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 방문
백수가 되고 난 4월, 경남 산청의 처가 가는 길이었다. 대전쯤 왔을까? 아내가 불쑥 한 마디 한다.
"우리 전주 가자."
"전주? 갑자기 왜?"
"집에 가도 아무도 없다지, 그냥 여행 다니고 싶네."
"그래? 여행은 좋은데 왜 하필 전주야? 나도 전주 몇 번씩 가봤지만 볼 거 없어. 그러니 항상 경유하기만 했지. 비빔밥 빼고 전주에서 유명한 것이 있던가? 아, 요즘 전주 막걸리는 유명하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전주한옥마을 좋다고 하던데, 거기 가자."
"전주한옥마을? 처음 들어보는데. 좋아. 한 번 가보자."
백수가 되고 난 뒤 남는 게 시간이요, 뚜렷한 대안도 없는 터라 아내의 말을 따라 전주로 향했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많은 이들이 추천한다 하니 한옥마을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긴 했다. 서울 북촌처럼 일정 지역의 한옥을 보전한 것인가? 아님 우리의 것을 강조하는 시류에 편승해 새로 조성된 마을인가?
이윽고 전주. 우연인지 몰라도 한옥마을 표지판은 전주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찾고 있었기에 더 눈에 잘 띄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전주 관광지도를 얻어도 한옥마을 정보가 절반인 것을 보면 한옥마을이 전주 관광의 중심임은 분명해 보였다.
톨게이트에서부터 30분쯤 달렸을까? 전주한옥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이 치솟던 건물들 대신 나지막한 한옥들이 눈에 띄였고, 잘 정리된 관광지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안내에 따르면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1977년 한옥마을 보전 지구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막상 마을의 분위기는 고전적이기보다 산뜻한 편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전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과 공세리 성당과 마찬가지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전동성당은 그 존재 자체로 이곳 한옥마을이 결코 만만치 않은 공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쨌든 1800년대 말 지어진 성당들은 수많은 희생들을 바탕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 가까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 경기전이 있었다. 경기전은 전주 이씨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서, 조선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중심 중의 중심이었다. 그 옆에는 전주사고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역사기록을 가장 중요시하던 조선이 실록을 보관할 만큼 이곳은 왕조의 핵심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경기전을 나와 한옥마을을 거닐기 시작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주말만 되면 전주의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몰리는 듯했는데, 날씨가 궂은 탓인지, 아님 평일 늦은 시간 때문이었는지 다행히도 거리는 한적한 편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풀어 놓을 수 있었고, 그 녀석을 뒤따라가며 한옥마을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전주한옥마을의 멋
한옥 700여 채로 이루어진 전주한옥마을의 겉모습은 고즈넉한 서울 북촌한옥마을보다 번잡한 인사동에 가까웠지만, 전체적으로 인사동보다는 좀 더 투박했다. 최근의 인사동이 전통을 파는 데 혈안이 되어 오히려 자본주의의 첨병이 되어 버렸다면, 전주한옥마을은 그 전 단계로서 아직까지 전통이 갖는 '격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통을 이야기하되 무언가를 사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그 순수성을 간직한 공간.
덕분에 전주한옥마을을 찾은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곳에서는 누가 잡아끌지 않아도, 혹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시콜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어슬렁어슬렁 전주한옥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들은 전주한옥마을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른 관광지와 달리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전주한옥마을. 그 속도에 익숙해지다 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옥마을의 아름다운 골목길들이었다. 다른 도심의 골목길은 단순히 주택과 주택 사이에 난 빈 공간이건만, 이곳의 골목길은 그것 자체로도 예술이었다. 한옥의 기하학적인 무늬들과 가지런히 나열된 기와들 사이로 오밀조밀하게 보이는 빈 공간의 조화. 그것은 결국 느린 걸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일상의 기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옥마을의 골목길은 기하학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또 다른 축복을 선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추억이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주거함에 따라 골목길이 점차 사라지는 이 시대. 한옥마을의 골목길은 사람들에게 그때 그 시절을 상기시키며 아름다운 추억들을 소환해내고 있었다. 각자의 흑백사진 속에 담긴, 동네 아이들과 함께 했던 바로 그 추억을 되살려,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현대 사회에서 얻은 상처들을 치유해주고 있었다.
나 역시도 한옥마을의 골목길을 보면서 어렸을 적 사촌들과 뛰놀았던 종암동 큰집의 골목길을 떠올렸다. 왠지 친근하고 사람 냄새 물씬 나던 그 골목길. 기껏해야 30대 중반인 나도 이 정도이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전주한옥마을을 보며 남다른 감회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골목길의 매력 때문이었을까? 아내는 한옥마을의 진가를 알기에는 반나절이 너무 짧다며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자고 했고, 안 그래도 아쉬워하던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백수에게 남는 건 시간이라지만, 이 곳 전주를 언제 또 방문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거의 조건
우리는 하룻밤을 묵기 위해 한옥체험으로 유명한 동락원을 찾았다. 그곳은 전주기전대학 부설 전통문화생활체험관이었는데, 200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문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한옥에서의 하룻밤. 비록 씻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떨어져 있는 등 불편함도 없지 않았지만 방문을 열면 보이는 전원적인 풍경은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았다. 회색빛 거리와 삭막한 아파트에 익숙해진 도시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 그것은 축복이었다. 사람이 제대로 된 삶을 누리려면 이런 환경에서 자라야 하는데. 갑자기 아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동락원을 나와 오목대로 향했다. 그곳은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고 개경으로 올라가던 중 전주 이씨 집안 어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열었던 곳으로, 전주한옥마을의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자신의 공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으니 얼마나 좋은 터에 자리하고 있겠는가.
예상대로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의 전경은 일품이었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한옥들의 조화. 역시 한옥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제 맛이던가. 한옥마을은 전통의 격조와 위엄이 서려있는 공간의 미학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으며, 제각기의 개성만을 강조하는 현대 건축물들이 흉내낼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한옥마을 그 자체가 거대한 문화유산임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자체적으로 완결성을 갖는 전주한옥마을의 미학.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 보니 새삼스레 이곳 지역명에 눈길이 갔다. 완전할 전(全) 자에 고을 주(州) 자를 써서 전주라고 불리는 이곳. 이는 결국 예로부터 이 지역이 사람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주 음식이 유명한 것이 어디 우연이겠는가. 그것은 가까이 위치한 김제평야와 서해의 산물이 이 지역으로 몰린다는 의미이며, 또 그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듦에 따라 전주는 이 지역의 중심 역할을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살기 매우 좋은 장소로서의 전주. 결국 전주한옥마을은 그런 전주의 축소판인 것이다.
전주의 명물 피순대국 한 그릇씩 먹고 다시 길을 나서는 우리. 지나가듯 아내에게 이야기 해본다.
"우리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 곳 전주에서 사는 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전주한옥마을에서 민박 같은 거 하면서 유유자적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어느새 전주는 백수의 꿈이 되어 있었다.
백수가 되고 난 4월, 경남 산청의 처가 가는 길이었다. 대전쯤 왔을까? 아내가 불쑥 한 마디 한다.
"전주? 갑자기 왜?"
"집에 가도 아무도 없다지, 그냥 여행 다니고 싶네."
"그래? 여행은 좋은데 왜 하필 전주야? 나도 전주 몇 번씩 가봤지만 볼 거 없어. 그러니 항상 경유하기만 했지. 비빔밥 빼고 전주에서 유명한 것이 있던가? 아, 요즘 전주 막걸리는 유명하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전주한옥마을 좋다고 하던데, 거기 가자."
"전주한옥마을? 처음 들어보는데. 좋아. 한 번 가보자."
▲ 전동성당한옥마을 어귀에 자리한 성당 ⓒ 정가람
이윽고 전주. 우연인지 몰라도 한옥마을 표지판은 전주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찾고 있었기에 더 눈에 잘 띄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전주 관광지도를 얻어도 한옥마을 정보가 절반인 것을 보면 한옥마을이 전주 관광의 중심임은 분명해 보였다.
톨게이트에서부터 30분쯤 달렸을까? 전주한옥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이 치솟던 건물들 대신 나지막한 한옥들이 눈에 띄였고, 잘 정리된 관광지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안내에 따르면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1977년 한옥마을 보전 지구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막상 마을의 분위기는 고전적이기보다 산뜻한 편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전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과 공세리 성당과 마찬가지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전동성당은 그 존재 자체로 이곳 한옥마을이 결코 만만치 않은 공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쨌든 1800년대 말 지어진 성당들은 수많은 희생들을 바탕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 가까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 경기전이성계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는 곳 ⓒ 이희동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 경기전이 있었다. 경기전은 전주 이씨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서, 조선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중심 중의 중심이었다. 그 옆에는 전주사고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역사기록을 가장 중요시하던 조선이 실록을 보관할 만큼 이곳은 왕조의 핵심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경기전을 나와 한옥마을을 거닐기 시작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주말만 되면 전주의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몰리는 듯했는데, 날씨가 궂은 탓인지, 아님 평일 늦은 시간 때문이었는지 다행히도 거리는 한적한 편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풀어 놓을 수 있었고, 그 녀석을 뒤따라가며 한옥마을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 한산한 거리북촌과 인사동 사이 ⓒ 이희동
전주한옥마을의 멋
한옥 700여 채로 이루어진 전주한옥마을의 겉모습은 고즈넉한 서울 북촌한옥마을보다 번잡한 인사동에 가까웠지만, 전체적으로 인사동보다는 좀 더 투박했다. 최근의 인사동이 전통을 파는 데 혈안이 되어 오히려 자본주의의 첨병이 되어 버렸다면, 전주한옥마을은 그 전 단계로서 아직까지 전통이 갖는 '격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통을 이야기하되 무언가를 사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그 순수성을 간직한 공간.
덕분에 전주한옥마을을 찾은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곳에서는 누가 잡아끌지 않아도, 혹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시콜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어슬렁어슬렁 전주한옥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들은 전주한옥마을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 골목길추억이 묻어 있는 곳 ⓒ 이희동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옥마을의 골목길은 기하학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또 다른 축복을 선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추억이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주거함에 따라 골목길이 점차 사라지는 이 시대. 한옥마을의 골목길은 사람들에게 그때 그 시절을 상기시키며 아름다운 추억들을 소환해내고 있었다. 각자의 흑백사진 속에 담긴, 동네 아이들과 함께 했던 바로 그 추억을 되살려,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현대 사회에서 얻은 상처들을 치유해주고 있었다.
나 역시도 한옥마을의 골목길을 보면서 어렸을 적 사촌들과 뛰놀았던 종암동 큰집의 골목길을 떠올렸다. 왠지 친근하고 사람 냄새 물씬 나던 그 골목길. 기껏해야 30대 중반인 나도 이 정도이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전주한옥마을을 보며 남다른 감회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 한옥마을의 모습낯익은 풍경 ⓒ 이희동
골목길의 매력 때문이었을까? 아내는 한옥마을의 진가를 알기에는 반나절이 너무 짧다며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자고 했고, 안 그래도 아쉬워하던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백수에게 남는 건 시간이라지만, 이 곳 전주를 언제 또 방문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거의 조건
우리는 하룻밤을 묵기 위해 한옥체험으로 유명한 동락원을 찾았다. 그곳은 전주기전대학 부설 전통문화생활체험관이었는데, 200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문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 문밖으로 보이는 풍경도시와 다른 문밖 ⓒ 이희동
▲ 창밖 풍경도시인에게 낯선 그곳 ⓒ 이희동
한옥에서의 하룻밤. 비록 씻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떨어져 있는 등 불편함도 없지 않았지만 방문을 열면 보이는 전원적인 풍경은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았다. 회색빛 거리와 삭막한 아파트에 익숙해진 도시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 그것은 축복이었다. 사람이 제대로 된 삶을 누리려면 이런 환경에서 자라야 하는데. 갑자기 아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동락원을 나와 오목대로 향했다. 그곳은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고 개경으로 올라가던 중 전주 이씨 집안 어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열었던 곳으로, 전주한옥마을의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자신의 공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으니 얼마나 좋은 터에 자리하고 있겠는가.
▲ 오목대이성계가 잔치를 벌인 곳 ⓒ 이희동
▲ 한옥마을의 전경한옥의 미학 ⓒ 이희동
▲ 위에서 내려다 본 한옥마을같은 듯 다른, 다른 듯 같은 ⓒ 이희동
예상대로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의 전경은 일품이었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한옥들의 조화. 역시 한옥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제 맛이던가. 한옥마을은 전통의 격조와 위엄이 서려있는 공간의 미학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으며, 제각기의 개성만을 강조하는 현대 건축물들이 흉내낼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한옥마을 그 자체가 거대한 문화유산임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자체적으로 완결성을 갖는 전주한옥마을의 미학.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 보니 새삼스레 이곳 지역명에 눈길이 갔다. 완전할 전(全) 자에 고을 주(州) 자를 써서 전주라고 불리는 이곳. 이는 결국 예로부터 이 지역이 사람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주 음식이 유명한 것이 어디 우연이겠는가. 그것은 가까이 위치한 김제평야와 서해의 산물이 이 지역으로 몰린다는 의미이며, 또 그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듦에 따라 전주는 이 지역의 중심 역할을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살기 매우 좋은 장소로서의 전주. 결국 전주한옥마을은 그런 전주의 축소판인 것이다.
전주의 명물 피순대국 한 그릇씩 먹고 다시 길을 나서는 우리. 지나가듯 아내에게 이야기 해본다.
"우리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 곳 전주에서 사는 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전주한옥마을에서 민박 같은 거 하면서 유유자적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어느새 전주는 백수의 꿈이 되어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