영화 속 '아저씨'와는 사뭇 다른 '아저씨'이기 때문에, '아저씨' 소리를 듣는 필자(20대 아저씨)의 기분은 썩 유쾌하지 못하다. 웃기엔 좀 애매한 기분이랄까. 그래도 어릴 적에는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었는데….

작가 최규석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원주민>과 <습지생태 보고서>를 통해 어느 정도 개인적인 신뢰가 생겼다. 그 신뢰라는 것은 그가 집필한 만화라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볼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울기엔 좀 애매한>은 이름부터 좀 애매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작가 최규석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울기엔 좀 애매한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 표지 ⓒ 사계절


<울기엔 좀 애매한>은 가난한 미술학원 입시생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돈'을 둘러싼 가난과 소외의 코드가 빠지지 않는다. 물론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유머다.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능력은 발군이다.

학원비를 제때 내지 못하는 아이, 등록금이 없어 재수를 준비하는 학생, 학원비 마련을 위해 술집에 나가는 여학생, 그리고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돈으로 맞바꾸는 나쁜 선생까지. 미술학원 안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역시나 그 중심에는 마지막 양심을 지키며 아이들과 어울리려는 '태섭 선생'이 존재한다.

어쩌면 태섭 선생이라는 존재는 최규석 작가 본인의 투영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울기엔 좀 애매한>은 작가가 미술학원에서 대학입시 만화 강사로 일했을 때 마주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우울한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보지 않으면 나았을 테지만 매일같이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는 상황을 겪고 나니 그들을 위해, 아니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내가 퍼부었던 비난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내가 가진 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만큼을.
-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 중에서

울기엔 좀 애매한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 중에서... ⓒ 사계절


그러니까 결국 <울기엔 좀 애매한>이라는 만화는 어른이 된 만화가 최규석이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 행동으로 보인 결과물인 것이다.

불평등한 삶의 조건을 버티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이들의 현실을 만화라는 장르와 유머라는 장치의 결합을 활용해 사실적으로 고발함으로써,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어른'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0교시', '국제중', '자립형 사립고', 그리고 '반값 등록금'이라는 키워드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았건만, 아직은 '어른'과 '아저씨'라는 호칭이 어색하기만 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만났던 학생 누군가는 나에게 '산'을 옮겨주길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 그 학생도 어른이란 결국 삽 한 자루를 가진 힘없는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까. 

비록 영화 <아저씨>의 원빈만큼 멋진 아저씨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지 않도록, 학생들을 만났을 때 당당할 수 있도록, 내가 가진 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어쩌면 이 글이 '삽 한 자루'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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