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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내가 만난 윤동주

[저항시인 윤동주의 모교를 찾아가다 ②]

등록|2011.07.08 18:52 수정|2011.07.08 21:24
기자말
4박5일 일정으로 연길과 북경을 둘러보는 중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포함해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인 두만강,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대성중학교를 거쳐 자금성과 이화원, 만리장성 등을 두루 살펴 보았습니다. 몇차례에 걸쳐 여행기를 게재합니다. 취재에 도움주신 여천NCC노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약 3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길림성에 있는 룡정(龍井)으로 이동했다. 룡정은 윤동주 시인이 살던 곳으로 그가 졸업한 대성중학교와 일송정 그리고 혜란강이 있은 곳이다. 대성중학교는 이후 룡정중학교로 합병된다.

▲ 룡정중학교 이은정(39세) 역사선생님이 일제때 만주벌판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던 주변유적지를 설명하고 있다. 좌측 위에서 두번째 사진이 일송정이다. ⓒ 심명남



유일하게 우리 민족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는 이 학교를 찾아가는 길에 일송정이 있다. 북간도 룡정을 배경으로 작시한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푸른 솔'은 룡정의 대표적인 항일운동 유적지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길에 가이드가 "저게 일송정이니 보세요" 라고 말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소나무가 아닌 정자만 달랑 보인다. 이곳은 농사가 잘되기로 소문난 옥토인데 일명 비암벌로 불린다. 일제시대 만주벌판은 독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곳이다. 일송정은 독립투사들의 회의 장소였다.

독립투사들은 항일 운동을 펼치던 중 이곳에 모여 작전회의를 진행했다. 이렇다보니 일제의 감시와 지배가 심해 독립투사와 일본군의 쫒고 쫒기는 항전이 계속되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여기에 사는 그들의 후손들은 마을에서 누군가 일본물건을 쓰면 일본놈새끼로 따돌림을 당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불매운동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노래가사에 나오는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것은 일송정의 일화를 들으면 쉽게 이해가 간다. 항일운동 당시 일송정이 있던 비암산에는 엄청난 큰 소나무가 있었다. 또한 산이 높아 전망대 역할을 해 회의를 하다 일본군이 오면 흩어졌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 했던가? 일송정이 독립군의 회의 장소임을 뒤늦게 알아차린 일본군은 이곳에서 회의를 못하게 했다.

이후 일본군이 소나무에 대못을 박아놓고 온갖 악한 짓을 해도 소나무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래서 통째로 소나무를 뽑았지만 또다시 살아났다. 소나무의 씨가 뿌려져 주변에는 잔 소나무가 자라났다. 이후 소나무의 굳은 절개가 두려웠는지 일본군들은 일대의 소나무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독성이 강한 많은 양의 농약을 살포하는 잔악한 행위를 저지른다. 결국 소나무가 떼죽음을 당한다. 당시 일본군들이 얼마나 많은 독성 농약을 뿌렸는지 일송정 주변에는 지금까지도 반경 5km이내에는 아무런 풀도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소나무 모양으로 정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일송정이다.

연길 대성중학교에서 윤동주를 만나다

▲ 윤동주 시인이 직접 쓴 서시의 첫 표지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위)와 아래 졸업때 찍은 윤동주 시인의 모습(좌측) ⓒ 심명남



잠시 이곳을 지나 윤동주의 모교인 대성중학교를 향했다. 문득 중학교 어린 시절 반 친구들과 환경미화를 위해 윤동주의 '序詩'를 액자로 만들어 교실에 걸어 놓았던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 외웠던 시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잠시 후 그 서시의 주인공을 만난다고 하니 가슴이 무척 두근거린다. 이곳이 시인이 다니던 중학교라니 참 기대 빵빵이다.

사실 말로만 듣던 저항시인 윤동주는 왠지 저항시인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시상이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를 남겼던 탓일까? 그저 별을 노래하며 아름답게 살다간 시인처럼만 느껴진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그 생각이 완전 180도 바뀌었다. 생체실험으로 시인을 죽게 만든 일본에 대한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룡정중학교에 도착해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입구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을 지나니 윤동주 교실이 보인다. 윤동주 교실을 관람하려면 입장료가 우리 돈 5천원이다. 교실에는 수업을 받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벽화가 걸려있다. 정면에는 시인이 입고 다니던 교복이 전시되어 있다. 교장선생님께 부탁해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왔다. 어릴적 시골 선생님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 대성중학교에서 오천원을 내면 윤동주 교실을 둘러볼 수 있다. ⓒ 심명남

▲ 윤동주 교실에 시인이 즐겨 입었던 교복이 걸려있다. ⓒ 심명남

▲ 윤동주 교실에서 이곳 선생님들을 담았다. 안경을 쓰신 분이 룡정중학교 박철 교장선생님이다. ⓒ 심명남





일행은 전시관으로 갔다. 그곳엔 룡정중학교와 항일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잘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역사기념관이다. 이은정(39세) 역사선생님이 들려주는 항일운동의 역사를 들으니 잠시 잊고 지냈던 일본의 과거사를 더이상 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시인을 비롯해 청산리 전투, 항일유격대, 만주벌판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투사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를 현장에서 다시금 생생하게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윤동주 시인을 기리기 위해 2000년부터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이 열리고 있다. 설명을 듣고 난후 스마트폰으로 한장 한장 사진을 담고 있는 김상헌씨의 말이다.

"용정에서 이렇게 아픈 역사를 잘 전시해 놓은 학교가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랍습니다. 만약 만주벌판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우리 독립투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나도 헌금에 동참하렵니다." 

▲ 대성중학교 정문에서 있는 윤동주 시비 아래 서시가 보인다. ⓒ 심명남

▲ 룡정에 있는 대성중학교의 모습 ⓒ 심명남





 우리 기업인들의 자선사업도 눈길을 끈다. 윤동주 시인이 모교인 룡정중학교의 전신은 1920년에 건립된 6소중학다. 이후 1946년 9월 16일에 길림성 교육청의 지시로 은진, 영신, 동흥, 대성, 광신여자중학교를 합병, 지금의 길림성립 룡정중학교로 명명되었다. 또한  이 학교는 1921년 대성중학으로 건립된 학사다. 우수한 인재를 많이 길러낸 조선민족교육의 요람이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건물이 훼손되어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 이후 용정시정부 사단법인 해외민족연구소 주선으로 (주)금성출판사 김낙준 회장의 지원으로 옛 학사 모습이 복원되었다.

또한 이학교의 장학 사업도 눈길을 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맡겨진 고아들과 어려운 이웃에게 마을의 면비로 고등학교까지 학교를 보내주고 있다. 조선족 학교이다 보니 학교 재정이 열악하다. 그나마 학교가 커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정부가 기부금을 내고 1년에 한번씩 자선 사업가인 큰손들이 자선헌금을 납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에서 백두산 관광을 온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학교를 견학후 십시일반 헌금을 모아주어 학교 재정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

룡정중학교는 지금까지 2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현재는 18개 학급에 660명의 학생과 110명의 교사가 재학 중이다. 교훈은 성실, 자강, 분발진취다. 룡정중학교의 건학정신을 이곳 중학교 박철(49세)교장선생님께 들어 보았다.

▲ 룡정중학교 박철 교장선생님이 룡정중학 연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심명남





"옛 간도의 문화교류 발상지가 바로 룡정중학교입니다. 애국애족의 6소중학의 얼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민족적 소질을 지닌 덕성과 지력과 체력을 갖춘 인간을 키우는 것이 우리의 소임입니다, 고국에서 많은 분들이 여기에 오셔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어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전라도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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