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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그림에게, 그림이 시에게 입 맞추다

시인 오하룡, 화가 서홍원 <오하룡 서홍원 시화집> 펴내

등록|2011.07.05 16:08 수정|2011.07.05 16:10

시인 오하룡올해 칠순을 훌쩍 넘긴 오하룡(71) 시인이 화가 서홍원과 마음을 포개 <오하룡 서홍원 시화집>(도서출판 경남)을 펴냈다 ⓒ 이종찬

이름 좋아서인가
아무도 아무개의 아재비도 그 여편네도
그 이름 문제 삼지 않는다
거기 들락거리는 연놈 문제 삼지 않는다

-'러브호텔' 모두

글쓴이 고향인 창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원로 시인인 오하룡 선생이 '어느 날 갑자기' 시화집 한 권을 보냈다. <오하룡 서홍원 시화집>(오하룡, 서홍원 저, 경남 펴냄)이 그 책이다. 글쓴이는 이 책을 펼치는 순간 1970년대 끝자락이 흑백필름처럼 스쳤다. 그때 그 지역 시인들이나 시인지망생들이 화가들이나 화가지망생들과 어울려 일 년에 한 번 연례행사처럼 열었던 게 시화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지역 시인들이나 그 지역 예비시인들이 시화전을 연 곳은 번지르르한 전시장이 아니라 대부분 작은 다방이었다. 왜? 우리들로서는 전시공간을 빌리는 돈을 따로 주지 않아도 되었고, 다방 주인으로선 그 시화전을 보기 위해 여러 손님들이 찾아와 커피를 마셔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기 때문이었다.       

그 가슴 설레던 풍경... 시와 그림이 어우러져 '형편 없었던 시'가 멋진 작품으로 거듭나던 그 오래 묵은 기억... 언젠가부터 시뻘건 녹이 슬어 기억 속에서 깡그리 사라진 것 같은 그 추억이 이 시화집 한 권에서 새로운 시화로 거듭나 촛불을 들고 있으니, 이 어찌 반갑고도 살갑지 아니한가. 특히 요즘처럼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에 시와 그림으로 새롭게 거듭난 이 시화집 한 권이 던지는 뜻은 몹시 깊지 아니한가.         

'시가 곧 그림이요, 그림이 곧 시'

<오하룡 서홍원 시화집>이 시화집은 시가 그림에게, 그림이 시에게 뜨거운 포옹을 하며 달콤하고도 짙은 입맞춤을 하고 있다 ⓒ 이종찬



"동시 분위기의 소품 몇 편, <창원별곡>과 그 이후 시집 <내 얼굴>의 작품 등에서 몇 편을 골라 서 화백에게 넘겼다. 그는 지난 여름 한창 더울 때 화실에 박혀 이 시화를 그렸다. 그가 땀을 흘리며  시화를 그린 걸 생각하면 더욱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다. 내 작품이 과연 그를 땀 흘리며 그리게 하는 가치가 있는가." - 후기 몇 토막


올해 칠순을 훌쩍 넘긴 오하룡(71) 시인이 화가 서홍원과 마음을 포개 <오하룡 서홍원 시화집>을 펴냈다. 오래 묵은 '시화전'에 얽힌 추억이 떠오르는 이 시화집은 시가 그림에게, 그림이 시에게 뜨거운 포옹을 하며 달콤하고도 짙은 입맞춤을 하고 있다. 마치 '시가 곧 그림이요, 그림이 곧 시'여서 서로 한 몸이라는 듯이 그렇게.

모두 36편이 실려 있는 이 서화집 한 쪽에는 활자가 된 시가, 맞은 편 한 쪽에는 글씨와 그림이 된 시가 한평생 함께 살아온 노부부처럼 정겨운 눈빛을 마주치고 있다. '운동장' 연작 3편, '버드나무', '외제선물', '천석이', '사팔이 애꾸', '곰절에 가면', '남천에게', '내 얼굴',  '저 물빛', '아침과 할머니와 요강단지', '통일이여'가 그것.

오하룡 시인은 4일 저녁 전화통화에서 "내가 <창원별곡>을 펴내고 얼마 되지 않아 그때만 해도 이름만 알고 있던 그가 산호동 내 집을 찾아왔다"고 화가 서홍원과 첫 만남을 꺼낸다. 그는 "창원을 주제로 하여 실향 혹은 이주민의 설움 같은 것을 푸념한 내 작품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되짚는다.

그는 "의기투합 이후 그는 내가 기억하는 많지 않은 화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라며 "지난해 서 화백의 전시가 동서화랑에서 조출하게 열렸다. 그 자리에서 무슨 예시 같은 것이 있기나 한 것처럼 불쑥 시화전 얘기를 꺼내었고 그의 반응이 신통찮았으면 내 소심한 성격으로는 더 이상 진척시키지도 못했을 텐데 그가 선뜻 동의하고 나서는 바람에 그만 이런 자리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귀띔했다.

포장된 모든 길은 '사팔이 애꾸'

아스팔트인지 시멘트인지
그 재료 무엇이든 알 바 없어요
아무튼 그런 걸로 포장해 나가다가
한 이십년 중단한 채 방치한
그 길이예요 우리는

-'사팔이 애꾸' 몇 토막

창원은 글쓴이가 태어나 20대 허리춤까지 몸과 마음을 부빈 고향이다. 오하룡 시인도 어릴 때 글쓴이와 같은 마을 가까이에서 살았다 했다. 그 살붙이 피붙이가 된 고향 창원은 지금 모든 것이 180도로 바뀌었다. 창원공단이 들어서면서 논과 밭, 길, 도랑, 야산, 느티나무 등이 깡그리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반듯한 빌딩과 아파트만 서로 잘난 척 우쭐거리고 있다.

글쓴이 또한 고향 창원에 가면 큰 산을 바라보며 '저쯤에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이 있었지' '저쯤 굽이쳐 흐르는 남천 곁에 보리밭이 물결치고 있었고,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지'라고 흐릿한 기억을 되짚을 수밖에 없다. '조국 근대화'란 군홧발 아래 창원이 살점을 모두 빼앗기고 남은 그 뼈대에 '물질'이란 이상한 살점을 억지로 붙였기 때문이다.
  
시인 오하룡도 마찬가지다. 그가 바라보는 창원에 있는 모든 길은 '사팔이 애꾸'다. "먼지 뒤집어쓰고 다닐 / 비포장도로 없"고 "닷새장 기다려 / 쌀가마 지고 나설 걱정 없"다. 창원에는 이제 "'다음 장날 보자' / 이제 기다리는 그리움"(장보기) 그마저 사라지고 없다. 시인이 바라보는 창원은 "이제는 다 없어졌다".(천성)

"곰절에 가면 / 물빛 같은 우리 어린 날 / 거울처럼 비치"지만 이제는 "꿈속처럼 뒤돌아 보"(곰절에 가면)일 뿐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곰절은 창원에 있는 가장 큰 절인 성주사를 말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도 창원처럼 변했다. "중국은 대만을 자국영토라고 / 아무도 간섭 말라" 하고 있고, "일본은 독도를 틈만 나면 / 자국영토라고 우기고"(그러고만 있구나) 있다.

시화집에 실린 시와 시화이 서화집 한 쪽에는 활자가 된 시가, 맞은 편 한 쪽에는 글씨와 그림이 된 시가 한평생 함께 살아온 노부부처럼 정겨운 눈빛을 마주치고 있다 ⓒ 이종찬




자연과 사람이 '삼라만상'이란 이름으로 거듭나야     

이제 빌어볼거나
손바닥이 닳도록
무르팍 뭉개져 남아 남지 않도록
내 파닥이며 꾸중거린 물빛
맑아지게 빌어볼거나
빌지 않아도 될 지점에 이르러
드디어 보이는 저 물빛

-'저 물빛' 모두

시인 오하룡은 사람들이 사람만 편하게 만들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빌고 또 빈다. 사람과 대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손바닥이 닳도록" 빈다. 그래야 이 세상 곳곳에 추억과 그리움도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도 모르게 "파닥이며 꾸중거린 물빛 / 맑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하룡 서홍원 시화집>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시와 글씨, 그림으로 뭉쳐 있다. 이 시화집은 시와 그림이 '시화'란 이름을 달고 한 몸으로 거듭나듯이 이 세상도 자연과 사람이 '삼라만상'이란 이름을 달고 한 몸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세상은 제 아무리 잘난 척해도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 오하룡은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구미 창원 부산 등지에서 자랐다. 1964년 시동인지 <잉여촌> 창간동인이며, 1975년 시집 <모향>을 펴내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모향> <잡초의 생각으로도> <별향> <마산에 살며> <창원별곡> <내 얼굴>이 있으며, 동시집 <아이와 운동장>을 펴냈다. 한국농민문학상, 시민불교문화상 등 받음. 지금 계간 <작은 문학> 발행인을 맡고 있다.

화가 서홍원은 1945년에 태어나 2007년 <국제아트페어>(삼성코엑스), 2008년 <서울아트페어>(예술의 전당), 한중일 해외전을 수 차례 열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개인전 12회, 초대전 및 그룹전 300여 회를 열었다. 지금 창원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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