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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버마 민주화운동가 또는 한국 반정부운동가?

세계 난민의 날에 들어본 한국거주 버마난민의 삶 ②

등록|2011.06.28 10:46 수정|2011.06.28 10:47

▲ 2007년 여수 외국인 보호시설 화재 사건 때 발언하는 필자 ⓒ 소모뚜


우리 버마행동 회원들은 난민 인정이 거부되자 법무부 장관에게 이의신청을 했다. 지난번 기사에 얘기했던 사소한 활동이라 해도 버마 군사정부는 버마인들에게 무거운 중형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오랫동안했던 다양한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귀국시 분명히 감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이의 신청에서 밝혔다.

이의신청한 후 몇 주 후, 난민실에서 면담하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난민실 관계자는 우리단체의 다양한 버마 반정부 활동에 대해 질문했고 나는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줬다. 그런데 그는 나를 놀라게 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버마행동이 버마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왜 한국 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냐고 물어본 것이다.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궁금했다. 독재국가인 버마정부가 하고 있는 못된 짓을 한국정부가 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우리단체가 어떤 활동을 하기에 한국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나를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참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가 버마 반정부 운동가들이면서도 난민지위를 받지 못한 이유를 눈치 챘다. 그의 질문에 대한 얘기하기 전에 2007년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다.

지난 2007년 2월 11일 전라남도 여수시 화장동 여수출입국관리소의 외국인 보호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해 이주노동자 10명이 숨지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화재사고 당시 보호(?) 중인 55명의 외국인 가운데 28명만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도움(?)으로 구조되었고, 나머지는 불길과 쇠창살에 갇혀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말았다. 외국인 보호시설에는 그 흔한 스프링쿨러와 화재경보기 등 소방시설이 제대로 작동치 않았다.

전남 여수지역 사회단체들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맞아 희생된 이주노동자들을 추모하고 재발방지 대책과 인권개선책 등을 정부에 촉구하는 추모회를 가졌다. 특히 화재참사 이후에도 정부는 위법성 논란이 되는 강제추방과 반인권적 외국인 구금시설을 계속 운영하고 있고, 법무부(출입국)가 나서서 외국인노조 탄압과 표적단속 등을 일삼고 있다.

한국이 희망의 땅이라고 생각해서 들어 온 이주노동자들이 매일 성실한 노동자로서 일을 하고 있지만 단지 체류허가 기간을 초과했다는 이유가 죽음의 이유로 변한 것에 대해 이주노동자출신인 우리단체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그 때 참사 추모제나 성명서에 여러 인권단체들과 함께 참여했다.

난민실 관계자의 질문은 우리단체가 왜 그 참사에 함께하고 왜 성명에 참여했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이 나의 가슴을 찡하게 했고 서운하게 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사랑하는 가족에게 건강히 잘 다녀오겠다고 약속하고 한국에 들어 온 이주노동자들이 재가 되어 가족 곁으로 간다는 것이 같은 이주노동자인 우리뿐만 아니라 누가 들어도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인데, 모두에게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이주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없기를 원해서, 아무도 억을하게 당하지 않기를 원해서 그 추모제 활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내가 난민실 관계자의 질문에 속상하지만 이렇게 대답을 했다.

"우리가 한국정부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얘기한 것이고 행동한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에 찬성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버마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한다 해도 자신이 와 있는 곳의 상황에 대해 외면할 수 없다. 우리가 와 있는 곳에서 인권이 존중되는가도 버마민주화만큼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는 내 나라 버마만 민주화가 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와있는 곳에서도 제대로 민주화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함께 노력한 것이었다. 단지 난민인정을 받으려고 눈앞에 있는 인권침해까지 모른 척 할 정도의 비겁한 마음은 없어서 그런 행동을 했다."

그는 '그럼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물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고 인권을 무시하면 버마정부든 한국정부든, 어느 정부든 가만있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는 내가 한 대답을 꼼꼼히 적었다. 그날 인터뷰가 끝난 후 집에 들어가는 길에 마음이 참 아팠다.

자신의 꿈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까지 불에 타서 재가 된 이주노동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더구나 이런 상황이 더 이상 없도록 노력하는 이주노동자들까지 반정부 세력으로 보인다는 현실을 정말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난민심사란 출신국가로 귀국시 박해받을만한 반정부 활동을 했나 안 했나를 심사하는 것이지, 한국정부에게 어떤 말을 했느냐를 심사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개월 후, 우리의 이의신청도 불허당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 때문에 이런 결정이 나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알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 그런 사실을 우리의 난민신청 관련 담당 변호사를 통해 알았지만 몇 개월 후에 그 사실을 내 귀로 직접들을 수 있었던 날이 왔다. 그 얘기를 다음 글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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