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등록금 핑계 삼아 한풀이 시위한다고?
[주장] 반값 등록금 <데일리안> 보도에 분노한 이유
지난 10일 금요일 저녁, 우리는 반값 등록금을 위한 대학생들의 집회에 나갔다. 평소 고등 교육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그 집회에 나갔고, 토론을 통해 각자의 문제 의식을 나누기도 하며 성심성의껏 집회에 임하였다.
다음날, 우리는 한 주요 포털 사이트 메인에서 <등록금 핑계 삼아 시위 목 마른 이들의 한풀이>(데일리안, 변윤재 기자, 6월 11일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 됐고, 그 기사에 우리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진지하게 집회에 참가했던 만큼 이런 사진과 헤드라인을 뽑아내는 그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주관적인 잣대를 동원해 최소한의 사실 관계마저도 왜곡하는 기자에게 실망했다. 이하는 우리가 왜 데일리안의 기사를 보고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실망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반값 등록금 촉구 촛불 집회에 진정성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등록금 핑계 삼아 시위 목 마른 이들의 한풀이>라는 기사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기사는 '반값 등록금 촉구 촛불 집회에 진정성은 없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데, 그에 대해서 크게 3가지의 근거를 들었다.
1. 정작 대학생들이 집회에 그다지 참가하지 않았고 대학생 이외의 정당, 시민단체들, 학부모, 노조 등이 참석했다. 2. 반값 등록금만이 아니라 최저임금인상, 서울대법인화중지, 야간노동금지 등의 표어가 나왔다. 여기까지는 기사를 작성한 변윤재 기자가 글로 쓴 부분이다. 그리고 기자가 글이 아닌 사진과 제목으로 말하는 부분이자, 이 기사의 핵심적인 부분인 3. '골빈' 대학생들이 선동 당해서 뭣도 모르고 즐기러 집회에 나왔다.
우선 기사의 최소요건인 사실관계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기사에서는"'조건 없는 반값등록금' 집회는 정작 대다수 대학생들의 외면 속에서" 치러졌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사를 아무리 찾아봐도 대학생들이 이 집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우리는 학생회 차원에서 집회 시위나 동맹 휴업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없다"는 "대학가의 전언"뿐이다.
이 전언이란 것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것도 명시되어 있지 않아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최 측 추산에 따르면 5만여 명(신문사마다 다르지만, 집회현장에서는 5만이라고 했었다)의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했고, 그들 중 대다수는 대학생이라는 점은 확인해 두고 싶다. 그리고 그 집회자리에는 수많은 학생회들이 함께했다는 점도 말이다(아래에 게재된 집회 당시 사진 한 장만 봐도 각 대학의 총학생회 깃발을 찾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재학 중인 연세대학교만해도 총학생회의 지도에 따라서 150여 명의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우리처럼 총학과 함께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하면 우리학교에서 참석한 학생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사실관계에 대한 이와 같은 지적이 이 기사를 작성한 변윤재 기자에게 실망한 유일한 이유가 아니다. 사실관계를 검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자로서 자격미달이기는 하지만, 사회·정치 분야를 다루는 기자가 보여주는 사고의 단순함은 우리에게 '기자가 이래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했다.
변윤재 기자는 이 집회가 대학생 이외의 정당, 시민단체, 노조 등이 참가했고, 집회의 구호가 반값 등록금을 지나쳐 생활임금과 같은 분야로 넘어갔기에 진정성 없는 정치적 선동에 의한 집회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 저변에는 반값 등록금이 대학생들에게만 한정된 문제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현재 반값 등록금 이슈가 무엇을 문제시 하고 있으며, 반값 등록금이라는 의제가 등록금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등교육 전반,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 전체의 사회구조의 문제와도 연관이 되어있음을 전혀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각은 사회학적 상상력, 혹은 사회학적 추론 능력을 담고 있지 않은 것이다.
현재 반값 등록금 요구에 대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반론 두 가지는 '1. 대학교육은 개인의 선택이다. 2. 한국에서는 대학 진학률이 너무 높기 때문에, 서구 선진국과는 다르게 등록금에 대한 지원이 힘들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반론은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높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경제구조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 사회로 변화해왔다. 즉,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해서 정년을 보장하고 평생 동안 고용하던 사회에서, 노동자를 젊을 때 비정규직으로 잠깐 쓰고 나이가 들면 다른 젊은 노동자로 대체하는 사회로 변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안정된 고용과 생활을 보장하는 '괜찮은 일자리'는 줄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함과, 낮은 임금을 견뎌야 하는 '열악한 일자리'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드러내는 표현들이 비정규직, 사오정, 88만원세대 등이다.
괜찮은 일자리가 줄고 열악한 일자리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괜찮은 일자리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진다. 거기에 우리나라에서 고질적인 학력 차별이라는 변수와 대학교 수의 폭발적인 증가라는 변수를 더해보자. 이 상황에서 학생들 개개인, 혹은 학부모들의 시각에서 보면 어떤 선택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까? 당연히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결국 전체의 시각에서 보면, 죄수의 딜레마와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아무리 등록금이 비싸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대학진학률이 80%대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고, 대학 교육이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하는 의무교육처럼 변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대학 진학률이 높으니, 대학에 진학한 것이 개인의 선택이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그러한 지적이 가능한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값 등록금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은 반값 등록금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분석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고등교육이라는 키워드, 또는 무상급식으로 화제가 됐던 보편적 복지라는 키워드로도 이 문제를 분석할 수 있고, 기회의 평등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이라는 키워드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즉, 반값 등록금은 등록금을 낮추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등록금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같이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값 등록금말고도 다른 이슈들이 집회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대학생 이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윤재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등록금 핑계삼아 시위 목마른 이들의 한풀이?
이 기사의 헤드라인과 사진은 기사의 도입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사의 주제이며, 기사의 클라이맥스다. 앞에서 논의한 이야기들은 이 주제의 변주에 불과하다. 사실상 변윤재 기자의 기사본문 자체보다는 기사의 헤드라인과 첫 번째 사진이 이 기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짜 집회 현장에서는 집회 현장의 열띤 분위기와 환호, 그리고 전경의 진압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해지던 치열함 등의 맥락이 동시에 공존한다. 무대 위에 자신들의 집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왔을 때의 분위기와 수많은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시작한 행진의 분위기, 그리고 전경들이 집회 행렬을 몸으로 막아서고 대학생들을 밀쳐내면서 행렬을 이리저리 갈라놓으려고 했을 때의 분위기는 같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맥락을 전부 삭제해 버린 이 기사의 사진은 현장에서 행해진 수백 번의 '셔터질', 그리고 몇몇 인물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도록 적절히 계산된 셔터 스피드를 통해서 고르고 골라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적당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진의 크기와 피사체와의 거리 두기는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이 자신의 초상권을 주장할 수 없는 정도다. 동시에 대학생들의 '생각 없이' 웃는 표정이 보일 수 있는 사진 찍기의 기교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결국 이 한 장의 사진과 기사는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 그리고 함께 동참한 시민들의 진정성과 맥락을 송두리째 지워 버렸다.
변윤재 기자와 같은 이들에게 사회현상을 꿰뚫고, 이면의 진실과 새로운 전망을 열어 보이는 통찰력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통찰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자 아닌 대부분의 한국 시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는 반값등록금 요구와 같은 문제에 대해 기자들이 좀 더 진지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기자들은 반값등록금 요구가 담고 있는 가슴 시린 갖가지 사연에 눈 감고, 귀 막을 만큼 그렇게 무감한가, 아니면 무감한 척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더라도 왜… 왜?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도대체 왜…
다음날, 우리는 한 주요 포털 사이트 메인에서 <등록금 핑계 삼아 시위 목 마른 이들의 한풀이>(데일리안, 변윤재 기자, 6월 11일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 됐고, 그 기사에 우리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진지하게 집회에 참가했던 만큼 이런 사진과 헤드라인을 뽑아내는 그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주관적인 잣대를 동원해 최소한의 사실 관계마저도 왜곡하는 기자에게 실망했다. 이하는 우리가 왜 데일리안의 기사를 보고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실망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반값 등록금 촉구 촛불 집회에 진정성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등록금 핑계 삼아 시위 목 마른 이들의 한풀이>라는 기사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기사는 '반값 등록금 촉구 촛불 집회에 진정성은 없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데, 그에 대해서 크게 3가지의 근거를 들었다.
1. 정작 대학생들이 집회에 그다지 참가하지 않았고 대학생 이외의 정당, 시민단체들, 학부모, 노조 등이 참석했다. 2. 반값 등록금만이 아니라 최저임금인상, 서울대법인화중지, 야간노동금지 등의 표어가 나왔다. 여기까지는 기사를 작성한 변윤재 기자가 글로 쓴 부분이다. 그리고 기자가 글이 아닌 사진과 제목으로 말하는 부분이자, 이 기사의 핵심적인 부분인 3. '골빈' 대학생들이 선동 당해서 뭣도 모르고 즐기러 집회에 나왔다.
우선 기사의 최소요건인 사실관계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기사에서는"'조건 없는 반값등록금' 집회는 정작 대다수 대학생들의 외면 속에서" 치러졌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사를 아무리 찾아봐도 대학생들이 이 집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우리는 학생회 차원에서 집회 시위나 동맹 휴업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없다"는 "대학가의 전언"뿐이다.
이 전언이란 것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것도 명시되어 있지 않아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최 측 추산에 따르면 5만여 명(신문사마다 다르지만, 집회현장에서는 5만이라고 했었다)의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했고, 그들 중 대다수는 대학생이라는 점은 확인해 두고 싶다. 그리고 그 집회자리에는 수많은 학생회들이 함께했다는 점도 말이다(아래에 게재된 집회 당시 사진 한 장만 봐도 각 대학의 총학생회 깃발을 찾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총학생회 깃발 아래 앉아있는 연세대 학생들 ⓒ 허진우
하지만 사실관계에 대한 이와 같은 지적이 이 기사를 작성한 변윤재 기자에게 실망한 유일한 이유가 아니다. 사실관계를 검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자로서 자격미달이기는 하지만, 사회·정치 분야를 다루는 기자가 보여주는 사고의 단순함은 우리에게 '기자가 이래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했다.
변윤재 기자는 이 집회가 대학생 이외의 정당, 시민단체, 노조 등이 참가했고, 집회의 구호가 반값 등록금을 지나쳐 생활임금과 같은 분야로 넘어갔기에 진정성 없는 정치적 선동에 의한 집회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 저변에는 반값 등록금이 대학생들에게만 한정된 문제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현재 반값 등록금 이슈가 무엇을 문제시 하고 있으며, 반값 등록금이라는 의제가 등록금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등교육 전반,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 전체의 사회구조의 문제와도 연관이 되어있음을 전혀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각은 사회학적 상상력, 혹은 사회학적 추론 능력을 담고 있지 않은 것이다.
현재 반값 등록금 요구에 대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반론 두 가지는 '1. 대학교육은 개인의 선택이다. 2. 한국에서는 대학 진학률이 너무 높기 때문에, 서구 선진국과는 다르게 등록금에 대한 지원이 힘들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반론은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높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경제구조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 사회로 변화해왔다. 즉,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해서 정년을 보장하고 평생 동안 고용하던 사회에서, 노동자를 젊을 때 비정규직으로 잠깐 쓰고 나이가 들면 다른 젊은 노동자로 대체하는 사회로 변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안정된 고용과 생활을 보장하는 '괜찮은 일자리'는 줄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함과, 낮은 임금을 견뎌야 하는 '열악한 일자리'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드러내는 표현들이 비정규직, 사오정, 88만원세대 등이다.
괜찮은 일자리가 줄고 열악한 일자리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괜찮은 일자리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진다. 거기에 우리나라에서 고질적인 학력 차별이라는 변수와 대학교 수의 폭발적인 증가라는 변수를 더해보자. 이 상황에서 학생들 개개인, 혹은 학부모들의 시각에서 보면 어떤 선택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까? 당연히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결국 전체의 시각에서 보면, 죄수의 딜레마와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아무리 등록금이 비싸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대학진학률이 80%대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고, 대학 교육이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하는 의무교육처럼 변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대학 진학률이 높으니, 대학에 진학한 것이 개인의 선택이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그러한 지적이 가능한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값 등록금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은 반값 등록금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분석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고등교육이라는 키워드, 또는 무상급식으로 화제가 됐던 보편적 복지라는 키워드로도 이 문제를 분석할 수 있고, 기회의 평등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이라는 키워드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즉, 반값 등록금은 등록금을 낮추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등록금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같이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값 등록금말고도 다른 이슈들이 집회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대학생 이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윤재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등록금 핑계삼아 시위 목마른 이들의 한풀이?
▲ 얼핏 보면, 웃으며 손을 꼭 잡고 다정히 뛰는 연인들을 중앙에 놓은 것 같은 구도의 사진.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사진과 포털에 달린 누리꾼들의 댓글들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사실 이 때 우리는 서로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넷(사진에는 잘려 나오지 않은 친구를 포함하면 다섯)이서 손을 잡고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이 기사의 헤드라인과 사진은 기사의 도입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사의 주제이며, 기사의 클라이맥스다. 앞에서 논의한 이야기들은 이 주제의 변주에 불과하다. 사실상 변윤재 기자의 기사본문 자체보다는 기사의 헤드라인과 첫 번째 사진이 이 기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짜 집회 현장에서는 집회 현장의 열띤 분위기와 환호, 그리고 전경의 진압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해지던 치열함 등의 맥락이 동시에 공존한다. 무대 위에 자신들의 집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왔을 때의 분위기와 수많은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시작한 행진의 분위기, 그리고 전경들이 집회 행렬을 몸으로 막아서고 대학생들을 밀쳐내면서 행렬을 이리저리 갈라놓으려고 했을 때의 분위기는 같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맥락을 전부 삭제해 버린 이 기사의 사진은 현장에서 행해진 수백 번의 '셔터질', 그리고 몇몇 인물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도록 적절히 계산된 셔터 스피드를 통해서 고르고 골라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적당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진의 크기와 피사체와의 거리 두기는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이 자신의 초상권을 주장할 수 없는 정도다. 동시에 대학생들의 '생각 없이' 웃는 표정이 보일 수 있는 사진 찍기의 기교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결국 이 한 장의 사진과 기사는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 그리고 함께 동참한 시민들의 진정성과 맥락을 송두리째 지워 버렸다.
변윤재 기자와 같은 이들에게 사회현상을 꿰뚫고, 이면의 진실과 새로운 전망을 열어 보이는 통찰력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통찰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자 아닌 대부분의 한국 시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는 반값등록금 요구와 같은 문제에 대해 기자들이 좀 더 진지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기자들은 반값등록금 요구가 담고 있는 가슴 시린 갖가지 사연에 눈 감고, 귀 막을 만큼 그렇게 무감한가, 아니면 무감한 척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더라도 왜… 왜?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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