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왕 상 6장
아디시피 계륵(鷄肋)은 삼국연의의 조조(曹操)에서 연유한다. 지구전(持久戰)으로 버티자니 죽겠고 물러서자니 요사이 말로 쪽(?)팔리는 일.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막상 버리자니, 남 주자니 아깝다. 암구호를 묻는 소리에 얼떨결에 "응, 계륵."
눈치 빨랐던 아니 너무 머리가 좋았던, 큰아들 조비(曹丕)의 유력한 경쟁자였던 조식(曹植)의 후원자 양수(楊修), 혼자 조조의 심경을 알아차렸다. "짐 싸라, 집에 가자." 그렇게 짐을 꾸리다가 속마음을 들켜버렸다고 느낀 조조에게 죽었다.
모종강(毛宗崗) 본(本)으로 비평이나 협비(夾批)까지를 원문으로 읽는다면 삼국연의는 정말 무서운 소설이다(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아직 비평이나 협비까지 전체가 번역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러니 삼국지를 많이 읽은 사람은 상대하지 말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일 터. 여담이지만 양수(楊修)의 엉뚱한 죽음(?)은 차기 대권(大權)을 둘러싼 조조의 정치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 정설.
'각설(却說)'하고 아마 양혜왕에게 맹자는 그런 계륵(鷄肋)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 말은 참 그럴싸한데 막상 뒤돌아서 생각해보니 현실성이 없는 소리. 먹을 게 없다. 맹자의 낚시질(참고로 맹자선생의 서툰 낚시질에 낚인 사람은 뒤에 나오는 어리고 철없었던, 사방 오 십리의 조그마한 제후국의 등(滕) 문공(文公)이 유일)은 양혜왕의 간지러운 몇 번의 입질로 끝나고 이제 그 아들 양왕(襄王)이 나선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미 승부는 갈렸고 여기 양왕(襄王)과의 면담은 일종의 번외경기 또는 고별전이 되겠다. 바보가 아닌 이상, 선생도 이미 일이 틀어져버렸음을 짐작해서 가뜩이나 속이 편치 않았을 터인데, 대타로 나선 그 아들, 거들먹거리며 걸어오는 꼴을 보아하니 가관(可觀)이다. 선생은 기가 막힌다.
그래서 6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맹자가 양왕(襄王)을 뵙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멀리서 바라봐도 인군(人君) 같지 않고, 다가가서 보아도 그에게는 두려워할만한 어떤 것도 보이지 않더라(孟子見梁襄王出語人曰望之不似人君就之而不見所畏焉).'라고 하였다." 요즘식대로, 선생의 당시 심경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어린놈이 참 알뜰하게도 싸가지가 없더구나 하는 정도?
그렇잖아도 마음 편치 않았던 선생. 약속장소에 나타나는 저 인간 좀 보소. 예전 주공(周公)께서는 사람이 찾아오면 씹던 밥까지 뱉고 버선발로 뛰어나왔다던데, 이자는 느릿느릿 여유자작 서두르는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다. 어린놈이.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맹자선생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싸가지 없는 것은 절대 못 봐준다. 아마 군주에게 나이로 밀어붙인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또 자신이 가서 만나보려던 군주가 병을 핑계로 약속을 어기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만남을 거절해릴 정도로 제대로 한 성질(^^)하시는 분.
걸음걸이나 태도도 영 못마땅한데 질문조차 앞뒤를 다 잘라먹고 말이 짧아 다혈질의 선생, 말문이 막힌다. 질문 세 가지에 선생의 답변 딱 세 가지로 6장은 다짜고짜 끝나버린다. 질의응답이 간결하기가 선문답(禪問答) 같아서 대화 아래로 흐르는 심리를 읽어보면 무척 재미있다.
양왕(襄王)의 첫 번째 질문, "천하는 어떻게 정해집니까(天下惡乎定)?" 질문의 뜻은 천하의 정세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고 보시는가하는 질문인데 보다시피 말을 앞뒤로 다 잘라 드셔서 말이 좀 짧다. 평소의 성질대로라면 여기서 욱(?)해주셔야 정상인데 예상 외로 선생은 이 대목에서 소심하게 삐치는(^^) 정도의 어감으로 넘어가 주신다. 뚱한 목소리로 외면하면서 "하나로 정해지겠지(定于一)."
피장파장. 그 질문에 그 대답. 탐탁찮아하는 상대의 기색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아니면 배려를 훈련받지 못하였거나) 양왕(襄王)의 다음 질문. "누가 그것을 하나로 할 수 있을까요(孰能一之)?" '하나로 정해질 것'이라는 맹자의 답변이 너무 막연하다고 느꼈나보다. 그래서 그 '하나'를 파고든다. 천하를 휘어잡을 나라가 어디, 또는 누구이겠냐는 질문. 하지만 선생은 여전히 뚱하다.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그것(천하)을 하나로 할 수 있겠지(不嗜殺人者能一之)."
눈치 없는 것으로 치면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맹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쯤이면 눈치를 채고 화제를 돌리거나 완곡하게 여쭤봄직도 하건만 그냥 대책 없이 들이대기만 한다. 마지막 질문, "누가 능히 그를 따를까요(孰能與之)?" 여기, 누가 따르겠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은 뜻밖이다.
우연일까? 툭툭 던지던 질문, 드디어 맹자 논리의 허점을 제대로 뚫어버린 것. 말하자면 지금이 어떤 때인데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 따위를 누가 따르겠는가라는 말. 현실성 없는 소리라는 말이다.
현실성 없는 소리, 곧 우활(迂闊)함을 말하니, 이미 양왕(襄王)은 아버지로부터 맹자의 장단점에 대한 정보를 챙기고 미리 철저히 준비를 했다는 말이 된다. 선생의 머리끝에 올라 타 앉아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좋게만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려버린 것.
그냥 고개만 몇 번 끄덕여주고 일어서려 하였는데 아차하다 어린아이에게 창피를 보게 생겼다. 선생,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자신의 필살기, 수사(修辭)를 갑자기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화~악 펼쳐 보인다.
누가 선생의 그런 우활(迂闊)함을 따르겠느냐는 신랄한 질문에 "천하에 따르지 않는 이가 없죠. 아 왕이시여, 저 싹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칠팔월 한창 가물면 싹은 마르다가 하늘에 유연히 구름이 일어 비가 쏟아져 내리면 싹은 싱싱하게 돋아납니다. 이 같이 된다면 싹이 일어나는 기세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天下莫不與也王知夫苗乎七八月之間旱則苗槁矣天油然作雲沛然下雨則苗浡然興之矣其如是孰能禦之)?"
구름은 유연(油然)하게 일어나고 비는 패연(沛然)하게 내리고 시들었던 싹은 비를 맞아 발연(浡然)하게 일어난다니, 농경문화에서 나고 죽은 사람들답게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 주석에는 유연(油然)은 구름이 성한 모양, 패연(沛然)은 비가 성한 모양, 발연(浡然)은 싹이 일어나는 모양이라고 나와 있다.
찌는 태양, 바짝바짝 타들어가며 거북등같이 갈라지는 밭에 시든 싹, 우르르 쿵쾅 천둥번개 소리, 후드득 마른 땅에 비 갈겨대는 소리,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물 냄새. 순식간에 생기를 찾아 일어서는 싹(苗).
단언컨대 이건 비유 따위가 아니라 웅변이거나 수사(修辭)이겠다. 연설자의 인격에 기인하는 감성적인 호소력, 그리고 논리까지. 맹자가 한순간에 펼쳐낸 자신의 필살기는 완벽한 수사의 전형이라고 할만하다. 여기 이런 아름다운 수사로 감성(pathos)을 한껏 자극해 놓으시고 선생, 이제 여기에다 논리(logos)를 더해(尙)주신다.
"(누가 따르겠느냐고요?) 지금 천하를 다스리는 자들은 모두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 합니다(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빼고 그 사람을 기다릴 것입니다. 진실로 이렇다면야 백성들이 따르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거침없이 쏟아질 테니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今夫天下之人牧未有不嗜殺人者也如有不嗜殺人者則天下之民皆引領而望之矣誠如是也民歸之由水之就下沛然誰能禦之)?"
급하다고 실을 바늘허리에 매고 바느질을 하던가? 느리다고? 우활(迂闊)하다고? 자연을 보라. 물이 느리기만 한가? 홍수에 물이 넘치는 것을 보라. 느리지만 순리(順理)에 따르기만 한다면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니던가?
패자(覇者)의 길이 아닌 왕도(王道)의 길. 나는 맹자의 말 이외에 뭐하나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이러니, 이러니 나는, 맹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아디시피 계륵(鷄肋)은 삼국연의의 조조(曹操)에서 연유한다. 지구전(持久戰)으로 버티자니 죽겠고 물러서자니 요사이 말로 쪽(?)팔리는 일.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막상 버리자니, 남 주자니 아깝다. 암구호를 묻는 소리에 얼떨결에 "응, 계륵."
모종강(毛宗崗) 본(本)으로 비평이나 협비(夾批)까지를 원문으로 읽는다면 삼국연의는 정말 무서운 소설이다(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아직 비평이나 협비까지 전체가 번역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러니 삼국지를 많이 읽은 사람은 상대하지 말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일 터. 여담이지만 양수(楊修)의 엉뚱한 죽음(?)은 차기 대권(大權)을 둘러싼 조조의 정치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 정설.
'각설(却說)'하고 아마 양혜왕에게 맹자는 그런 계륵(鷄肋)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 말은 참 그럴싸한데 막상 뒤돌아서 생각해보니 현실성이 없는 소리. 먹을 게 없다. 맹자의 낚시질(참고로 맹자선생의 서툰 낚시질에 낚인 사람은 뒤에 나오는 어리고 철없었던, 사방 오 십리의 조그마한 제후국의 등(滕) 문공(文公)이 유일)은 양혜왕의 간지러운 몇 번의 입질로 끝나고 이제 그 아들 양왕(襄王)이 나선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미 승부는 갈렸고 여기 양왕(襄王)과의 면담은 일종의 번외경기 또는 고별전이 되겠다. 바보가 아닌 이상, 선생도 이미 일이 틀어져버렸음을 짐작해서 가뜩이나 속이 편치 않았을 터인데, 대타로 나선 그 아들, 거들먹거리며 걸어오는 꼴을 보아하니 가관(可觀)이다. 선생은 기가 막힌다.
그래서 6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맹자가 양왕(襄王)을 뵙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멀리서 바라봐도 인군(人君) 같지 않고, 다가가서 보아도 그에게는 두려워할만한 어떤 것도 보이지 않더라(孟子見梁襄王出語人曰望之不似人君就之而不見所畏焉).'라고 하였다." 요즘식대로, 선생의 당시 심경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어린놈이 참 알뜰하게도 싸가지가 없더구나 하는 정도?
그렇잖아도 마음 편치 않았던 선생. 약속장소에 나타나는 저 인간 좀 보소. 예전 주공(周公)께서는 사람이 찾아오면 씹던 밥까지 뱉고 버선발로 뛰어나왔다던데, 이자는 느릿느릿 여유자작 서두르는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다. 어린놈이.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맹자선생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싸가지 없는 것은 절대 못 봐준다. 아마 군주에게 나이로 밀어붙인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또 자신이 가서 만나보려던 군주가 병을 핑계로 약속을 어기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만남을 거절해릴 정도로 제대로 한 성질(^^)하시는 분.
걸음걸이나 태도도 영 못마땅한데 질문조차 앞뒤를 다 잘라먹고 말이 짧아 다혈질의 선생, 말문이 막힌다. 질문 세 가지에 선생의 답변 딱 세 가지로 6장은 다짜고짜 끝나버린다. 질의응답이 간결하기가 선문답(禪問答) 같아서 대화 아래로 흐르는 심리를 읽어보면 무척 재미있다.
양왕(襄王)의 첫 번째 질문, "천하는 어떻게 정해집니까(天下惡乎定)?" 질문의 뜻은 천하의 정세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고 보시는가하는 질문인데 보다시피 말을 앞뒤로 다 잘라 드셔서 말이 좀 짧다. 평소의 성질대로라면 여기서 욱(?)해주셔야 정상인데 예상 외로 선생은 이 대목에서 소심하게 삐치는(^^) 정도의 어감으로 넘어가 주신다. 뚱한 목소리로 외면하면서 "하나로 정해지겠지(定于一)."
피장파장. 그 질문에 그 대답. 탐탁찮아하는 상대의 기색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아니면 배려를 훈련받지 못하였거나) 양왕(襄王)의 다음 질문. "누가 그것을 하나로 할 수 있을까요(孰能一之)?" '하나로 정해질 것'이라는 맹자의 답변이 너무 막연하다고 느꼈나보다. 그래서 그 '하나'를 파고든다. 천하를 휘어잡을 나라가 어디, 또는 누구이겠냐는 질문. 하지만 선생은 여전히 뚱하다.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그것(천하)을 하나로 할 수 있겠지(不嗜殺人者能一之)."
눈치 없는 것으로 치면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맹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쯤이면 눈치를 채고 화제를 돌리거나 완곡하게 여쭤봄직도 하건만 그냥 대책 없이 들이대기만 한다. 마지막 질문, "누가 능히 그를 따를까요(孰能與之)?" 여기, 누가 따르겠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은 뜻밖이다.
우연일까? 툭툭 던지던 질문, 드디어 맹자 논리의 허점을 제대로 뚫어버린 것. 말하자면 지금이 어떤 때인데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 따위를 누가 따르겠는가라는 말. 현실성 없는 소리라는 말이다.
현실성 없는 소리, 곧 우활(迂闊)함을 말하니, 이미 양왕(襄王)은 아버지로부터 맹자의 장단점에 대한 정보를 챙기고 미리 철저히 준비를 했다는 말이 된다. 선생의 머리끝에 올라 타 앉아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좋게만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려버린 것.
그냥 고개만 몇 번 끄덕여주고 일어서려 하였는데 아차하다 어린아이에게 창피를 보게 생겼다. 선생,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자신의 필살기, 수사(修辭)를 갑자기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화~악 펼쳐 보인다.
누가 선생의 그런 우활(迂闊)함을 따르겠느냐는 신랄한 질문에 "천하에 따르지 않는 이가 없죠. 아 왕이시여, 저 싹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칠팔월 한창 가물면 싹은 마르다가 하늘에 유연히 구름이 일어 비가 쏟아져 내리면 싹은 싱싱하게 돋아납니다. 이 같이 된다면 싹이 일어나는 기세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天下莫不與也王知夫苗乎七八月之間旱則苗槁矣天油然作雲沛然下雨則苗浡然興之矣其如是孰能禦之)?"
구름은 유연(油然)하게 일어나고 비는 패연(沛然)하게 내리고 시들었던 싹은 비를 맞아 발연(浡然)하게 일어난다니, 농경문화에서 나고 죽은 사람들답게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 주석에는 유연(油然)은 구름이 성한 모양, 패연(沛然)은 비가 성한 모양, 발연(浡然)은 싹이 일어나는 모양이라고 나와 있다.
찌는 태양, 바짝바짝 타들어가며 거북등같이 갈라지는 밭에 시든 싹, 우르르 쿵쾅 천둥번개 소리, 후드득 마른 땅에 비 갈겨대는 소리,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물 냄새. 순식간에 생기를 찾아 일어서는 싹(苗).
단언컨대 이건 비유 따위가 아니라 웅변이거나 수사(修辭)이겠다. 연설자의 인격에 기인하는 감성적인 호소력, 그리고 논리까지. 맹자가 한순간에 펼쳐낸 자신의 필살기는 완벽한 수사의 전형이라고 할만하다. 여기 이런 아름다운 수사로 감성(pathos)을 한껏 자극해 놓으시고 선생, 이제 여기에다 논리(logos)를 더해(尙)주신다.
"(누가 따르겠느냐고요?) 지금 천하를 다스리는 자들은 모두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 합니다(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빼고 그 사람을 기다릴 것입니다. 진실로 이렇다면야 백성들이 따르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거침없이 쏟아질 테니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今夫天下之人牧未有不嗜殺人者也如有不嗜殺人者則天下之民皆引領而望之矣誠如是也民歸之由水之就下沛然誰能禦之)?"
급하다고 실을 바늘허리에 매고 바느질을 하던가? 느리다고? 우활(迂闊)하다고? 자연을 보라. 물이 느리기만 한가? 홍수에 물이 넘치는 것을 보라. 느리지만 순리(順理)에 따르기만 한다면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니던가?
패자(覇者)의 길이 아닌 왕도(王道)의 길. 나는 맹자의 말 이외에 뭐하나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이러니, 이러니 나는, 맹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孟子見梁襄王。出,語人曰:「望之不似人君,就之而不見所畏焉。卒然問曰:『天下惡乎定?』吾對曰:『定于一。』『孰能一之?』對曰:『不嗜殺人者能一之。』『孰能與之?』對曰:『天下莫不與也。王知夫苗乎?七八月之間旱,則苗槁矣。天油然作雲,沛然下雨,則苗浡然興之矣。其如是,孰能禦之?今夫天下之人牧,未有不嗜殺人者也,如有不嗜殺人者,則天下之民皆引領而望之矣。誠如是也,民歸之,由水之就下,沛然誰能禦之?』」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