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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앞에서 짝짜꿍~' 작곡가, 정말 모르고 살았네

<정순철 평전>을 받아 읽고

등록|2011.06.13 11:59 수정|2011.06.13 14:46

[정순철 평전] 표지초록색 바탕에 흰 책 제목, 중앙에 자리잡은 정순철 사진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옥천신문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기쁨은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 마치 전인미답(前人未踏)을 밟을 때와 같은 야릇한 기대감이 그 만남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분의 이름을 전에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건성으로 듣고 지나쳤습니다. 그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보름 전, 그의 평전을 받고서였습니다.

그는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않습니다. 6·25 때 납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잊혀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분입니다. 그가 작곡한 동요가 너무 생생하게 아직도 불려지고 있으니까요. 이름은 사라져도 노래는 남는 것인지요.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으로 시작되는 '짝짜꿍'과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의 '졸업식 노래'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노래입니다.

이 동요를 작곡한 분이 바로 정순철 선생입니다. 그가 1901년에 출생했으니까 아마 천수를 다 누렸다고 해도 지금 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6·25 전쟁은 우리에게 크나큰 굴레였습니다.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월북과 납북을 가리지 않고 북으로 간 사람들은 우리에게 기피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연구해서도 안 되고,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태어나 많은 일을 했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의 사회적 업적은 마치 유령의 것이기나 한 것처럼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이런 벽을 깨뜨리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충절의 고장 충북 옥천이니까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정순철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조용하지만 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2008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그의 기념사업회가 도종환 시인을 통해서 <정순철 평전>을 발간했습니다. 도 시인이 발로 뛰며 쓴 평전이어서 더 값지게 여겨집니다. 그의 생애를 생생하게 재구성해 놓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라는 것, 그가 방정환, 손진태, 윤극영 등과 함께 국내가 아닌 동경에서 1923년에 색동회를 창립했다는 것, 일제시대 어린이 운동이 소외받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운동이기도 하지만 모든 민족운동이 결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줄기차게 추진했다는 것, 그가 작곡하고 윤석중이 작사한 '짝짜꿍'의 처음 이름이 '우리 애기 行進曲'이었다는 것, 그가 동경음악학교에서 돌아와 몇몇 학교에 근무한 인기 있는 음악 교사였다는 것, 무엇보다도 인쇄술이 척박한 일제시대 때 <갈닢피리>, <참새의 노래> 두 권의 동요작곡집을 출간했다는 것 등의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자의적(恣意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당대에 또 역사에 끼친 영향은 그것대로 성실하게 평가해 주어야 하는 것이 후대 사람들의 예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데올로기라는 감옥에 갇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순철 선생도 그런 분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기념사업회에서 '평전'을 출간해 배포함으로써 그에 대해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 열어 놓은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죽어서도 돌아보는 이 없이 야인으로 묻혀 있는 사람들을 발굴해서 올바로 평가하고 역사의 수레에 동승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정순철 평전을 출간하는 데 애쓴 도종환 시인과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격려와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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