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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해주는 아줌마' 장은경의 희망노래

[서평] '작은 평화의 집' 장은경 원장의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등록|2011.06.07 08:29 수정|2011.06.07 08:29
"누구 뭐래도 / 첫사랑은 너야. / 알고 있지. / 얼마나 /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 내 가슴이 까맣게 해바라기 씨로 여물어 / 날마다 우수수 쏟아지는 걸. / 보고 싶다. / 아가야. / 나의 첫사랑아." - '첫사랑' 전문

가슴 뭉클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그 기억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사랑이라면 시간의 흐름은 별 의미가 없다. '첫사랑'이라는 시를 처음 접했던 그 날 역시 가슴 속에 아련히 새겨진 기억들 중 하나다. 빛은 바랬지만 볼수록 선명해지는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 지난 2005년 11월 26일 경기도 이천에서 열렸던 시집 <둥기둥기 둥기야> 출판기념회에서 장은경 원장이 어머니와 개그맨 김은우 씨 등과 함께 케잌의 촛불을 끄는 모습. ⓒ 최육상


지난 2005년 11월 26일 시집 <둥기둥기 둥기야>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경기도 이천 현장. 장애인 공동체 '작은 평화의 집'을 꾸려가던 장은경 원장은 먼저 떠나보낸 장애아이를 떠올리며 자신의 시를 직접 읽어 내렸다. 순간, 현장은 눈물 콧물 범벅의 바다로 변했다. 춤과 노래로 기념회를 함께 빛냈던 장애우들은 물론이고 수녀님과 스님, 여러 손님들은 가슴에서부터 북받쳐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런 출판기념회가 또 있을까. 그 날 이후 애써 그 때 기억을 들추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떠오르던 눈물바다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간 5월 어느 날, 장은경 원장이 새로 펴 낸 에세이집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를 보내왔다.

"함께 보듬고 살아온 시간들, 떠나보낸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남은 가족들과의 아름다운 동행, 그리고…."

책 제목 아래 작은 글씨로 써 있는 글귀를 보니 책 내용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서른 즈음 '작은 평화의 집'을 꾸렸던 장은경 원장은 어느덧 오십 줄에 들어섰다. 이십여 년간 눈물로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아이들은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녀 역시 소아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1급 장애인이지만 아이들의 끼니를 챙기면서 최근에는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밥해주는 아줌마'라 부른다.

밥해주는 아줌마, 장은경의 희망 노래

"가만히 먼 산을 보면 / 그리움이 산보다 높고 / 가만히 강물을 보면 / 또 그리움이 강물보다 깊고 / 홀로 있는 시간들은 오직 그리움뿐 / 아이들을 떠나보낸 뒤 생긴 / 멍한 동공 그 안에 무심하게 고이는 눈물들." - '다시 시작된 넋두리' 중

아이들을 향한 장은경 원장의 그리움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책을 통해 가슴으로 전해지는 울컥거림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순간의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12월 25일 주님 오시는 날 / 영진이는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제'일 수 있다면서 / 빨간 불꽃 속에 육신을 녹였다 / 그러나 우리는 안다 / 이미 아이는 육신이라는 껍질 밖으로 뛰어나와 / 우리들의 까만 슬픔을 /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 이제 아픔은 없겠지, / … /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 고맙다고, 고맙다고 고백을 하고 있겠지." - '사랑한다, 영진아!' 중

그러나 그녀에게 불쑥불쑥 속절없이 찾아드는 그리움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움은 남은 가족들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위한 것이지, 슬픔을 위한 것은 아니다. 시집 <둥기둥기 둥기야>도 그랬지만 이번 에세이집 역시 이별을 사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을 보여준다. 그녀가 책머리에서 스스로 고백했듯이.

"때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동반되는 이별 앞에서 / 밤낮없이 흐르는 눈물이 내 앞길에 큰 강을 만들기도 했지만 / 그러한 시련들이 무색하리만치 / 지금의 가족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사색도 절망도 모두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

이번에 들려주는 장은경 원장의 에세이에는 이별과 눈물, 아픔, 슬픔 등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2권의 시집과 장편소설 1권을 펴낸 바 있는 작가답게 그녀는 그 단어들을 결국 삶과 사랑, 희망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바꾸어낸다. 잔잔하게 마음을 울리면서도 머릿속에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되새기며.

"아픔! / 누구에게나 찾아오겠지. / 때론 어설픈 몸집으로 가슴을 치다 주저앉기도 하고 / 때론 서럽게 서럽게 떠나보내기도 하고 / 어느 때는 부단히 연단된 몸짓으로 일어서기도 하겠지. / … / 그러나 돌아보면 당연한 듯이 되풀이되는 감사의 기도 / 그 이유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서 몸을 움직이고 / 사색에 젖어 때론 절망하기 때문이다 / 사색도 절망도 고통도 기쁨도 모두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 '진구 이야기' 중

현재 '작은 평화의 집'에서는 열여섯 명의 장애우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아무 데고 똥과 오줌을 싸대는 아이, 평생 하는 거라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밖에 없는 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이, 욕을 하며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아이 등등 장은경 원장이 책에서 고백한 내용대로라면 '작은 평화의 집'은 단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을 터. 그러나 그녀는 그런 아이들을 통해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 사랑이야. / 사랑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무기지. / 내 어깨 위에 맡겨진 아이들 / 그들의 사랑으로 오히려 가벼워지는 삶 / 자신들의 세계가 어떤 세상의 풍요함보다 좋다는 아이들 / 그들의 아침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빛으로 열려 있고 / 순수한 말들이 쏟아내는 유머로 늘 웃음소리 떠나지 않지." - '행복한 우리집' 중

▲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책표지. ⓒ 푸른향기


'작은 평화의 집'에는 정말 행복이 넘쳐날까. 책장을 넘기는 동안 쓸데없는 질문이 계속 따라온다. 하지만 '작은 평화의 집'은 장애우 가족들만의 공간은 아니었음을 책 끄트머리에 가서야 깨닫는다. 이곳을 돕는 손길에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은 감동 그 자체다. 정성이 가득 담긴 사랑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1km를 걸어서 어느 날은 나물 보따리를 또 어느 날은 열무김치를 이고 찾아오는 '1km 박유심 할머니', 작고 낡은 오토바이에 10년이 넘도록 김장 김치와 쌀을 싣고 달려오는 '용설리 동네 오토바이 아저씨', 삯바느질로 모은 돈을 들고 1년에 두 번씩 찾아오는 '호주의 후원자' 등의 이야기는 사랑의 힘과 희망의 빛을 동시에 전해준다.

그리고 가족을 보살피는 총무 요한은 스무 살 무렵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이십여 년 간 장은경 원장과 함께 하며 장애우들의 삼촌이 되었다. 책에서 장은경 원장이 가장 고맙다고 한 이도 다름 아닌 요한 삼촌이다.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는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은 평화의 집' 이야기이다. 점점 가족이 해체되는 오늘을 살고 있는, 가족의 정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사는 이야기의 진솔함을 전해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장은경 지음, 푸른향기 펴냄, 287쪽,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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