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향해 솔찌기, 솔찌기 우는 새가 그립다
'콧털시인' 김이하 세 번째 시집 <춘정, 火(화)> 펴내
▲ 시인 김이하김이하가 두 번째 시집 <타박타박>을 펴낸 지 10년을 훌쩍 넘겨 세 번째 시집 <춘정, 火(화)>(바보새)를 펴냈다 ⓒ 이종찬
어제 밟고 온 나뭇잎들
이 새벽바람에 오그라들고 있는지
누운 머리 위에서 날린다
어쩌면 미칠 일만 남은 삶
허, 웃었다
-'허, 웃었다' 몇 토막
지금은 그 자리에 박용수 시인 대신 그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다. 그는 우리 문단에서 '콧털시인'으로 통하는 김이하 시인이다. 우리 문단에 콧털로 이름 높은 이는 작가 천승세다. 그 다음이 시인 김이하, 박재웅 등 여러 명이 있다. 박재웅 시인은 요즘 마음에 무슨 큰 출렁임이 있었던지 그렇게 애지중지 기르던 콧털을 싸악 깎아버렸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카메라에 담는 시인 김이하. 그가 콧털을 기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좋은 날'이 올 것 같지 않은 이 세상, 이 정권에 대한 반항일까. 아니면 저항일까. 그가 카메라에 담고 있는 그 세상, 그가 시에 담는 그 세상에는 마침내 '더러운 날'을 콧털로 걸러낸 '좋은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나는 거꾸로 가는 세상을 앞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시를 쓴다
"어설픈 시는 한 뼘이나 자랐을지 말지 하는 동안 내가 건너온 풍상은 꿈을 한 길은 더 깊이 쑤셔 박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모자란 것을 누가 보아줄까 오금이 저린다. 그래도 이렇게 밀고 나가야 한다면 부끄러움도 무릅써야 하는 것 아닌가, 삶이란 멍에가 그렇듯이." -'시인의 말' 몇 토막
'콧털시인' 김이하가 두 번째 시집 <타박타박>을 펴낸 지 10년을 훌쩍 넘겨 세 번째 시집 <춘정, 火(화)>(바보새)를 펴냈다. 모두 66편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고 있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이 세상을 더럽고 아니꼬운 동네로 여긴다. 죽어라 일을 하는 사람만 더 죽어나는 세상,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이 가지게 하는 세상이 시인이 살아가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모과 익을 무렵, 지난여름의 편지, 겨울에서 봄으로 나는 새를 보았나?, 나에게도 부러질 가지가 있다, 꾀꼬리는 나선형으로 우짖는다, 내 고막은 젖었거나 슬프다, 내 핏속엔 올챙이가 산다, 갈대숲에는 아버지가 산다, 촛대바위 가는 길, 골방에서 벼린 양심의 날, 솔찌기새를 아는가, 당신도 촛불이다, 한 바보 가면 또 한 바보 온다 등이 그 시편들.
시인 김이하는 글쓴이가 사흘이 멀다 하고 자주 만나 막걸리를 나누는 시인이다. 그는 처음에는 말이 없다. 그저 막걸리만 꿀꺽꿀꺽 삼킨다. 그러다 가끔 한마디씩 툭 던진다. "이 세상은 자꾸만 거꾸로 거꾸로만 나아가고 있다"고. 이 어려운 세상살이를 하면서도 돈 한 푼 되지 않는 시를 쓰는 까닭은 결국 "거꾸로 가는 세상을 앞으로 앞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라고.
이 세상을 향해 솔찌기, 솔찌기 우는 새가 그립다
▲ 김이하 세 번째 시집 <춘정, 화>모두 66편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고 있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이 세상을 더럽고 아니꼬운 동네로 여긴다 ⓒ 바보새
솔찌기, 솔찌기 우는 이 새를 어디서 보았던가
육이구, 속이구, 사기구가 있던 그땐가
……
분수처럼, 솔찌기새 소리처럼 솟구치는 무언가 있다
무언가 있었다, 내 속에, 그리고 네 속에
그러나 그런 너를, 그리고 나를 어디서 보았던가
일제와 광복과 사일구와 오일육과 오일팔과 육이구와
한 꿰미에 꿰어진 닭꼬치처럼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민주란 이름의
자본주의란 이름의 찌꺼기들
솔찌기새가 말한다, 솔찌기, 솔찌기, 솔찌기……
솔찌기새 곡소리 들었다
-'솔찌기새를 아는가' 몇 토막
시인 김이하는 이 팍팍하고 마구 뒤틀리기만 하는 세상을 향해 솔찌기, 솔찌기 우는 새가 못 견디게 그립다. 시인 홀로 아무리 솔찌기 솔찌기 울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일제와 광복이 마치 친한 벗처럼 악수하고 있고, 사일구와 오일육이 서로 '과거는 잊자'라며 살을 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일팔과 육이구도 일제와 광복, 오일육과 마구 뒤엉켜 있다. 어느 게 참다운 '민주'인지, 어느 게 압제와 군홧발, 더러운 자본주의인지 통 알 수가 없다. 마치 "한 꿰미에 꿰어진 닭꼬치"처럼 보인다. 솔찌기, 솔찌기 아무리 목청이 터져라 울어도 이제는 너무 끈끈하게 오래 뒤엉켜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시인이 솔찌기새가 되어 곡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시집 제1부는 '그대' 혹은 '네'라는 여자를 향해 끙끙 앓고 있는 그리움이다. 그 여자는 한때 지독하게 사랑했던 '그대'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이기도 하다. 제2부는 시인이 이 거칠고 힘든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삶, 그 삶에 비수처럼 날카롭게 꽂히는 파편들이다. 그 파편들은 꾀꼬리가 되어 나선형으로 우짖고, 올챙이가 되어 시인 핏줄을 따라 헤엄치기도 한다.
제3부는 가족사다. 시인은 '제삿날', '아버지를 밀치다', '휴―', '갈대숲에는 아버지가 산다', '어머니의 달력' 등을 통해 피붙이들이 살아온 피멍든 삶에 스스로를 비춘다. 제4부는 시인이 바라보는 지금 세상이다. 그 세상은 '한 바보 가면 또 한 바보' 오듯이 희망조차 '바보'가 되는 세상이지만 시인은 희망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저만치 희망은 다가온다
내가 배운 말이나 노래는
원래 새의 것이었다
혹은 바람의 것이었고, 시냇물의 것이었다
......
이제 다시 가마, 생명의 땅으로 가마
숲을 떠난 소리는 들을 게 없고
강을 떠난 노래는 부를 게 없다
파도에 따귀를 맞으면 또 어떠리
-'땅의 법열' 몇 토막
시인 정계영은 시인 김이하 시집에 대해 "내장 속 똥물 산수유 꽃망울로 터지고 핏속에 키우던 올챙이 떼들이 봄길 위를 간질이며 뛰쳐나온다"라며 "김이하 시인의 숨소리가 낮은 음조라서 더 그런가, 욱신거리는 아픔이 고스란히 전이되어 이토록 먹먹한 것은, 투명한 그의 등뼈를 가만가만 두드려주고 싶다. 만화방창 흐드러지고 말 이봄 내내"라고 적었다.
소설가 최성배는 "바이칼 호수의 물을 다 마시고, 천 년 전 하늘하늘 밑으로 떨어져간 삭은 나뭇잎 하나는 그 아득했던 화엄계곡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던가. 글과 글, 도처에 쓸쓸한 바이러스가 잔뜩 묻어나는 어둡고 스산한 그대의 그림자는 도대체 어디로 갔더냐?"라며 "길고 긴 우리의 아픈 이야기들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단 몇 줄 속에 녹여버린 요절하지 못한 천재(코털)의 늠렬하고 뜨거운 10년 여정이 또 다시 부드러운 시어들로 파드득거린다"고 평했다.
시인 김이하 세 번째 시집 <춘정, 火(화)>는 시인이 어릴 때부터 꿈꾸었던 그 '좋은 날' 찾기에 다름 아니다. 그는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까불든 말든 눈치 보지 않는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배가 조금 고파도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세상', 이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저만치 다가오는 '희망'을 붙들어 매기 위해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
시인 김이하는 1959년 전북 진안군 밧머우내에서 태어나 1989년 <동양문학> 여름호에 시 '월미도', '휘파람'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잡지사 기자, 출판사 편집장을 맡아 일한 그는 펴낸 시집으로는 <내 가슴으로 날아간 UFO> <타박타박>이 있다. 공동시집으로 <사랑은 詩(시)가 되었다> <멀리 사라지는 등이 보인다> 등이 있으며, <옛멋전통과학> <세계의 신화전설> <제중원 백정의사 박서양>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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