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데려온 낯선 남자, 내 인생이 달라졌다
[기획-8090이 그립다①] 카세트 라디오의 추억을 재생하다
때는 바야흐로 지금부터 30여 년 전. 이름 하여 추억의 8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와 보니, 엄마가 한 아저씨의 손을 잡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의 낯선 남자. 나는 괜스레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쭈뼛거리며 마루 끝에 앉았다. 아저씨를 너무나 반가워하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사우디에서 오신 할아버지야."
아빠와 비슷한 연배의 아저씨한테 할아버지라니? 얘기인즉슨,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의 어린 남동생이라는 것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할아버지는 자신의 누나, 즉 우리 외할머니에게 얹혀살았는데. 몇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우리 엄마와는 친동기간처럼 자랐다는 것이다. 물론 오빠가 아닌 외숙으로.
동네에 아버지가 사우디에 가 계신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 온 사우디 할아버지는 먼 나라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사회과부도 속 나라가 아닌 상상 속의 공간, 모래바람이 잠잠해지면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 얼굴을 내밀 것 같은.
젊은 할아버지는 요정을 데리고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가진 손녀에게 카세트 라디오를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테나를 뽑아보기도 하고, 버튼을 눌러 테이프를 꺼내보기도 했다. 양쪽에 달려있는 두 개의 스피커에 귀를 대보기도 했고.
"저 안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살아."
밤이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며 설레던 그 시절...
라디오 드라마를 즐겨 듣던 엄마는 어린 딸에게 장난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그 말을 믿을 나이는 지났지만 사우디에서 건너온 카세트 라디오는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무엇이든 손만 대면 망가뜨리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덕분에, 처음 몇 달간은 엄마의 감시망 안에서 카세트 라디오를 자유롭게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난 뒤, 라디오는 순순히 내 차지가 될 수 있었다.
밤이 되면 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음악 방송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커다란 괘종 시곗바늘은 왜 이리 더디게만 움직였는지. 가슴 조마조마하며 시그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초에 불을 밝혔다. 괘종시계가 정각을 알리는 순간, 마법처럼 시작되는 방송. 초와 음악과 사춘기 소녀의 두근거림. 그 음악방송의 디제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가수였다. 친구들이 말을 닮았다고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달콤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혼자만의 촛불 잔치를 벌였지만, 아침이 되면 엄마의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초를 가지고 노는 거야."
엄마의 눈에는 초를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로 보였겠지만 나는 흐르는 촛농을 보며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먼 나라를 꿈꾸며, 서툴지만 시를 쓰기도 했다. 그 시절의 감성이 지금 내가 동화를 쓰고, 라디오 원고를 쓰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이쯤 해서 이재성이 부른 <촛불 잔치>의 노랫말을 아니 살펴볼 수가 없다. 이재성은 1986년 KBS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해 <촛불잔치>, <내일로 가는 기차>와 같은 주옥같은 노래를 발표했는데, 유난히 동글동글한 얼굴에 촉촉한 눈빛이 인상적인 가수였다.
나의 작은 손에 초하나 있어 이 밤 불 밝힐 수 있다면
나의 작은 마음에 초하나 있어 이 밤 기도할 수 있다면
촛불잔치를 벌려보자 촛불잔치야
촛불잔치를 벌려보자 촛불잔치야
'나의 작은 손에' 초 하나 있는 밤. 그 촛불을 들여다보고, 좋아하는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주면, 나는 내일 시험이 있는 줄도 새카맣게 까먹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는 생략!
별밤지기 아저씨에게 일러바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렇게 카세트 라디오에 익숙해지면서 친구들 사이에 유행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공테이프에 친구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 주는 것. 공테이프 하나를 녹음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카세트 라디오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내가 원하는 곡이 그날 꼭 선곡이 되는 것은 아니라서, 귀를 쫑긋 세우며 듣거나 그도 아니면 방송국에 엽서를 띄워야 했다.
뒷날 풍문으로 들은 바로는, 당시 라디오 프로에는 하루에 몇천 통이 넘는 엽서가 쏟아졌다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미술 솜씨는 영 젬병이었던 나는 한 번도 엽서가 소개가 된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예쁜 엽서 대회에 뽑혀, 방송 출연까지 한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지금 이 자리를 빌려 별밤지기 아저씨에게 일러바쳐도 된다면 그때 그 친구 엽서는 미대 다니는 언니가 그려준 거였다고 말하고 싶다.
신청곡과 사연을 보내달라는 달콤한 목소리는 매일 밤 되풀이되는데 내 엽서는 한 번도 소개되지 않는다는 것, 그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그 시절 엽서를 쓰던 아이는 나중에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이젠 문자 게시판, 인터넷 플레이어, 스마트 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청취자 참여가 이루어진다. 바야흐로 시절이 달라진 것이데. 2002년부터 시작한 작가 생활 동안 예쁜 엽서를 받아보지도 못했다. 어떤 것이든 오기만 오면 뽑아줄 요량이었는데).
그렇다고 친구에게 줄 테이프 녹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서 원하는 곡이 나오면 나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빨간 녹음 버튼을 눌렀다. 아! 여덟 살 아래의 어린 남동생은 어찌하여 그때만 되면 말을 시켰던지. 나는 눈을 부라리거나 발로 동생을 툭툭 차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곤 했다.
여기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친구에게 남기는 메시지. 뭐,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거야> 이런 류였는데. 막상 지금은 소식이 끊긴 친구들이 많아 맘이 살짝 아프기까지 하다.
사우디에서 온 카세트 라디오, 나에겐...
그즈음 나의 촛불 잔치는 점점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강조하건대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 아니라(!) 촛불을 가지고 놀만큼 놀고, 할 만큼 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던 무렵, 나의 마음에 아이스크림이 들어왔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사랑이 담겨 있는 두 개만 주세요
사랑을 전해주는 눈을 감아요 행복을 느껴봐요
이 시간 둘이서 마음을 얘기해요
사랑스러운 나만의 그대여 언제까지 곁에 두고파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입맞추고픈 영원한 나의 사랑아.
미국도 아닌, 일본도 아닌 볼리비아에서 온 임병수라는 가수. 염소 창법의 놀랄만한 개성으로 등장한 가수는 나의 인기 가수 순위에서 단숨에 1위에 뛰어올랐다. '길을 걸으며'로 시작되는 경쾌한 리듬, 여름 방학 내내 몸을 비틀며 심심해하는 중학생에게는 마치 시원한 계곡물을 맞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을 두 개나 달라니! (이제 나는 아이스크림 한 개 두 개 먹고 배가 아플 나이가 아니란 말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곤 하는 남자 동창생들은 왜 그리 촌스런 남중생이 되었는지. 한때 날 설레게 했던, 영화 배우처럼 외자 이름을 가진 아이 역시도 그저 냄새나는 남중생이 되고야 말았는데.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을 들으면 영원히 입맞추고픈 나의 사랑이 아주 먼 나라에 꼭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과감히 여름 방학의 시간들을 이 노래의 외계어(?)를 외우는데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그 매뉴얼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카세트 라디오를 이용, 공테이프에 녹음을 한다. 당시엔 라디오만 틀면 이 노래가 나왔기 때문에 녹음하는 것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다.
다음, 노래 가사 받아 적기. 헌데 이 부분은 만만치 않은 난관이었다. 생전 처음 듣는 외국어에 염소 창법이니, Carino mio, somos dos (까리노 미오 소모스 도쓰)는 어떻게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는다고 해도 Navega libre Sin temor a naufragar (나베가 리브레 씬 떼모르 나우프라가르)는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카세트를 돌리고 또 돌리고 돌려야 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을 때, 나는 자랑스럽게 이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런데 사방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반 친구 중에 절반 이상이 이 노래의 가사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 애들은 나보다 훨씬 빨리 외웠을 테지만.
이렇게 사우디에서 온 카세트 라디오는 나에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한 곡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감성과 내면이 함께 자라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으니 말이다. 은빛 모래를 타고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을 오지 않았지만, 어찌 보면 카세트 라디오는 한 아이에게 더 귀한 선물이 되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감사해요.
"사우디에서 오신 할아버지야."
아빠와 비슷한 연배의 아저씨한테 할아버지라니? 얘기인즉슨,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의 어린 남동생이라는 것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할아버지는 자신의 누나, 즉 우리 외할머니에게 얹혀살았는데. 몇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우리 엄마와는 친동기간처럼 자랐다는 것이다. 물론 오빠가 아닌 외숙으로.
동네에 아버지가 사우디에 가 계신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 온 사우디 할아버지는 먼 나라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사회과부도 속 나라가 아닌 상상 속의 공간, 모래바람이 잠잠해지면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 얼굴을 내밀 것 같은.
젊은 할아버지는 요정을 데리고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가진 손녀에게 카세트 라디오를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테나를 뽑아보기도 하고, 버튼을 눌러 테이프를 꺼내보기도 했다. 양쪽에 달려있는 두 개의 스피커에 귀를 대보기도 했고.
"저 안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살아."
밤이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며 설레던 그 시절...
▲ 영화 <써니> 한 장면. ⓒ 토일렉 픽쳐스
라디오 드라마를 즐겨 듣던 엄마는 어린 딸에게 장난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그 말을 믿을 나이는 지났지만 사우디에서 건너온 카세트 라디오는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무엇이든 손만 대면 망가뜨리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덕분에, 처음 몇 달간은 엄마의 감시망 안에서 카세트 라디오를 자유롭게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난 뒤, 라디오는 순순히 내 차지가 될 수 있었다.
밤이 되면 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음악 방송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커다란 괘종 시곗바늘은 왜 이리 더디게만 움직였는지. 가슴 조마조마하며 시그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초에 불을 밝혔다. 괘종시계가 정각을 알리는 순간, 마법처럼 시작되는 방송. 초와 음악과 사춘기 소녀의 두근거림. 그 음악방송의 디제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가수였다. 친구들이 말을 닮았다고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달콤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혼자만의 촛불 잔치를 벌였지만, 아침이 되면 엄마의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이재성
엄마의 눈에는 초를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로 보였겠지만 나는 흐르는 촛농을 보며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먼 나라를 꿈꾸며, 서툴지만 시를 쓰기도 했다. 그 시절의 감성이 지금 내가 동화를 쓰고, 라디오 원고를 쓰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이쯤 해서 이재성이 부른 <촛불 잔치>의 노랫말을 아니 살펴볼 수가 없다. 이재성은 1986년 KBS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해 <촛불잔치>, <내일로 가는 기차>와 같은 주옥같은 노래를 발표했는데, 유난히 동글동글한 얼굴에 촉촉한 눈빛이 인상적인 가수였다.
나의 작은 손에 초하나 있어 이 밤 불 밝힐 수 있다면
나의 작은 마음에 초하나 있어 이 밤 기도할 수 있다면
촛불잔치를 벌려보자 촛불잔치야
촛불잔치를 벌려보자 촛불잔치야
'나의 작은 손에' 초 하나 있는 밤. 그 촛불을 들여다보고, 좋아하는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주면, 나는 내일 시험이 있는 줄도 새카맣게 까먹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는 생략!
별밤지기 아저씨에게 일러바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렇게 카세트 라디오에 익숙해지면서 친구들 사이에 유행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공테이프에 친구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 주는 것. 공테이프 하나를 녹음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카세트 라디오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내가 원하는 곡이 그날 꼭 선곡이 되는 것은 아니라서, 귀를 쫑긋 세우며 듣거나 그도 아니면 방송국에 엽서를 띄워야 했다.
뒷날 풍문으로 들은 바로는, 당시 라디오 프로에는 하루에 몇천 통이 넘는 엽서가 쏟아졌다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미술 솜씨는 영 젬병이었던 나는 한 번도 엽서가 소개가 된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예쁜 엽서 대회에 뽑혀, 방송 출연까지 한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지금 이 자리를 빌려 별밤지기 아저씨에게 일러바쳐도 된다면 그때 그 친구 엽서는 미대 다니는 언니가 그려준 거였다고 말하고 싶다.
신청곡과 사연을 보내달라는 달콤한 목소리는 매일 밤 되풀이되는데 내 엽서는 한 번도 소개되지 않는다는 것, 그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그 시절 엽서를 쓰던 아이는 나중에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이젠 문자 게시판, 인터넷 플레이어, 스마트 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청취자 참여가 이루어진다. 바야흐로 시절이 달라진 것이데. 2002년부터 시작한 작가 생활 동안 예쁜 엽서를 받아보지도 못했다. 어떤 것이든 오기만 오면 뽑아줄 요량이었는데).
▲ 제 라디오 사연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제 라디오 사연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자료사진) ⓒ 윤태
그렇다고 친구에게 줄 테이프 녹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서 원하는 곡이 나오면 나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빨간 녹음 버튼을 눌렀다. 아! 여덟 살 아래의 어린 남동생은 어찌하여 그때만 되면 말을 시켰던지. 나는 눈을 부라리거나 발로 동생을 툭툭 차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곤 했다.
여기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친구에게 남기는 메시지. 뭐,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거야> 이런 류였는데. 막상 지금은 소식이 끊긴 친구들이 많아 맘이 살짝 아프기까지 하다.
사우디에서 온 카세트 라디오, 나에겐...
그즈음 나의 촛불 잔치는 점점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강조하건대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 아니라(!) 촛불을 가지고 놀만큼 놀고, 할 만큼 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던 무렵, 나의 마음에 아이스크림이 들어왔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사랑이 담겨 있는 두 개만 주세요
사랑을 전해주는 눈을 감아요 행복을 느껴봐요
이 시간 둘이서 마음을 얘기해요
사랑스러운 나만의 그대여 언제까지 곁에 두고파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입맞추고픈 영원한 나의 사랑아.
▲ . ⓒ 임병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곤 하는 남자 동창생들은 왜 그리 촌스런 남중생이 되었는지. 한때 날 설레게 했던, 영화 배우처럼 외자 이름을 가진 아이 역시도 그저 냄새나는 남중생이 되고야 말았는데.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을 들으면 영원히 입맞추고픈 나의 사랑이 아주 먼 나라에 꼭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과감히 여름 방학의 시간들을 이 노래의 외계어(?)를 외우는데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그 매뉴얼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카세트 라디오를 이용, 공테이프에 녹음을 한다. 당시엔 라디오만 틀면 이 노래가 나왔기 때문에 녹음하는 것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다.
다음, 노래 가사 받아 적기. 헌데 이 부분은 만만치 않은 난관이었다. 생전 처음 듣는 외국어에 염소 창법이니, Carino mio, somos dos (까리노 미오 소모스 도쓰)는 어떻게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는다고 해도 Navega libre Sin temor a naufragar (나베가 리브레 씬 떼모르 나우프라가르)는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카세트를 돌리고 또 돌리고 돌려야 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을 때, 나는 자랑스럽게 이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런데 사방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반 친구 중에 절반 이상이 이 노래의 가사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 애들은 나보다 훨씬 빨리 외웠을 테지만.
이렇게 사우디에서 온 카세트 라디오는 나에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한 곡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감성과 내면이 함께 자라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으니 말이다. 은빛 모래를 타고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을 오지 않았지만, 어찌 보면 카세트 라디오는 한 아이에게 더 귀한 선물이 되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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