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병역명문가로 뽑혀 기뻤는데 자식들은 별 반응 없데"

[인터뷰] 병역명문가 장서규씨

등록|2011.06.06 14:58 수정|2011.06.06 15:02

▲ 장서규씨가 자신의 군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 김상기



"자랑스럽다기보다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지. 그래서 아들이나 손자들한테도 군대는 꼭 현역으로 다녀오라고 했어. 작년에 병무청이 병역명문가로 우리 집안을 뽑아준다고 해서 난 좋아했어. 국가가 인정해주는 거니까. 근데 손자들은 별 반응이 없데. 아들도 그렇고. 아, 세상이 바뀌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

병무청이 3대가 모두 현역복무를 성실히 마친 가문을 대상으로, 지난 2004년부터 역점사업으로 매년 추진해오고 있는 병역명문가 선정작업이 올해로 8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전북지역에서는 2005년 4가문, 2006년 1가문, 2007년 3가문, 2008년 6가문, 2009년 3가문, 2010년 8가문 등 총 25가문이 선정된 상태다. 4일 전주시내에서 만난 장서규(78)씨 의 집안도 병역명문가다. 장씨는 6.25전쟁 휴전협정이 막 이뤄진 1953년 8월 해병대 31기로 입대했다.

▲ 지난해 병역명문가 인증서 수여식 장면. 왼쪽부터 손자 장문수, 본인, 아들 장옥영 ⓒ 김상기



장씨 집안은 아들과 손자까지 11년이 넘는 총 135개월을 군에서 현역으로 보냈다. 1대 장서규(해병·55개월 복무), 2대 장옥영(육군·31개월 복무)과 장기문(육군·2개월 복무·순직), 3대 장인수(육군·24개월 복무)와 장문수(육군·23개월 복무)씨가 그렇다. 둘째아들 장기문씨가 복무 중 사망하지 않았다면 14년 가까운 세월이 된다.

장서규씨가 근무하던 당시는 휴전이 조인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전쟁이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장씨는 "진지 앞에 임진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강을 사이에 두고 긴장감이 심했다"며 "저쪽에서 인민군이 육성으로 소리를 지르면 여기서도 그대로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고 회고한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런 군 복무기간 중 휴가는 단 세 번뿐이었다. 첫 번째 휴가는 입대 36개월 만이었다. 경기도 파주에서 근무하다 집에 까지 오려면 이틀이 걸렸다. 다시 돌아가는데도 이틀. 휴가기간 열흘 중 완행열차 타는데만 사흘을 소모하던 시대였다.

두 번째 휴가는 결혼식 때문이었다. 결혼 전 딱 한번 만난 지금의 부인과 휴가 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나머지 한 번은 제대하기 전 말년휴가.

군 생활이 그렇게 어려웠음에도 장씨는 장기복무를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7형제 중 장남이라는 상황은 그를 다시 사회로 불러들였다. 장씨는 "아버님이 병들어 아프고, 동생들 수두룩한데 혼자 좋자고 군에 계속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며 "오랜 기간 군 생활 한 사람들 보면 부러웠고, 장남만 아니었어도 아마 난 군인으로 살아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아들의 순직은 지금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아들은 1980년 논산훈련소에서 교육받고 강원도 화천에 배치됐다. 하지만 얼마 후 완전군장 구보 중 심장마비로 그해 5월 20일 사망한다. 장씨는 "거짓말 같았고, 믿을 수가 없었다"며 그때의 슬픔을 토로하면서도 "국가의 잘못보다는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나한테도 책임이 있으니, 나라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했다.

장씨는 현재 완주군 경천면에서 완주군독립기념관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부친 장병구(1897-1983) 독립유공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보훈처의 협조를 얻어 개인이 설립한 기념관이다.

장씨는 "부친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내 아들과 손자들도 모두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다 해야된다고 생각한다"며 "국가도 우리같은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