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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진실위 조사관 백서를 내는가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① 연재에 앞서] 진실은 승자의 전리품이 아닙니다

등록|2011.06.24 16:14 수정|2011.06.24 16:14
지난 해 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올해 초부터 진실위 전직 조사관들은 '조사관 백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조서관 백서' 작업의 마무리의 일환으로 준비됐습니다. 공식 보고서의 딱딱함을 벗어나 진실의 조각들을 알기 쉽게 풀어나갈 것입니다. [편집자말]

▲ 대전 산내집단희생지에서 드러난 피학살자의 유해로 보이는 두개골. ⓒ 심규상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 61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2000년 역사 동안 가장 큰 사건이라고 새기는 6·25 '전쟁기념일'입니다. 이 전쟁으로 적어도 500만 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치고, 1000만 명의 가족이 이산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3년의 전쟁이었지만 모든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나라는 식민지의 유재를 청산하기도 전에 전쟁의 참화를 겪었고, 다시 긴 독재의 어두운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그로부터 6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켜켜이 쌓여 턱 밑을 치받고 있습니다.

반민특위에서 진실화해위원회까지

지금부터 약 6개월 전에 해산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5.~2010. 아래 진실화해위원회)는 식민지, 전쟁, 독재로 이어진 우리 근현대사의 왜곡되고 은폐된 진실을 밝혀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목적 아래 독립적인 한시적 국가기구로 설립됐습니다. 이후 국민들로부터 1만여 건의 신청사건을 접수받아 약 4년 8개월 동안 진실규명 조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멀리는 해방 직후의 '반민특위', 4·19 직후의 거창사건 진상규명과 '피학살자 유족회' 운동, 이승만 독재의 청산을 위한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 입법화, 가까이는 1995년 5·18 특별법, 1996년 거창사건 특별조치법, 2000년 4·3사건 특별법, 2001년 민주화운동보상법, 의문사법, 2004년 노근리사건 특별법, 반민족행위규명특별법의 연장선에 서 있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출범을 전후하여 '국정원과거사사건진상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2004~2007), '경찰청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4~200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5~2007),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2006~2009)가 각 정부기관 내에 창설되어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해당 정보수사기관들에 의해 자행된 각종 의혹사건을 규명하기도 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설립 배경- 피해자·유족들의 끈질긴 진상규명운동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가 설립된 배경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직접적으로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지속된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끈질긴 진상규명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1986년 8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가 창립되고 1998년 422일간의 천막농성투쟁 끝에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의 법적 조직적 기반이 되었지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에 관한 유족과 각계 시민단체들의 활동도 이 즈음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2000년 9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진상규명과 법제정 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2001년 10월 22일 참여연대, 민주노총, 민변, 민교협 등 전국의 6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민간인 학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전국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날 1961년 5·16 쿠데타로 해산된 '전국유족회'가 실로 40년 만에 재창립되는 역사적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보편적 방식에 입각한 포괄적 과거사정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이 제안에 대해 유족과 시민사회단체는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해결되지 못한 의문사 사건과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을 통합하는 포괄적인 과거청산 입법을 추진하면서, 과거사 관련 기본법(안)을 준비하여 입법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 2005년 5월 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안'이 재적의원 299명 가운데 250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찬성 159표, 반대 73표, 기권 18표로 통과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4년 그해 겨울과 이듬해 봄까지 이어지는 차디찬 노숙농성과 입법활동의 결과, 마침내 2005년 5월 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됨으로써 유족들의 염원과 노력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실로 피해자와 유족들은 '입법 투쟁 과정 속에서 스스로 금기시 되어온 문제를 제기하고, 좌우의 이념 문제를 극복하고 통합입법을 전개'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과거청산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사 청산의 세계사적 흐름

둘째, 한국 진실화해위원회는 과거사청산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하에 놓였던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 발생한 전쟁과 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국가 차원의 노력은 20세기 후반에 뒤늦게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세계 70여개 나라에서 제각기 형식과 내용은 달리 하지만 과거사청산에 나서고 있습니다. 최근 브라질의 호세프 대통령도 전임 룰라 대통령이 완성하지 못한 '진실과 정의 위원회'를 다시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나라 진실위원회와 과거청산작업에 비추어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대상의 범위가 가장 광범위한 편에 속합니다. 식민지, 전쟁, 독재로 이어지는 근 100년의 역사를 다루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4년여의 조사활동기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긴 편이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조사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직 전체적인 평가를 하기에는 이르지만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피해 당사자와 유족, 학자, 전문가, 민간활동가들이 주도하여 입법화를 이루어내고 국가로 하여금 과거청산에 나서게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과거사청산을 이루어 낸 많지 않은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 외 피해자 신청과 직권에 의한 사건 조사,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진술조사, 조사대상과 조사권한, 국가에 대한 사과 및 피해회복 조치 권고, 진실규명 결정 후 재심 등 사법적인 구제절차의 진행, (미완의) 희생자 배·보상 입법, 과거사재단의 설립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과거사청산운동은 세계 각국의 과거사 청산작업에 중요한 교훈과 선례를 주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미완의 과거사 청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5년 12월 1일부터 2006년 11월 30일까지 1년 동안 위원회와 246개 지방자치단체, 해외공관 등을 통하여 진실규명 신청을 접수받았습니다. 신청 접수된 사건은 총 1만860건으로, 유형별로 보면 항일독립운동 274건(2.5%), 해외동포사 14건(0.1%), 민간인 집단희생 7922건(73.0%), 적대세력 관련 1687건(15.6%), 인권침해 612건(5.6%), 기타 351건(3.2%)으로 민간인 집단희생 및 적대세력 관련 사건이 전체 신청 건수의 88.6%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신청인들은 60대가 4591명(42.3%)으로 가장 많고, 70대가 2612명(24.1%), 50대가 2173명(20.0%)이었으며, 60대 이상이 7757명(71.4%)으로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접수된 신청사건 1만860건에 대해 1차적으로 신청서에 기재된 내용을 중심으로 사건을 유형에 따라 분류하여 민족독립규명위원회,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인권침해규명위원회 등 3개 소위원회에 각각 배정하였습니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민족독립규명위원회에는 항일독립운동 274건, 해외동포사 14건 등 288건이, 집단희생규명위원회에는 민간인집단희생 7922건, 적대세력관련사건 1687건 등 9629건이, 그리고 인권침해규명위원회에는 인권침해사건 612건이 배정되었고 기타(비해당사건 등)로 분류된 351건은 사건 연관성을 고려하여 각 소위원회별로 배분하여 검토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4년 8개월 동안의 조사활동 결과, 2010년 6월 30일 진실화해위원회는 1만860건의 신청사건과 직권조사 사건 15건, 그리고 분리·병합 처리한 사건 등을 합한 총 1만1174건 전부를 처리 완료하였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위원장 포함 총15인의 전원위원회가 위원회의 주요 업무와 진실규명 심의·결정을 책임지는 조직이었습니다. 위원장은 1대 송기인(2005. 12. 1.~2007. 11. 30. 신부. 전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2대 안병욱(2007. 12. 1.~2009. 11. 30. 가톨릭대학교 교수. 전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 ), 3대 이영조(2009. 12. 1.~2010. 12. 31.경희대 교수. 전 바른사회시민회의 사무총장) 위원장이 각각 역임했습니다. 전체 4년여 활동기간 동안 상임위원은 총 7명, 비상임위원은 총 30명이 재임하였습니다. 위원들의 임기는 2년이었고 재임이 가능했습니다. 위원들은 국회 합의에 따라 대통령 추천 4명, 대법원장 추천 3명, 국회 의석비율에 따른 정당의 추천 8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학계(8~6명)와 법조계 출신 위원(6명)이 다수였고, 종교계와 정계 출신 위원은 1~3명에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가해측에 면죄부를 준 된 집단희생사건 조사

▲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전인미답의 조사활동 기간 중 여러 가지 쟁점사안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과거사정리기본법 입법과정에서부터 논란이 일었던 문제들이 하나 둘씩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국회 논의에서 진통을 겪으면서 조사대상 범위에 포함되었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의 경우 조사활동 초기에 집단희생사건 유형에서 떼어내 항일독립운동조사국에 배당됨으로써 사건의 성격이나 조사의 효율성 측면에서 적절했는지 여부가 이후에도 꾸준히 문제제기가 되었습니다.

또 전쟁시기 집단희생사건의 경우, '희생자' 확정 문제는 신청인이 주장하는 희생사실 및 희생의 적법성 여부를 확인하고 판단하는 데 기초가 되기 때문에 진실규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건발생 후 오랜 시간이 경과되어 희생사실을 객관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나 친인척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또, 집단희생사건들이 각각 서로 다른 매우 특수한 상황 하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희생자 판정기준의 객관성과 적용가능성을 둘러싸고 큰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점은 미군폭격사건 등에 관한 위원회의 마지막 진실규명 결정회의에서도 혼선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집단희생을 초래한 가해측 행위의 '불법성' 여부에 대한 판단문제에서도 가해측의 고의성, 계획성 여부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해측에 '면죄부'를 주고 피해 유족에게는 또 한번의 고통을 주었다는 비판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권위주의 정권이 아니다?

인권침해사건의 경우, 신청사건 외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한 위원회의 직권조사가 미진했던 부분이 지적되었습니다. 또 납북어부와 재일동포 간첩조작 의혹사건의 경우처럼 위원회 조사과정에서 확인된 미신청 추가 피해자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직권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2010년 1월 19일 제121차 전원위원회가 <5․3 동의대 화재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의혹 사건>에 대해 '노태우 정권은 권위주의 정권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각하 결정함으로써 초래된 이른바 '권위주의 통치시기' 논란은 위원회 안팎에서 크게 주목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위원회 내부에서도 당연히 일선 조사관들의 문제제기가 계속되었고, 민변과 인권단체들에서도 "국정원, 경찰청 등 국가기관의 자체 과거청산위원회들도 노태우 정권 당시 인권침해를 다뤄왔다. 진실화해위는 그간 노태우 정권시기 인권침해 사건도 다뤄왔기에 이번 기각결정은 몰지각한 논리로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 것"(2010. 4. 28.)이라며 반발하였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은 유족과 피해자들로부터 환영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해측으로부터 반발과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고문가해를 했던 것으로 규명된 당사자들로부터 계속된 이의신청이나 항의전화를 받기도 하였고, '적대세력 사건'에 관한 진실규명 결정 후에는 북한으로부터 "남조선의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최근에 지난 조선전쟁시기의 민간인학살사건들을 우리(北)와 결부시키고 있는 것은 역사와 진실에 대한 난폭한 왜곡"(2008. 7. 17. 북측 전민특위 대변인 담화)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진실은 전리품이 아니다

▲ 진실화해위가 2006년 7월 6일 오후 산청 덕산문화의 집에서 연 '시천삼장민간인학살사건' 현장설명회에서 한 할머니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지난해 진실화해위원회가 법적 기한 내 활동을 다하면서 위원회의 역사적 소임과 조사활동전반에 대한 평가의 필요성이 일선 조사관들뿐 아니라 학계와 전문가, 유족들로부터 제기되었습니다. 나아가 과거사 사건을 유족과 피해자들, 일부 학자들의 손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 속에 널리 알려 역사를 바로 아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진실규명되지 못한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이 한서린 세월 속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분발케 하고 있습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피해현황조사에 따르면,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사건 수는 전체 피해 사건의 5% 미만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신청인들의 70% 이상은 60세 이상의 고령층입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는 절박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설령 고령의 피해당사자들이 이대로 숨을 거둔다 하더라도 과거사가 땅에 묻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12월 말부터 2007년 6월까지 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514명(남자 414명, 여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의 신뢰성 제고와 치료 및 재활 측면의 화해 방안 모색을 위해 심리적 피해현황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이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사건 관련 직접 경험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는 비율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38.9%, 권위주의 시대 고문·가혹행위와 의문사 사건 48.8%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2세대 가족들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는 인권침해 피해자 26.7%, 집단희생 피해자 19.5%, 인민군 등 적대세력 또는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의 피해 사건 10.5%로 나타났으며 인권침해사건 당사자와 가족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증상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재직했던 일선 조사관들 가운데 일부는 피해자들의 고통이 전이되는 '참여외상' 증후를 보이기도 합니다.

진실의 기초는 대화와 이해

아직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만 피해자와 유족들의 상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전직 과거사 조사관들인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조심스럽게 과거사 관한 이야기를 귀가 있는 여러분들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조사결과는 여러 도서관에 배포된 두터운 진실화해위원회 반기별 보고서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만 공식보고서의 딱딱함 때문에 일상의 시민들이 막상 읽기 어려운 점이 있고, 또 해당 사건을 직접 담당한 조사관들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보고서의 행간에 담았던 진실의 조각들에 대해 해설을 해드리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 과거사청산운동에 관한 적실한 평가도 다수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없으면 의미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이 연재물은 그동안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백서를 준비해왔던 모임에서 백서작업의 마무리의 일환으로 흩어진 여러 조사관들의 후의와 적극적인 참여를 얻어 집단희생 사건과 인권침해사건을 위주로 6월 25일경부터 연재할 예정입니다.

며칠 전 한국전쟁에 관한 미국의 저명한 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수행된 한국 현대사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깊은 조사들을 종합해 보면, 지난 30년간 세계에서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대한민국처럼 성공적으로 이룬 경우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여러 가지의 공식적인 역사 조사를 진행하는 목적은 누군가를 탓하거나 냉전시대의 전투를 다시 벌이자는 것이 아니다. 남과 북의 화해를 추구하고, 한때 적이었던 상대방에 대해 동감(sympathy)하거나 공감(empathy)하는 것이 아닌, 이해(Verstehen)하자는 것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커밍스 교수의 덕담처럼 과연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진실이 승자의 전리품 전시장에 진열된 사회는 분명 민주주의사회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완성된 진실을 소유하기 보다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저 너머의 진실을 깨어있는 우리들 사이에 자리잡게 할 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것이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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