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쏘고, 꾸무럭거리면 권총으로 또 쐈어"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③ 대전형무소 민간인 학살] "명백한 최고위층에 의한 처형"
지난해 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올해 초부터 진실위 전직 조사관들은 '조사관 백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조서관 백서' 작업의 마무리의 일환으로 준비됐습니다. 공식 보고서의 딱딱함을 벗어나 진실의 조각들을 알기 쉽게 풀어나갈 것입니다. [편집자말]
▲ 한국전쟁 직후 정치범 처형 모습 ⓒ 미국립문서보관소
여기 18장의 사진이 있다. 찍힌 지 50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본 사진들은 이후 논란에 휩싸였다. 사진에는 그동안 누구도 입밖에 내지 않던 대한민국 역사의 치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럴리 없다고 부인하는 이들에게 사진은 말했다. 이 사진이 조작된 거짓이란 말이냐고.
2000년 1월 5일 <한국일보>에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한국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문서와 함께 18장의 사진이 실렸다. 제주4·3사건을 추적해 온 재미교포 이도영 박사가 발굴, 공개한 자료들이었다. 사진은 충격적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대전 산내에서 있었던 대전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건을 한 컷 한 컷 기록하고 있었다. 이후 사진 속 현장인 대전 산내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50년 만에 봉인 풀린 사진 18장, 진실을 말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도 2005년 12월 설립된 이후 희생자 유가족들의 피해 신청이 빗발쳤다. 그 결과 대전형무소뿐 아니라 전국형무소에 수감된 정치·사상범들이 한국전쟁 초기에 학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진실규명은 쉽지 않았다. 사건의 성격상 유족들은 학살 현장에 접근할 수 없어 학살 과정을 목격할 수 없었고, 다만 정치·사상범들이 총살됐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정부의 공식 기록인 <한국교정사>(법무부, 1987)에 관련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한국교정사>는 대전형무소와 관련해 "전세가 거듭 악화되자 7월 14일, 15일에 걸쳐 재소자를 대구로 이송하고"라고만 나와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 사진들은 무엇인가? 사진들이 조작된 거짓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사진이 조작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영국신문 'Daily Worker'지 기자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의 1950년 8월 9일자 기사와 그가 1950년 발간한 소책자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목격했다(I Saw the Truth in Korea)>에서, 필립 딘(Philip Deane)의 책 <나는 한국의 전쟁포로였다(I Was A Captive in Korea)>(Norton, New York, 1953)에서, 그리고 노가원의 <대전형무소 4천3백명 학살사건>(1992.2,<말>)과 심규상(현 <오마이뉴스> 기자)의 <진상보고: 사진과 증언으로 재연한 대전형무소 학살사건>(2002.2 <말>) 기사 등이 익히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에 진실위 조사관들은 18장의 사진들과 위의 기사, 책을 근거로 당시 대전형무소에 근무했던 형무관(간수)과 사진 속 인물들로 추정되는 당시 대전 경찰들, 당시 대전에 주둔했던 헌병들을 찾아다니면서 사건의 전모를, 진실을 캐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실 규명은 쉽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말해줄 수 있을 만한 이들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정치·사상범 학살에 동원됐거나, 이를 증언해 줄 형무관과 경찰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진실을 끌어내는 것도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꼭 진실을 말해야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어렵게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힘겹게 하나 둘씩 꺼내놓은 진실은 너무 끔찍해, 듣는 조사관들도 감당하기가 몹시 힘들었을 정도였다. 미군 문서의 사진과 그렇게 어렵게 얻어낸 당시 현장에 있었던 증언들을 통해 1950년 학살의 진실을 대전형무소 학살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보자.
형무소 사람들을 기다리던 산내골 구덩이 10개
▲ 1950년 7월 'Picture Post'지에 실린 사진. 대전형무소가 아닌 공주형무소 모습이다. ⓒ Picture Post
"재소자 신분장을 전부 소장실로 가지고 올라오라고 했어요. (중략) 국가보안법이나 포고령 위반, 국방경비법 등 정치·사상범과 10년 이상의 일반사범의 신분장은 전부 빼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잘못된 게,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신분장 첫 장의 죄명만 보고 분류했어요. 10년 이상의 일반사범의 경우 10년을 받았어도, 가령 5년 이상의 형을 산 사람과 감형 받은 사람은 구분을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10년 형을 받고 8년을 산 사람도 죽었어요. 이런 점이 매우 애석해요."
이렇게 분류된 대전형무소의 정치·사상범 등은 형무관들에게 묶여서 헌병들이 징발한 트럭에 실렸다. 이들은 대전형무소에서 희생 장소인 산내 골령골까지 이송됐다. 당시 재소자의 호송업무를 담당한 한 형무관의 증언이다.
"뒤로다가 두 사람을, 한 사람 왼손하고 옆 사람 오른손 하고 어긋매끼로 묶었어요. 묶어서 감방에서부터 현관까지 끌고 왔어요. (중략) 끌고 와서 재소자들을, 헌병이 징발한 트럭에 가득 실었어요. 헌병들이 총부리를 겨누면서 재소자를 트럭에 꽉꽉 채웠어요. 재소자들은 그때까지 트럭에 서있는 채로 있었어요. 그리고 헌병들은 재소자들을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앉으라고 했어요. 못 앉을 것 같죠? 재소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앉아서 아주 납작해졌어요."
▲ 한국전쟁 직후 정치범 처형 모습 ⓒ 미국립문서보관소
산내 현장 입구에 재소자들을 실은 트럭이 도착하면 청년방위대들이 정치·사상범들을 구덩이 앞에까지 끌고 갔다. 당시 산내 현장에는 경찰들이 외곽을 둘러서서 경비하고 있었고, 청년방위대와 산내 주민들이 판 구덩이 10여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구덩이의 깊이는 1m 50cm 정도, 넓이는 3m 정도, 길이는 30m~50m 정도였다.
쏘고 또 쏘고 군복 갈아입고 나서 또 쏘고
총살 집행은 헌병대 중위의 지휘로 헌병 1개 분대와 경찰 2개 분대가 담당했다. 헌병대 중위의 "사격개시" 명령에 따라 차출된 경찰과 헌병 각각 10명이 정치·사상범들의 등을 발로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았다. 이후에는 헌병대 중위와 헌병들이 확인 사살했다. 당시 총살 현장을 목격한 대전형무소의 한 형무관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m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 한국전쟁 직후 정치범 처형 모습 ⓒ 미국립문서보관소
정치·사상범들 외에도 10년 이상 형을 받은 일반사범들도 학살됐다. 당시 헌병대 중위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단 1차례 확인사살을 했다는 한 대전형무소 형무관은 살인강도로 10년형을 받았지만 잔형이 1년 남은, 직원식당에서 일했던 일반사범이 "나 안 죽었어요. 제발 나 좀 한 방 쏴주세요"라고 애걸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총살과 확인사살이 끝나자마자 헌병대 중위의 지휘 하에 청년방위대들이 시신들을 구덩이에 쌓아 넣기 시작했다. 이들은 초기에는 학살된 시신을 차곡차곡 구덩이에 쌓았으나 점차 시신이 많아지자 나중에는 거꾸로 쑤셔 넣다가 마지막에는 헌병대 중위의 명령에 따라 큰 돌로 시신들을 눌러 버렸다. 다른 한편에서는 시신을 넣을 구덩이를 계속 파고 있었다.
현장을 지휘했던 헌병대 중위는 뒤에서 권총을 들고서, 헌병과 경찰이 사격을 주저하거나 청년방위대들이 시신 쌓는 데 머뭇거리면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붓고 공포탄을 쏘았다. 당시 총살 현장에 동원된 경찰 한 명은 이렇게 증언했다.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 지휘관이 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 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
▲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미군문서에 실린 한국전쟁 전후 정치범 처형 모습 ⓒ 미국립문서보관소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국군이 대전에서 후퇴한 1950년 7월 17일 새벽까지 약 4900명의 대전형무소의 재소자와 예비검속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보도연맹원이 집단학살됐다. 이후 소문을 들은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산내로 갔다. 하지만 시신이 겹겹이 쌓여 있는 데다가 한여름이라 심하게 부패되어 있어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손이 너무 떨려 담뱃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조사관들에게 이처럼 귀중한 증언을 해준 형무관, 경찰, 헌병들 모두 60여 년 동안 당시의 끔찍한 기억들을 가슴 한 편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고통과 회한 속에 살아왔다. 한국전쟁에 대해 할 말이 있다던, 당시 학살에 동원된 한 헌병은 조사관을 만나자마자 묻기도 전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 장소도 잊지 않아. 충청도 옥천 근방에 산내면이라고 있어요. 거기 데려가서 싹 드르륵 해 버렸어요. (죽은 사람들이) 아주 무지기수지, 많지. 나도 그때 거기에 갔었는데. 무지하게 많더라고. 현역들이 하나하나 갈긴 것도 아니야. 그냥 드르륵 드르륵 하고선, 안 죽으면 권총으로 갈기고 이러고 왔는데. 참 전쟁이라는 건 하지 말아야 돼. 정말 비참하더라고."
당시 총살 집행에 동원된 한 경찰은 이렇게 증언했다.
"보안사범이라고 애매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그리고 총살을 집행한 경찰들은 거의 대부분 총을 처음 쏜 사람들이었어. 게다가 전투과정이 아니고, 거의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지. 그래서 교대로 총살을 집행하는 와중에 잠깐 쉬면서 담배를 피려고 해도 손이 너무 떨려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일 수가 없었어. 그리고 총살을 집행하고 집에 와서는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었어."
조사관과 함께 학살현장을 확인하러 갔던 당시 경찰 한 명은 학살 현장인 산내로 가는 길에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내가 계속 대전에 살았지만, 산내에 가는 것은 60년 만에 처음이다"라고 몇 번씩 조용히 되뇌었다. 그리고 그는 산내 학살현장 입구에 가서도 당시 학살 현장이 저 너머라고만 지목했다. 같이 현장에 가보자는 조사관들의 권유를 조용히 뿌리치고, 빨리 돌아가자고만 했다. 조사관들도 더이상 그에게 당시 상황을 캐물을 수가 없었다.
학살현장 호송에 동원된 형무관들, 학살 집행에 동원된 경찰, 헌병들 역시 대부분 그 끔찍했던 기억의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한 채 60여 년의 삶을 버텨내고 있었다.
진실위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후 전국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1625명의 정치·사상범 등 재소자와 전쟁 발발과 동시 예비검속돼 인근 형무소에 일시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이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희생됐다. 하지만 당시 전국 형무소의 수용 인원은약 4만 8000여 명으로 1625명은 희생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대전 산내 골령골에 당시 희생자 유해로 보이는 두개골이 나뒹굴고 있다. ⓒ 심규상
그렇다면 과연 당시 누가 이들에게 학살을 명령했는가?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이를 반성하며 증언을 해준 고위급도 없었다. 다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한국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미군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북한의 라디오에서는 최근 남한에서의 잔혹성과 집단학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비록 라디오에서 상당 부분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전쟁 발발 후 남한 경찰이 집단적인 학살을 자행해 온 것이 사실이다.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함락됐을 당시 형무소에서는 수천 명의 재소자들이 풀려난 것으로 보고됐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execution)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학살이 전방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 점을 볼 때, 이러한 처형명령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다.(중략) 사진들은 미 극동군사령부 KLO(Korea Liaison Officer, GHQ, FEC) 애버트(Abbott) 소령이 라이카 사진기로 찍고, 미 육군 무관부원이 현상과 인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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