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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게 종이와 연필뿐이라 11년간 그리기만"

[인터뷰]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 만든 안재훈 감독

등록|2011.06.24 15:07 수정|2011.08.14 20:54

▲ <소중한 날의 꿈> ⓒ 연필로 명상하기

6월 초,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 시사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보도자료를 꼼꼼히 뒤적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감독의 숨겨둔 마음. A4 용지에 인쇄한 문서가 아닌 노끈으로 정성껏 엮은 책자 맨 뒷장에 안재훈 감독이 주인공들의 얼굴을 그려놓은 것이다. 진심을 '찍어' 내지 않고 직접 그려 전하는 진정성, 이 작품이 11년이라는 오랜 제작기간을 버티어낼 수 있었던 힘이다.

14일 <소중한 날의 꿈>이 만들어진 산실,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안재훈 감독과 만났다.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프랑스의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돌아온 후였다. 장편 경쟁부문에 출품돼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안재훈 감독의 표정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달리기에서 질까 봐 일부러 넘어진 것 때문에 고민하던 이랑이가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성장하는 영화처럼 감독은 잔잔하지만 단단했다.

[장면 #1] 1970년대 한국, 일본 애니 강세인 프랑스에서 통했을까?

<러브스토리>가 상영되던 극장, 빨간 공중전화가 있던 구멍가게, 레코드판이 돌아가던 음악사, 만남의 장소가 되던 빵집, 기찻길 옆 옹기종기 작은 집들과 언덕배기 달동네.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생생하게 재현된 한국의 70년대를 만날 수 있다.

▲ <소중한 날의 꿈>은 한국의 7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안재훈 감독은 70년대를 배경으로 삼을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는 판타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 연필로 명상하기


- 안시 다녀온 이야기부터 해주세요. 어땠나요?
"확실히 유럽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인데 올해는 유독 심했어요. 그래도 <소중한 날의 꿈> 상영관은 꽉 찼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경험은 별로 없었는데 사인회 줄이 너무 길어서 극장에서 장소도 이동해 줬어요. 기분 좋았죠. 사실 수상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개봉 전에 수상 이력은 마케팅에 도움이 된다는데, 수상이라는 용어로 영화를 포장하면 열심히 한 애니메이터들의 노고가 가려지는 것 같아서 불편했어요. 그런데 직접 가서 관객들의 반응을 보니까 수상까지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애초에 <소중한 날의 꿈>으로 일본의 지브리애니메이션과는 다른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이제까지는 지브리애니메이션에서 유럽과 일본이 섞인 배경만 보다가 온전한 동양, 그것도 소도시에서 그려지는 성장의 과정을 볼 수 있어 좋았다는 평가를 들었어요. 한국 유학생들도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관객들에게 홍보 엽서를 나눠주고, 프랑스 관객들의 질문을 통역해주는 등 자원해서 도와줬습니다. 특이한 건, 프랑스 여고생들이 이랑이의 고민에 공감했다는 거예요. 전날 보고 갔는데 다음날 또 와서 보더군요."

▲ 철수가 자신은 찢어진 우산을 갖고 이랑에게 좋은 우산을 건네주는 장면은 캐릭터들의 수줍은 감정이 잘 표현돼 있다. ⓒ 연필로 명상하기


- 배경도 우리나라 1970년대고 온전히 한국 사람을 그리려 노력한 작품인데 프랑스에서도 소통이 됐다니 신기하네요.
"프랑스의 한 독립방송국 대표가 철수가 이랑에게 우산을 건네주고 수줍게 뒤돌아서 뛰어갈 때 이랑이 우산 손잡이를 잡고 빙빙 돌리는 부분에서 '갈등하는 이랑이를 봤다'고 재해석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빨리 멈추는 것보다 여운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우산을 돌리는 모습을 넣은 장면인데 캐릭터의 마음까지 읽어낸 거죠. 결국 자국의 관객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했더니 외국인들에게도 그게 통했다고 할까요."

[장면 #2] 누가 알아볼까? 절편 무늬가 저렇게나 다양하다는 걸

이랑의 부모님은 방앗간을 한다. 서울에서 전학 온 세련된 수민을 보고 소심한 열등감을 느낀 이랑은 일하는 엄마를 붙들고 "교복도 크고 선생님은 내 이름도 모른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옆집 누구는 옷 타령하다가 가출했다는데" 걱정하는 엄마와 이랑의 대화 가운데 방앗간 기계는 돌아가고 절편이 만들어진다. 참기름 곱게 발라진 떡의 문양이 다채롭다.

▲ 제작진은 이랑이가 방앗간에서 엄마 일을 돕는 장면에 등장하는 절편의 다양한 문양을 실제 떡에서 참고했다. ⓒ 연필로 명상하기


- 배경이나 소품의 세밀한 묘사가 놀라웠어요. 사실상 그 정성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 같은데요.
"시나리오가 나온 후, 실사영화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재소화해서 좋은 영화를 만들지만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터의 노력밖에 없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침범하지 않되 받쳐주기 위해 디테일을 챙겼어요.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봐달라는 게 아니라 영화에 흠뻑 빠져 있다가 끝난 후 풍족함이 이야기를 단단하게 해줬다는 것만 느끼게끔 하고 싶었어요."

- 세밀한 배경 묘사가 이야기를 침범하지 않도록 어떻게 조율하셨나요?
"콘티를 그린 다음에 생각해요. 이 장면에서 관객의 눈이 어디를 바라보겠구나. 대사의 호흡이 길어서 뜸을 들일 때 관객의 눈이 다다를 지점을 마음속으로 세어보는 거죠. 그 지점에 있는 소품의 디테일을 살리는 겁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성의껏 그려 있으면 장면이 편하게 넘어갈 수 있는데, 관객이 눈을 돌린 곳이 다 허술하면 불편한 거죠.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도 그림 볼 줄은 알잖아요."

공병우 타자기 ⓒ 연필로 명상하기


- 그래서인지 방앗간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떡에도 문양이 각각 다르더라고요.
"스태프들이 그림을 통해 그림을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변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림을 배우면 그 사람만의 시각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스태프들과 이야기 들으러 많이 다녔어요. 떡의 무늬를 다양하게 그렸다는 건 적어도 떡을 만들었던 사람은 알 수 있을 거예요(하하, 관객 중에 떡을 만들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을 조금씩 넣어주면 그들과 소통할 수 있지 않겠어요. 공병우 타자기를 아는 사람, 대한민국 최초 비행기 '부활호'를 아는 사람, 작은 소품 하나로 마음이 열리게 되면 영화가 하고 싶은 말도 알아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면 #3] 1970년대와 공룡시대 판타지의 조우

1970년대에 머물러 있던 영화는 이랑과 철수가 공룡 발자국을 보러 간 해남 땅끝마을에서 기가 막힌 판타지를 연출한다. 이랑의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공룡무리 가운데 우물쭈물 하다가 뒤처진 작은 공룡이 있다. "뭐하고 있어! 어서 따라가!" 이랑이 외치는 소리는 남들보다 잘 하는 것 없어 늘 작아지는 자신에게 건넨 독백과도 같다.

▲ 철수와 이랑은 남겨진 공룡 발자국을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해남의 땅끝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 연필로 명상하기


- 1970년대 배경이 계속해서 나오다가 갑자기 판타지적인 장면으로 전환되는 것이 묘했어요.
"늘 흑백으로만 봤던 70년대 풍경들을 컬러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판타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내 지속되면 사실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있어서 이 작품만의 방식으로 중화시키기 위해 판타지적인 장면을 넣은 거죠. 청각장애인인 삼촌과 이랑이 우주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아리랑 1호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수억만 년 전에 존재했던 공룡을 그려 넣어서 70년대 사람들이 꿈꾸던 기억과 이어지게끔 한 거죠."

- 공룡신이 특히 매력적이던데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공룡이 나오는 판타지적인 장면은 좋은 그림과 사진을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스태프의 의견이 있었어요. 할리우드에 나오는 영화 속 쥐라기처럼 풀이 우거진 모습이 아니라 아무도 그 시대를 본 적이 없으니 온갖 화려한 꽃이 만발한 세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공룡의 색도 어두운 색이 아니라 무지개 색으로 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조언을 참고했어요."

[장면 #4] 스튜디오의 내일, "설마 또 11년 걸리는 건 아니죠?"

재개발 때문에 파헤쳐진 철수 삼촌의 아지트에서 삼촌은 이랑에게 떡 모양의 돌을 보여준다. 돌이지만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세월은 가끔 엄청난 공룡 화석을 품고 있다고.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을 뿐인 공룡의 발자국이 지금은 값진 역사의 한 장면이 되는 것처럼 스스로 다다르기 위해 내딛는 오늘의 걸음은 내일을 만든다.

- 시나리오를 쓴 송혜진 작가(영화 <인어공주><아내가 결혼했다>,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 집필)에게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들었어요.
"꿈에 대한 이야기인데 교훈이 아니라 응원이 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작가에게 전했어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데 '추억'이 아니라 문득 드는 '기억', 과거의 나와 마주본다는 느낌이죠. 누구한테나 지금은 과거가 되잖아요. 지금을 예쁘게 잘 살면 나중에 다시 돌아봤을 때 기특했던 내 모습 때문에 조금 더 기분 좋게 살고 싶지 않을까 합니다."

▲ 전파사에서 삼촌의 일을 돕고 있는 철수는 우주비행사의 꿈을 갖고 있다. 연을 짊어지고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등 엉뚱한 행동을 일삼지만 좌절하거나 꿈을 포기하는 일이 없다. <소중한 날의 꿈>은 복고영화라기 보다 과거의 자신을 기억해 오늘을 살아내기 위한 성장영화다. ⓒ 연필로 명상하기


- <소중한 날의 꿈>의 퀄리티에 눈높이가 맞춰져서 '연필로 명상하기'의 다음 작품도 그 정도 수준을 기대하게 되지 않을까요? 애니메이션 제작이 어려운데 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겠죠?
"<소중한 날의 꿈>을 세필붓으로 그렸다면 다음 작품은 여유 있게 좀 더 큰 붓으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이 안 보이는 부분까지 세밀하게 표현했다면 앞으로는 좀 영리하게, 하지만 세밀함이 주는 매력은 충분히 살릴 거예요. <소중한 날의 꿈>을 하면서 투자도 들어왔어요. 예전에는 투자자들에게 "우리도 애니메이터로 멋있게 일하고 싶다"고 설득했는데 우리 먹고 살게 하려고 투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 이후로 우리에게 가치를 주면 투자자들에게도 손해가 아니라는 걸 알아주기 시작했어요.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올바르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해요."

- 11년 만에 드디어 개봉인데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인가요?
"만들 때도 두렵고 걱정이 됐지만 개봉 준비할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실사영화는 유명한 감독들도 있고, 배우도 있어서 쇼프로그램에라도 나갈 수 있는데 애니메이션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밤마다 엽서를 썼어요. 500통 쓰는 데 한 달 걸렸네요."

가진 것이 종이와 연필 뿐이라 11년간 그리고 또 그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는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 1등을 못할까봐, 꿈에 다다르지 못할까봐 주저하기보다 더디지만 묵묵히 나아가겠다는 영화 속 아이들과 스튜디오가 닮았다. <소중한 날의 꿈>이 침체된 한국 애니메이션을 책임지기보다 미래를 만드는 오늘의 발자국 같은 작품으로 감상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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