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살았으므로 소설 같은 수필을 쓴다네
[서평] 김미숙 수필가 첫 창작집 <배꽃 피고 지고> 발간
▲ 김미숙 수필집 <배꽃 피고 지고>의 표지 ⓒ 정만진
김미숙의 수필은 단아한 소설 같다. 인물이 있고, 사건이 있고, 배경이 있어 소설처럼 읽힌다. 그러면서도 갈등과 고난으로 점철되는 서사구조의 억센 기운을 인정과 화해 그리고 자기정화의 온유한 서정으로 녹여내기 때문에 글 전체에는 부드러움이 감돈다. 특히 문체가 잔잔하고 어조가 세심하여 흡사 이효석의 단편소설을 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단아한 소설 같은 김미숙 수필의 독창성
김미숙의 수필이 얼마나 소설적 요소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작품의 구조, 인물의 배치와 갈등 양상, 이야기의 전개방식 등을 따져보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진행하면 글을 장황하게 써야 하고, 급기야 논문으로 꾸며야 하니 독자들이 읽기에 불편해진다. 사람을 첫 인상으로도 판단할 수 있듯이, 각 작품의 첫 문장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 천착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아버지의 막장'의 첫 문장
남편에게는 병이 있다. - '남편의 봄 앓이'
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땅속으로 떨어졌다. - '배꽃 피고 지고'
나는 남편을 두고서 애인과 함께 동거 생활을 하고 있다. - '내 애인 사랑초'
하이 칼라 너머에서 생머리가 찰랑거린다. - '자화상 그리기'
아이를 만난 곳은 '따까이따이' 분화구 초입에서다. - '어린 마부'
탄광촌에 봄이 왔다. - '얼레지'
언뜻 밖에서 보기엔 병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없었다. - '넘고 싶지 않은 고개'
하굣길 학교 앞 좌판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 '알사탕'
14층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고물상이 보인다. - '도시 속의 섬'
니노이 국제공항이다. - '조선족 여인 장샤'
대문 손잡이에 검은 봉지가 걸려 있다. - '할머니와 막걸리'
움직이는 안개를 만난 곳은 능선에 오를 때였다. - '안개 속에 만난 상고대'
플랫폼에서 자정에 출발하는 기차를 기다린다. - '겨울 기차 여행'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다. - '아들의 친구를 훔치다'
학교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해당화 소녀'
그렇게 시작되는 첫 문장을 읽으면 독자는 궁금해진다. 물론 다른 갈래의 글을 쓰는 이들도 그런 미덕을 드러낼 수 있다면 자신의 표현력을 과시하는 마당을 얻게 되지만, 소설은 특히 그런 구조 능력을 요구한다. 김미숙의 수필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강력한 흡인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소설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 김미숙 수필가 (책 앞표지 날개의 사진) ⓒ 정만진
책의 전반부를 이루는 1부와 2부에 실린 22편의 수필을 순서대로 읽어보자. 그 중 무려 19편에서 작가의 특징적 제재 찾기 유형이 발견된다.
'열아홉의 꿈'- 학력고사와 아버지
'배꽃 피고 지고'- 과수원과 남편
'초록색 체육복'- 가방 분실 사건과 어머니
'아버지의 막장'- 탄광 사고와 아버지
'자화상 그리기'- 미술 선생님과 나
'남편의 봄 앓이'- 농삿일과 시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연탄 사고 두 건
'어떤 흔적'- 아저씨와 10.26
'내 애인 사랑초'- 자취방과 사랑초
'어린 마부'- 쌀과 할머니
'얼레지'- 친구와 친엄마
'알사탕'- 도둑질과 계집아이
'도시 속의 섬'- 노인과 사표
'넘고 싶지 않은 고개'- 아들 내외와 치매
'조선족 여인 장샤'- 장샤와 이민
'양심은 새싹을 틔우고'- 남편 친구와 사기극
'불꽃놀이'- 모델과 몰락
'오월이면 떠오르는 얼굴'- 젊은 어머니와 죽음
'할머니와 막걸리'- 할머니와 우유배달...
갈래는 수필이지만 언제든지 소설로 만들 수 있는 인물과 사건들로 가득차 있다. 소설화해도 충분한 제재들을 수필로 형상화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 속의 소설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하나같이 작가 본인과 직접 연관이 되거나 자전적 삶의 반경 내에 있다. 즉, 작가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 또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로 형상화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을 제재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작가 자신의 삶이 본질적으로 소설적이다. 직간접적 체험들을 수필의 제재로 채택한 결과 그의 수필들이 소설적 장점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소설처럼 살았으므로 소설의 미덕으로 충만한 수필을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김미숙은 실패한 소설처럼 여겨지는 수필을 쓰지는 않는다.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깔끔하게 갈무리할 줄 알기 때문이다. 세간에는 사건들을 너저분하게 풀어놓아 잡문이나 수기에 머물고 마는 소설류 수필도 허다하지만, 그런 잘못을 범하는 법이 없다. 결코 사건 자체를 소개하는 데 그치는 법이 없고, 다툼의 와중에 감정적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소설처럼 여겨지는 첫 문장을 써내는 기교적 능력을 갖추었으니 그의 수필은 독자의 마음에 읽어보고픈 유혹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의 수필이 문학적 향기를 지닌 예술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인다면, <배꽃 피고 지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설적 서두의 작품들이 '일 년 중에서 가장 춥다는 소한이 지났습니다', '죽음에도 의식이 따른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가슴속에 꿈 하나쯤 가지고 살아간다', '자기가 낳지 않은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희생과 봉사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 세대는 무조건 희생하는 시대였다'... 같이 평범한 수필적 문장으로 시작되는 일부 작품들에 비해 문학적 성취가 훨씬 높다는 점을 작가는 유념해야 한다. 도입부를 소설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하고, 직간접적 소설적 체험을 제재로 채택하되 사건 진술에 매몰되는 오류를 뛰어넘어 개인과 사회의 의미 찾기에 천착하며, 따뜻하고 세밀한 문체를 유지하는 자세, 그것이 본인의 문학적 특장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뜻에서, 앞으로도 자신의 경향성을 잘 유지하되, 세상 일반의 전형적 사건들을 글의 제재로 넓혀 채택할 수 있다면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일취월장의 진보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친 김에, 소설을 한번 써보면 어떨까 권유해본다. 시를 쓴다면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와 '사슴' 같은 경향성의 노천명을 닮겠지만, 문학적 세계관이 소설에 가까우니 오정희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단편을 쓸 수 있을 법하다. 본인이 자각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글을 쓰다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의외로 많다. 원고지 수십 장을 써도 끝내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작가의 말'은 소설을 쓸 숙명적 내면이 그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의식적 고백'이다.
덧붙이는 글
<배꽃 피고 지고>(김미숙 수필집, 수필세계사, 2011년,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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