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20대 중반 '모델녀'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렸네

지하 생활자의 비애... 나도 '땅 위의 사람'이 되고 싶다

등록|2011.06.03 19:00 수정|2011.06.03 23:11

▲ 반지하 주택의 창문.(자료사진) ⓒ 최병렬


여름이 왔다. 이제 장마와 무더위, 휴가와 태풍이 순서대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은 다르겠지만, 나 같은 '지하 생활자'에게 여름은 그야말로 악몽의 계절이다.

이 지하 전세방으로 이사를 온 것은 지난해 2월. 회사 가까운 곳으로 오려고 방을 알아봤지만, 서울 하고도 마포에서 사회 초년생인 내가 가진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방은 옥탑방과 지하방밖에 없었다. 천장 높이가 2m도 안 될 것 같은 옥탑방 한 곳과 신축 건물의 지하방 가운데 고민하다, 그래도 신축 건물이 깨끗하고 좋아 보여서 이 지하방을 택했다. 물론 그때는 겨울이라 이곳의 여름이 어떨지는 상상도 못했다.

겨울과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지하라 여름에 시원해서 좋다고 생각하며 지낸 게 며칠. 장마와 함께 악몽이 시작됐다. 방 한가득 들어차는 습기와 구석구석 피어나는 곰팡이는 사소한 문제였다. 진정한 공포는 바로 '침수'. 한강과 가깝다는 것은 산책하기 좋다는 점에서 장점이었지만, 그만큼 지대가 낮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비가 올 때마다 집 앞으로 콸콸콸 흐르는 물줄기는 언제나 저승사자의 등장음악 같았다.

비만 오면 공포... 지하 생활자의 비애

집이 침수돼서 주민이 울상을 하고 집 안에 들어온 물을 퍼내는 장면이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올 때마다, 그게 언젠가는 내 모습이 될 것 같았다. 비만 오면 어머니 산소가 떠내려갈까 봐 개굴개굴 잠 못 자고 울어대는 청개구리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비가 좀 많이 온다 싶으면 점심시간에 잠깐 집에 와 보기도 했고, 아침저녁으로 지상 주차장 쪽에 있는 배수구가 막히지는 않았나 확인했다. 빗물에 밀려온 흙이 배수구를 막고 있으면, 비를 맞고 앉아서 손으로 뚫었다.

▲ 지난해 추석연휴인 9월 21일, 갑작스럽게 서울과 경기 지역에 내린 폭우로 광화문 근처 도로가 물에 잠기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사진은 '광화문 견인차들이 도착해 물에 잠긴 차들을 한 대씩 견인하는 중' (3755님이 엄지뉴스에 전송해주신 사진입니다) ⓒ 3755


작년 추석은 공포의 절정이었다. 추석 전날 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텔레비전 뉴스에서 서울에 큰 비가 내려 광화문광장이 어른 무릎 높이만큼 물에 잠겼다고 했다. 또 주택가 곳곳이 침수됐다고 하면서 으레 '그런' 장면들을 보여줬는데, 이런 우리 동네였다! 화면 아래로 흐르는 자막에 우리 동네, 옆 동네, 윗동네, 아랫동네 등 아무튼 우리 집 둘레 동네 이름이 다 나왔다.

혼이 쏙 빠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빨리 집주인한테 전화해 보라고 하셨지만, 집주인은 그냥 집세 받다가 집값 오르면 금방 팔아치우려고 산 사람이었다. 동네 아는 사람에게 한번 가 봐 달라고 부탁하려 해도, 명절이라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걱정돼서 "저거 방 얻을 때 돈 보태 주고 땅 위로 얻으라 할걸"하고 울먹거렸다. 결국 그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다음 날인 추석 아침 차례를 지내자마자 서울로 올라왔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면서,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었다. 고향에서 집을 구했으면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 2층을 얻고도 남을 돈으로 서울에서는 지하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한다니.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아등바등 이런 도시에 '삐대고' 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마음을 비우고 집에 와 보니... 아, 멀쩡했다. 문 앞 신발 벗는 곳에 살짝 물기가 비치는 정도였다.

정말 다행이었지만, 허탈하고 비참한 마음이 들어 옷도 안 갈아입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맛도 다 못 본 명절 음식들이 생각났다. 명절이라 식당도 다 문을 닫았는데, 어디 가서 점심을 먹어야 하나. 떨어져 사는 가족들이 다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어야 할 명절에, 나는 편의점 도시락을 사서 지하방에서 혼자 먹었다. 엄마한테 방은 무사하다고 전화를 했지만, 내 마음은 무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올여름을 앞두고 결단을 내렸다. 계약 기간이 아직 9개월이나 남았지만, 중개 수수료를 물더라도 이사를 하기로 말이다. 5월 초에 부동산에 방을 내놓았다. 이 방을 빼고 새 방을 구하면 중개 수수료로만 40만~50만 원쯤 깨지겠지만, 그 돈을 잃더라도 장마철이 오기 전에 반드시 땅 위로 올라가겠다고 다짐했다.

방 구경도 않고 떠난 '모델녀'

바로 집을 보러 오겠다는 연락이 와서 다음 날 저녁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 와서 서둘러 청소도 하고 가구를 옮겨서 곰팡이 핀 곳을 절묘하게 가렸다. 도착했다는 부동산 아줌마의 전화를 받고 집 앞으로 나가 보니, 오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모델처럼 예쁜 여자가 아줌마랑 같이 와 있었다. 앞장서 건물 현관으로 들어와 지하로 가는 계단을 대여섯 발짝 내려갔는데, 아줌마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지하였어요? 저는 4층인 줄 알았어요!"

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상하게, 화가 나기보다는 창피했다. 현관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모델녀'의 표정이 '어우,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 하는 것만 같아서 정말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그냥 "예. 가 보세요, 그럼" 하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 뒤로 3주. 아무도 집을 보러 오지 않았다. 태풍이 하나 둘 올라온다는 소식도 들리고 올 장마는 더 길고 '빡쎌' 거라는 예보도 나온다. 옆 방 아저씨는 아무리 비가 오고 배수구가 막혀도 "설마 잠기기야 하겠습니까" 하면서 속 편하게 잘만 사는 걸 보면, 확실히 내가 겁이 많아서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두렵다. 값나가는 세간붙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매일 하루를 끝맺고 또 시작하는 이곳이 잠깐이라도 물에 잠긴다는 것은 단순히 물적 피해로 집계될 수 없는 무거운 절망을 몰고 올 것 같다.   

6월 중순이면 장마가 시작할 것이다. 과연 나는 그전에 이 '궁상'과 이별하고 '땅 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차, 갑자기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이따위 우중충한 글을 읽으면 어느 누가 이 방에 들어오려고 할까. 이사 가기는 글렀구나.
덧붙이는 글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