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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으로 그려낸 전후세대의 아픈 가족사

[독후감] 17년 만에 펴낸 박도씨의 신작 장편소설 <제비꽃>

등록|2011.07.10 16:38 수정|2011.07.10 16:38
필자가 어릴 적 시골은 온 천지가 놀이터였습니다. 마을 한 가운데 공터는 구슬치기며 자치기를 하기 좋은 공간이었고, 뒷동산 언덕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던 놀이터였습니다. 게다가 학교길 언덕배기의 봉긋봉긋한 산소(무덤) 역시 등하굣길에 쉬어가는 휴식처였구요. 봄철이면 그 무덤 가로 할미꽃이 듬성듬성 피어나고 그 언저리엔 제비꽃이 숨어서 피어나곤 했지요.
짙은 자주색의 제비꽃은 얼핏 보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키가 작습니다. 그 자그마한 자태는 예쁘다 못해 깜찍하기조차 합니다. '제비꽃'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하나는 겨울나러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무렵에 꽃이 핀다고, 또 하나는 꽃의 모양과 빛깔이 제비를 닮아서 이런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그것입니다. 

최근 소설가 박도(66)씨는 첫 작품집을 낸 지 17년 만에 장편소설을 하나 출간했는데, 그 소설집 이름이 바로 <제비꽃>입니다. 얼핏 보면 유년시절의 추억을 소재로 한 성장소설 같기도 하고 또 얼핏 보면 제비꽃의 꽃말처럼 순진한 사랑을 수채화로 그려낸 작품 같기도 합니다. 작가의 실제 사연을 팩션(faction)으로 엮은 <제비꽃>에는 이 땅 전후세대들의 아픈 가족사가 진하게 배어 있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기조차 합니다.

작가의 실제 사연 팩션으로 엮어

박도 씨 신작 <제비꽃>제비꽃은 남쪽에서 제비가 돌아올 무렵 꽃이 피며 깜찍하고 예쁘다. ⓒ 도서출판 오래



주인공 조현(박도)은 모교(중동고) 국어교사로 재직중이던 70년대 중반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보내온 엽서 한 통을 받았습니다. 보낸이는 고교시절 단짝처럼 가깝게 지내던 장지수(본명 양철웅)였습니다. 지수는 당시 가정형편이 어렵던 현에게 '목 잘린 워커'를 구해주는 등 예사 친구 이상 가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현은 복잡한 개인사정으로 답장을 제때 하지 못해 이후 두 사람은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현이 지수를 다시 생각해낸 것은 후배들에게 교사 자리를 내주기 위해 정년을 5년 남기고 명예퇴직을 한 후 강원도 산골 외딴마을로 내려온 뒤였습니다. 현은 두어 해 동안 시골 농사꾼으로 살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냈습니다. 현은 아침저녁으로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군불을 때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마른 장작들이 딱! 딱!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 둘씩 명멸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장작 불꽃더미 속에서 불쑥 고교시절의 친구 장지수가 나타났습니다. 현은 불타는 장작더미들을 방고래 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는 곧장 아래채 글방으로 달려가 노트북을 켰습니다. 지수의 영혼이 강원도 산골의 중늙은이로 살아가고 있던 현을 일깨운 것입니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이승과 저승을 교직(交織)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961년 봄, 고교 신입생이 된 현은 입학금을 내지 못해 등교를 미루고 있다가 개학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겨우 입학수속을 마치고 등교하였습니다. 현은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섰습니다.

"옆자리가 빈 학생, 손들어 봐!"
"선생님, 여기예요!"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장지수였는데, 둘은 그렇게 해서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현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였고, 반면 지수는 사는 게 부러운 집안의 서울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지수는 시골티를 벗지 못한 현을 무시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싸주었고, 현은 그런 지수에게 우정 이상의 친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교 시절의 저자중동고교 2학년이던 1963년 당시 교정에서 찍은 모습이다. ⓒ 박도



그러나 현의 서울생활은 낯섦 이상으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야당 쪽 인사였던 현의 아버지는 현이 고교에 입학한 그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비리 정치인'으로 몰려 어느 날 사복경찰에 의해 끌려갔습니다. 현은 어머니에게 동생과 함께 셋이 연탄불 피워놓고 죽자고 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형무소에 두고 우리만 죽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현은 친구들 몰래 휴학계를 내고 신문배달을 시작했습니다.

현이 신문배달을 하던 가회동, 삼청동 일대에는 학교가 밀집해 있었습니다. 경기, 덕성, 풍문, 창덕, 중동, 숙명, 수송, 휘문 등등. 석간신문을 배달하고 있던 현은 또래의 학생들을 마주치면 고개를 푹 숙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국동 로터리에서 반 친구를 하나 만났는데, 그 며칠 뒤 그 자리에서 지수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지수는 사흘을 기다려서 현을 만난 것입니다. 지수를 보자 현은 반가운 마음에 금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지수는 현을 가까운 만두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고는 그간의 사정을 들은 지수는 현에게 조만간 상도동 자기네 집으로 놀러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지수의 어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달러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사는 게 비교적 여유로왔습니다. 만두를 끓여 점심을 해결한 후 지수는 신발장에서 워커 한 켤레를 꺼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듯한 그 워커는 약간 낡은 것이었는데 목이 잘려 있었습니다.

"내가 너 오면 주려고 엄마에게 부탁해 구해둔 거야. 너 가져가서 신어!"
"니 와이카노."

겉으론 사양했지만 속으로 현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 '목 잘린 워커'가 무척이나 신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자가 귀한 시절이다 보니 미군부대 철조망 밖으로 흘러나온 군복이나 워커가 인기가 높았습니다. 미군 군복은 물을 들여서 입고, 워커는 목을 잘라서 단화처럼 신곤 했습니다. 당시 서울 고교생들은 이런 차림이 보통이었는데 그게 하나의 유행처럼 돼 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수가 건넨 '목 잘린 워커'는 더없이 귀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3년 세월이 흘러 1964년 봄 지수는 고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영문과에 진학하였고, 1년간 휴학을 한 현은 이듬해 봄 졸업한 후 고려대 국문과에 진학했습니다. 한 사람은 서울 동쪽에, 한 사람은 서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보니 자주 만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게다가 지수가 2학년 마치고 군에 입대하면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75년 지수가 네덜란드에서 엽서를 보내왔는데, 지수는 대학을 마치고 무역회사에 취직해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지수가 네덜란드에서 보내온 엽서이 엽서를 받고 현이 제 때 답장을 했었던들 두 사람은 그리 오래 연락이 끊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 박도



학교를 명퇴한 현은 강원도 산골로 내려와 전원생활을 하면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현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면서 시골생활을 연재해 적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2005년 초 <오마이뉴스>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그간 30년간이나 잊고 지냈던 친구 지수를 찾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매우 잘 했고, 나는 그보다 국어가 조금 더 나았던 걸로 기억된다. 우리는 그 때 시건방지게 둘만이 아는 호를 지어 나는 그를 운성(雲城)이라고, 그는 나를 설송(雪松)이라고 불렀다.… 1975년 내가 모교 교단에 섰을 때 네덜란드에서 그의 엽서가 불쑥 날아온 이후 여태 소식을 모르고 있다. … 그가 보고 싶다. 그를 죽기 전에 꼭 만나서 부둥켜안고 포옹하고 싶다. 그리고 손을 잡고 이제 흔적도 없는 모교의 옛 터 수송동 골목을 거닐며 지난 추억에 잠기고 싶다. 그는 나에게 포숙(飽叔)과 같은 친구다."

지수를 만나고 싶어하는 현의 간절한 소망은 이내 메아리로 돌아왔습니다. '동준아빠'라는 네티즌이 댓글로 지수의 연락처를 알려왔기 때문입니다. 현이 글 말미에 지수의 인적사항을 남겨둔 것이 주효했던 것입니다. 현은 미국 현지의 이도영 박사의 도움을 받아 수소문한 끝에 글을 올린 지 열흘 만에 지수의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건 비보였습니다. 지수가 10여년 전에 식도암으로 뉴욕에서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는 댓글이 이어졌습니다. 

이 박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지수는 1992년 식도암으로 두 해 남짓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당시 지수는 미혼이었고, 일점혈육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교 1년 후배인 이철우 목사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지수와는 만날 수 없게 됐지만 현은 대신 친구 둘을 새로 찾게 되었는데, 이철우(이용호) 목사와 김윤호(이동호)가 그들입니다. 결국 현은 미국행을 계획하게 됩니다. 2004년에 이어 두 번째 미국행인 셈입니다.

그해 11월말, 현은 뉴욕행에 올랐습니다. 이도영 박사가 공항에 마중을 나왔습니다. 이 박사는 바로 전 해에 현의 뉴욕방문 때도 큰 도움을 준 분입니다. (그가 미국에 머물고 있는 사연이나 그의 아픈 가족사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합니다) 이어 이철우 목사가 그의 숙소로 찾아와 둘은 30년 만에 반갑게 만났습니다. 이튿날 세 사람은 지수의 유해가 뿌려진 허드슨강 언덕 록펠로우 전망대에서 이 목사의 주도하에 추도예배를 올렸습니다. 현과 지수, 두 사람은 30년 만에 어렵게 만났으나 '영혼의 대화'를 나눠야만 했습니다.

"설송! 네가 나를 보고자 뉴욕까지 찾아오다니."
"운성! 오히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학살, 연좌제, 어머니의 가출... 하나같이 비극적인 가족사  

▲ 지수의 유해가 뿌려진 허드슨 강 언덕. 강 건너 맨해튼이 빤히 보인다. ⓒ 박도



그 무렵 허드슨 강변은 만추의 쓸쓸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게다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지난 추억을 되살리기에 좋았고, 강변의 마른 나뭇가지들은 겨울을 앞에 두고 바람에 가볍게 떨고 있었습니다. 한 걸음만 떼면 마천루가 성을 이루고 있는 뉴욕에 이런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축복 같았습니다. 지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뉴욕은 네 계절이 다 아름다워. 특히 허드슨강 언덕에 제비꽃이 필 때가 네 계절 가운데 가장 아름답지."
"너 아직도 제비꽃을 좋아하는구나."
"그럼, 나의 첫 사랑이었는데..."
"남자는 첫 여자를 잊지 못하고 여자는 마지막 남자를 잊지 못한다더니…."
"…"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은 주인공 현과 강숙자라는 한 미대 여교수와의 대화로 시작되는데, 강숙자는 지수의 첫사랑입니다. 지수는 대학 1학년 때 강숙자를 따라 북한산 송추계곡으로 야외 스케치를 나갔는데, 마침 제비꽃이 한창이었습니다. 지수는 숨을 거두기 직전 이 목사에게 허드슨강 언덕 소나무 그루터기 옆 제비꽃이 핀 곳에다 자신의 유해를 뿌려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일종의 수목장인 셈입니다.

지수의 비극적 삶은 그의 가족사와 무관치 않습니다. 함흥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부친은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월남한 이후 무능한 가장에다 이복동생 지철의 문제로 집안에서 왕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생겨난 가정불화로 지수는 의도적으로 해외근무를 시작하게 됐고, 그 후 미국까지 흘러들게 된 것입니다. 불운하게도 그의 미국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간 모아둔 몇 푼마저 동창생에게 털린 후 병까지 얻어 결국 이국땅에서 한많은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현의 뉴욕 일정을 번번이 책임져준 이도영 박사의 집안은 지수네 집보다 더 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면서기였던 이 박사의 부친은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군인들에게 학살당했는데, 이 박사는 자라면서 부친이 병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범대 졸업 후 교사 발령이 늦어지면서 '연좌제' 때문이란 걸 알게 됐고, 이후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이후 제주4.3사건 규명작업에 나선 이후 지금도 미국 아카이브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에겐 천형(天刑)과도 같은 고통인 것입니다.

▲ 생전에 지수가 다니던 예배당의 지수 단골자리에 앉아 친구를 추념하는 저자(이용호 목사 촬영) ⓒ 박도


          
2004년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모아준 성금으로 현이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 자료수집차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 박사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현을 도왔습니다. 현이 워싱턴에서 아카이브를 드나들 때는 또 한 사람의 후원자가 있었는데 그는 백암 박은식 선생의 손자 박유종씨였습니다.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두 사람의 선조는 식민지와 분단시대의 간난(艱難)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분들인 셈입니다. 이 소설집이 무거운 것은 바로 이들 후손들의 신산한 삶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주인공 현의 가족사는 어떠했을까요? 현에겐 어머니와의 '생이별'이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현이 대학 3학년이던 1967년 어느 가을, 그의 모친은 집을 나간 후 40년이 넘도록 여태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외조부의 완고함 때문에 한글을 겨우 익힌 현의 모친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모멸에 가까운 무시를 자주 당했고, 여기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 결국 자신이 '연기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고 가출을 결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어쩌면 그렇게 생사의 행방을 모를 수가 있니?"
"세상에는 내가 상상치도 못할 일도 많다는 걸 그때 체득하게 되었어. 나는 아직도 어디에선가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그런 환상에 살고 있어."
"그런 아픔 속에서도 용케 살아 왔다."
"아마 문학의 힘이었어. 그게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그간 현은 소설집, 산문집, 답사기, 사진집, 저서 등을 합쳐 30권 가까이 책을 펴냈는데 이는 따지고 보면 모두 어머니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셈입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그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고 어머니가 연락을 해오길 바란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기대는 이제 접어야만 할까 봅니다. 현은 이승에서 어머니와의 인연은 끊어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죄의식 한 자락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장남인 그에게조차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칠 무렵 저자이자 주인공인 현(박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현은 어머니의 얘기를 눈물을 흘리며 썼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일찍이 '독자는 저자가 피와 눈물로 쓴 글만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는 가슴 깊숙이 묻어둔 '히든카드'를 이 책을 통해 풀어놓은 셈입니다. 자신의 아픈 가족사가 동인(動因)이 돼 이 소설은 출발했고, 가는 도중에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담아냈습니다. 그 아픔은 오직 토로를 통해서만이 치유될 수 있기에 그는 이 책 서문 말미에서 '이제 죽어도 좋다'고 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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