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 강내면 국민보도연맹원.

1949년 김OO 할아버지(1922년생)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김 할아버지가 보도연맹원이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때 보국대로 일본에 끌려갔다 해방 후 고향인 충북 청원군 강내면으로 돌아온 김 할아버지.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그는 1949년 10월경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보도연맹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저 마을 사람들이 다 가입해야 한다기에 그도 따랐다.

가입하면 비료 준다더니...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국민보도연맹(아래 보도연맹)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 후, 좌익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保導)'는 취지로 결성됐다. 이는 일제강점기 사상 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체제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일종의 관변단체였다.

보도연맹은 전국의 각 시, 군 단위로 결성됐다. 하지만 보도연맹에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 등 좌익활동과는 관계없는 사람들도 다수 강제가입됐다. 또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가입된 이들도 많았는데 그 수가 전국적으로 최대 30여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할아버지 마을의 보도연맹 모집책은 "가입하면 비료를 무상으로 준다"고 선전하고 다녔다. 가입하지 않으면 수시로 구타를 하는 등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과거에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전에 좌익활동 했던 기록을 없애주고, 다른 면민들과 똑같이 대해 주겠다"고 꼬시기도 했다.

보도연맹은 지역 책임자인 간사장을 두었다. 간사장은 거물급 좌익 활동가 중 전향한 사람들이나 지역의 우익인사가 맡았는데, 특히 우익인사가 간사장이 될 경우 그 권력은 막강했다. 당시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OO은 경찰서장 대우를 받았으며 거리를 활보할 때는 경찰 2~3명이 호위할 정도였다. 실제 그는 도지사만큼이나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보도연맹원이 된 김 할아버지는 간사장 신OO의 청주 강연에 2번 정도 참석했으며 당시 보은 자동차부 자리에 있던 보도연맹 사무실에도 가봤다. 사무실에서는 반공강연대회, 반공영화 상영이 열리기도 했다. 간혹 소집이 내려지면 청원에서 청주에 있는 충북보도연맹 사무실까지 가야 했다.

비료를 공짜로 준다던 말과는 달리 돌아오는 이득은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출타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거나 매일 면소재지로 나가 출석부에 도장을 찍고 확인을 받아야 했다. 또 김일성과 북한 정부를 비방하는 삐라를 동네 집집 대문마다 붙이라고 해 삐라 붙이는 일을 하기도 했다.

"6촌까지 다 죽인다"... 지게와 보리자루로 구한 목숨


"방공호를 파야 하니 성인 남자들은 모두 모여라."

한국전쟁 발발 10여 일 후인 1950년 7월 4일. 면내 청장년을 소집한 경찰은 아침부터 강내면 탑연리 야산에 여러 개의 구덩이를 파게 했다. 방공호가 완성되자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따로 불렀다. 그렇게 김 할아버지를 비롯한 강내면 사람 65명은 면사무소 옆 창고에 감금됐다. 여기에 강외면 사람 5명까지 더해 총 70명이 있었다.

그렇게 창고에서 며칠을 보낸 후 보도연맹원들은 소방서 창고로 이송됐다. 소방서 창고는 훨씬 좁아서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바깥 출입은 일절 금지됐고 밥은 가족들이 날라다 주었다. 심지어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놔두고 그 안에서 용변을 해결하게 했다. "도망가면 6촌까지 다 죽인다"는 협박에 도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소집에 응하지 않고 도망간 사람 집에는 불을 지르기도 했다. 실제 7월 9일에는 지서장이 자기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사람을 데려다가 "형을 찾아오라, 찾아오지 못하면 6촌까지 다 죽인다"고 협박하며 뭇매를 때려 실신시키기도 했다.

다음날, 아군 비행기가 창고 주변을 폭격했다. 불길이 크게 일어난 틈을 타 김 할아버지는 창고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는 당시 한창이었던 호밀밭에 숨어 엎드려 있었다. 숨죽이던 그에게 버려진 지게가 눈에 띄었다. 지게를 메고 있으면 농사꾼으로 위장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게를 메고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군인과 맞닥뜨렸다. "근처 사는 사람인데 집에 가는 길"이라고 둘러댔지만 군인은 무조건 따라오라고 했다.

불안한 발걸음이 계속됐지만 다행히 김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군인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여러 사람이 함께 걷게 됐는데 김 할아버지는 천천히 뒤로 처져 보리자루를 가진 사람에게 자루를 하나 빌려 보리 찧고 오는 척하면서 집에 갈 수 있었다. 지게와 보리자루가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무사히 집에 돌아왔지만 마냥 집에 있을 순 없었다. 언제 누가 자기를 찾으러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 할아버지는 굽이굽이 산을 넘어 20리 길을 걸어 외갓집에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하룻밤만 자고 새벽녘에 나와야 했다. 보도연맹원을 재워주거나 숨겨주면 경찰에 잡혀가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었다. 별 수가 없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지만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산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소방서 창고에 남겨졌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김 할아버지가 도망친 1950년 7월 10일 충북 청원 강내면 보도연맹원들은 탑연리 야산에서 총살당했다. 삐삐선으로 두명씩 묶은 후 구덩이 앞에서 총살했다. 김 할아버지의 형도 총살 당했는데 며칠 후 시신을 수습하러 가보니 시신에 총 독이 올라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처럼 한국전쟁 발발 후 후퇴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무차별 검속, 살해했다. 북한군이 점령하면 동조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학살에는 국군(주로 헌병대), 경찰, 우익청년단(서북청년단 등) 등이 동원됐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당시 6사단 헌병대에 근무하던 김만식 할아버지(1927년 생, 당시 일등상사)는 보도연맹사건의 가해자다. 원주에서 춘천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홍천, 횡성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 원주로 후송, 원주와 횡성 중간 지점에서 사살했다는 것.

김 할아버지의 진술에 따르면 경찰이 보도연맹원을 소집해 오면, CIC(미군방첩대)가 분류해 군인들이 사살했으며, 최초의 사살은 6월 28일 횡성에서였다. 그 후 7월 5일 충북 진천 30여 명, 같은 날 충주 500~1000여 명, 7월 8일 음성 40여 명, 7월 9일 청원군 북이면 옥녀봉에서 800여 명, 7월 10일 청원군 오창 창고에서 370여 명, 7월 15~16일 문경 400여 명, 영주 350명, 상주 400여 명이 국군 6사단 헌병대에 의해 학살됐다.

이중에서 강원도 횡성에서의 학살(6월 28일)은 김 할아버지의 증언을 통해 최초로 밝혀졌다. 군 헌병대 초급 간부의 진술로, 오래전 일임에도 지역과 날짜를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신빙성이 높다.

김 할아버지는 보도연맹원 학살이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서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최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는 증언은 보도연맹원 사건이 국가의 계획적인 학살이라는 주장과 부합하는 것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김만식 할아버지의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관련자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얼굴, 등, 팔 모두 8곳 총상... 하지만 7개월 임산부는 살아났다

이 같은 보도연맹원을 겨눈 총구는 임산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임신 7개월이던 강영애 할머니(현재 87세). 16살에 한살 많은 남편과 결혼한 할머니는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집안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보도연맹 가입을 자꾸 권유해 도장을 찍어 주었다고 한다.

전쟁 발발 후 어느날 새벽, 강영애 할머니와 남편은 경찰에 연행돼 청주경찰서 유치장이 구금됐다. 할머니는 당시 임신 7개월이었는데 유치장에서 열흘 동안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7월 10일경 유치장에 구금돼 있던 강 할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은 나뭇짐 싣듯이 트럭에 실렸다. 목적지인 남일면 쌍수리로 이송되는 도중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구타를 당했다. 짐짝처럼 실려 도착한 쌍수리에는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사람들을 전부 한군데에 모아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게 시켰다. 죽음을 예감했던가. 남편은 "죽는 거 원통하게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같이 죽게 된 것도 다행이여"라고 했다. 그 순간, 총소리가 울렸고 할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굴, 등, 팔, 어깨, 엉덩이. 할머니는 무려 8발의 총을 맞았다. 천만다행으로 용케 치명적인 부위를 벗어나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군인들의 사격이 끝나고 차출된 인근 마을 주민들이 시신을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한 의식에도 강 할머니는 얼굴에 흙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흙을 쓸어내며 몸을 뒤척였다.

작업하던 사람들이 "어디 사는 누군데, 이런 꼴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정세영씨가 남편"이라고 답하자 시신을 매장하던 사람 중 한 명이 깜짝 놀라며 "아이쿠, 이게 무슨 변고여. 우리 아들하고 같이 있다 갔는데"라고 했다.

강 할머니를 발견한 사람은 남일면 쌍수리 이장으로, 그의 아들이 강 할머니의 남편과 친구 사이였던 것. 천만다행으로 학살 현장이 강 할머니가 살던 마을의 바로 인근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이장과 주민들의 도움으로 인근 콩밭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날 밤 이장의 전갈을 받은 시아버지가 마을에 당도했다. 시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찾아 임시 매장하고 반죽음이 된 며느리를 업고 집으로 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할머니는 8월경 출산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 피난 때 백일이 갓 지난 아기는 죽고 말았다.

서울대 대학원 나온 아들, 취직도 못하고 낙향


보도연맹사건은 단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비극으로 번져갔다. 1950년에는 남편을, 후에는 아들을 잃은 노양우 할머니(1927년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충북 청원군 남일면 장암동의 연꽃 피는 방죽마을에서 태어난 노양우 할머니. 노진사댁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19살 때 18세의 남편 한유동씨와 결혼했다.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남편은 남일면사무소에 근무했다. 1949년 청주형무소에 1년간 수감되기도 했던 남편은 출감 후 보도연맹 가입 압력을 심하게 받았다. 그래야 당시 공군 대위던 형이 안전하다는 아버지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

"보도연맹원들은 사흘간 피난을 갈 테니 쌀을 챙겨서 모여라."

전쟁 발발 얼마 후, 남편을 비롯한 보도연맹들은 그렇게 시내로 끌려갔다. 가방에 쌀을 챙겨간 남편은 죽임 당할 것을 미리 알았던지 트럭에 실려 이송되던 도중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혔고 남편은 결국 학살됐다. 3살짜리 아들, 뱃속엔 임신 3개월인 딸을 가진 채 할머니는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자신이 지어준 옷의 바느질과 운동화를 보고 남편임을 알아봤다. 시신은 퉁퉁 부어 있었고 도망치다 붙잡혀 맞았던 탓인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때 노양우 할머니 나이가 24살. 졸지에 남편을 잃은 어린 과부는 홀로 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아이들도 저녁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지만 자식들은 너무도 잘 자라주었다. 아들은 공주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까지 나왔고, 딸도 청주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지금까지도 숨어 사는 거 아니여? 빨갱이다 뭐다 아직도 몸서리가 쳐져. 뒤로는 얼마나 수군대는지. 그리고 서로 왕래도 잘 안 하더라고요. 즈이 아빠 얼굴도 모르는 아들을 취직도 못하게 하는데…."

서울대 대학원까지 졸업한 똑똑한 아들은 신원조회로 취직을 못하고 느닷없이 청주에 내려왔다. 그 때 노양우 할머니는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아들은 과로로 쉰이라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버렸다.

"(아들 죽고 난 후) 내가 문 밖에를 1년을 안 나갔어요. 맨날 아들 사진을 보고 혼자 지껄이는 거여. 어떤 때는 내가 미쳤나 생각도 하는데, 지금까지 그런다고. 어디 나갔다가 오면, '엄마 왔다' 그러고. 남편 없이 사느라고 힘들었지, 애들 공부시키느라고 힘들었지. 쟤 저렇게 되니까 힘들지."

노양우 할머니의 깊고 슬픈 한숨은 끊이지 않았다.

진실위 조사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까지 약 3개월에 걸쳐 당시 남한의 149개 시·군 중 114개 시·군에서 5129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됐다. 하지만 5129명은 희생자 중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 35개 시·군에서 학살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보도연맹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은 셈이다.

집안 대 끊기고 아이들은 흩어지고... 아픔은 계속된다

보도연맹 사건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유가족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이었다. 독자의 사망으로 집안의 대가 끊긴 경우, 남편의 사망으로 부인은 재혼하고 아이들은 친척들의 손에 맡겨지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또 대부분의 유가족들은 경제적 빈곤에 허덕였다. 남편을 잃고 여성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족은 먹고 사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경제적 어려움은 자녀들의 교육 등에도 영향을 미쳐 빈곤의 대물림 현상이 나타났다. 또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로 오랫동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주로 신원조회를 통한 신분상의 불이익과 감시를 통해 이루어졌던 연좌제는 유가족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었다. 공무원 시험이나 직장 취업 및 사관학교 입학 등에서 발생한 불이익은 희생자의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방계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연좌제로 인한 좌절감과 차별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신원조회에 따른 각종 불이익은 경제적 곤궁으로 이어졌다. 연좌제가 철폐된 지 2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이들 유가족들의 대부분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사회의 차별과 부정적인 시선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놓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이 발생한 지 벌써 61년. 그러나 이로 인한 아픔은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민간인 학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아픔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