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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라는 조미료가 빠져 있군요

'스모노'의 일인자, 대구 향촌동 목로주점 할매집이 그립다

등록|2011.05.31 16:51 수정|2011.05.31 17:47

스모노여름에 먹기 좋은 초무침. 돼지고기 편육을 달짝지근하게 장조림한 것에다 곤약, 오이, 양파 등을 겨자 양념에 함께 무친 일본 음식이다. ⓒ 조을영


시간이 멈춘 듯 옛 건물이 많은 대구 '진골목'. 그 초입에 작은 일본 분식점이 하나 있다. 1953년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연 가게의 이념을 이어받아 그 며느리가 몇 년 전에 장사를 시작한 곳이다. 간판에는 분식점이라 돼 있는데 웬 노인 손님들이 이렇게 많을까 싶다. 이곳은 여고 앞 분식점 같은 곳이 아니다. 아는 사람만 찾아드는 이 가게는 전통 일본식이라기엔 다소 가볍고, 완전 분식이라기엔 조금 묵직한 음식이 나온다.

주력 메뉴는 간장으로 맛을 낸 시나면, 된장으로 맛을 낸 미소면, 여름날의 메밀소바, 손으로 직접 두드린 옛날식 돈까스 등이다. 그중 가장 특이하고 요즘 계절에도 잘 맞는 메뉴로는 '스모노'라는 것이 있다.

'초무침'이란 뜻의 일본 여름 음식인데, 돼지고개 냉채, 얇게 썬 오이와 양파를 겨자에다 섞어 버무려낸 것이다. 톡 쏘는 화한 느낌은 홍어회에 비할 만하고 입에서 부드럽게 감기는 고기 장육은 촉촉함을 잃지 않는다. 첫 맛은 달큼하다가 차츰 코로 치고올라오는 겨자의 알싸한 향에 코가 뻥 뚫린다. 술안주로 좋아서 주당들이 많이 찾는 메뉴기도 하다.

스모노대구 향촌동의 스모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그 향수를 달래려고 이제 진골목으로 몰려들고 있다. ⓒ 조을영


사실 이곳의 오밀조밀한 현대식 스모노는 최근에 좀더 알려진 것이고, 몇 년 전만 해도 그 일인자가 따로 있었다. 향촌동 목로주점 '할매집'이 바로 그곳이었다. 소머릿고기를 넣어서 진득하고 터프한 비쥬얼을 자랑하는 할매 스모노는 늙고 귀멀어서 손님의 주문도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이월분 할머니의 인생이 어우러진 음식이었다(현재는 폐업을 해서 그 강렬한 비주얼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음이 아쉬울 뿐).

식민지 시절, 할머니는 권씨 성을 가진 사내에게 시집을 갔다. 이후 태평양전쟁 때 남편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할머니도 따라가서, 그곳 식당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스모노를 배워왔다.

향촌동에 있던 전국 최초의 음악감상실 '녹향' 아랫층에 터를 잡은 할머니는 예술가들과 울고 웃으며 한 시절을 보냈다 한다. 가게는 피난 온 예술가들이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시국을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소였다. 외상 술을 주고 받지 못한 돈도 부지기수였지만 그 또한 사람 사는 정이 아닐런가 하면서 말이다.

2년 전까지 이월분 할머니는 막걸리 한 주전자와 스모노, 각종 해물과 고기 양배추 말이와 오뎅이 들어간 오뎅탕을 술꾼들에게 차려주며 향촌동의 한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 술 더 좀!" 하고 불러도 노년으로 귀가 조금 멀어 있던 할머니는 그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묵묵히 주방일을 하면 손님들이 셀프로 가져와야 했다고.

스모노 속에 든 고기 편육돼지고기를 간장과 설탕으로 달달하게 양념해서 겨자 양념에 머무린 돼지고기 스모노. 살고기는 부들하고 근육 부위는 쫄깃한 식감을 자랑한다 ⓒ 조을영


할머니의 가게는 이제 없다. 삶은 소머릿고기의 근육과 살코기가 적당히 어우러지게 동강동강 썰어서 미역, 양파와 함께 겨자 소스를 듬뿍 섞어 무쳐내는 할머니표 스모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할머니가 떠나간 빈 골목을 오늘도 헤맨다.

그 맛을 못 잊어 진골목 인근에서 비슷한 메뉴를 내놓는 집들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백고동, 삶은 문어, 오징어, 조갯살 등으로 해물 스모노를 만드는 집도 있지만, 할매집의 꼬들한 소머릿고기와 미역이 줄줄 딸려 올라오는 스모노에는 비길 바가 못 된다는 것이 대다수의 이야기. 그건 음식 속에 배어 있는 '이야기'라는 또 하나의 조미료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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