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이 단속한 '부끄러운 치마 속', 참담했다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⑤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작명 5호 "전원 총살하라"
지난해 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올해 초부터 진실위 전직 조사관들은 '조사관 백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조서관 백서' 작업의 마무리의 일환으로 준비됐습니다. 공식 보고서의 딱딱함을 벗어나 진실의 조각들을 알기 쉽게 풀어나갈 것입니다. [편집자말]
▲ 거창민간인피학살자 유족회 소속 한 회원이 2004년 11월 5일 열린 추모식 도중 오열을 터뜨리고 있다. ⓒ 석희열
생산연도 1951년. 총 522매. 특무대 보고서(2건), 11사단 9연대 3대대 보고서(1건), 거창경찰서 보고서(1건), 경남도경 보고서(1건), 헌병보고서(15건) 등으로 구성.
이른바 산청·함양·거창사건 관련 '특무대 문서철'에 대한 정보다.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담고 있는 이 특무대 문서철은 60여 년 동안 기무사에 의해 은폐되어 왔다. 한때 진실위에 의해 그 진실이 밝혀지는 듯했으나 다시 기무사의 손에 넘어갔다. 특무대 문서철은 왜 이런 기구한 운명을 지니게 됐을까.
거창사건은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는 사건의 일부만 지칭하는 것일 뿐, 전체를 포괄하는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거창에서의 학살 이전인 2월 7일부터 이미 동일한 부대, 즉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이웃한 산청군, 함양군 일대에서도 민간인 집단학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특무대 문서철에서도 확인되며, 연대작전명령에 의한 공식적인 학살사건이었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11사단 9연대 연대작명에 의한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이 되어야 한다. '거창사건'으로만 알려진 것은 국가가 산청과 함양 학살을 의도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이다. 산청·함양·거창 3개 군 유족회는 이 사건으로 총 1424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소위 '거창사건'과 관련해 일부 관련문서가 공개되기는 했지만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작전 명령의 내용, 사건의 조작과 축소·은폐, 그리고 왜곡의 주체 밎 경위 등이 공식 문서로 확인된 바는 없었다. 그동안 국가가 의도적으로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발족 후 법적 근거에 의해 기무사가 보관하고 있던 '특무대 문서철'을 입수해 대통령과 국회에 상정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철은 사건발생 직후 현장에서 작성된 보고서로 한국전쟁 시기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이라는 범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창은 인민공화국"... 작명 5호 '전원 총살하라'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 11사단 9연대 작명 5호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하게 된 유엔군은 후방 안정을 목적으로 11사단을 창설한다. 11사단의 주 임무는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 잔존해 있는 인민군과 게릴라 토벌. 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은 '견벽청야(벽을 튼튼히 하고 들을 깨끗이 함)'를 내세워 부하들에게 초토화작전을 독려했다. 토벌작전이 인민군과 게릴라뿐만 아니라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된 것이었다.
이를 작전 명령 형태로 공식화시킨 것이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는 작명 5호였다. 이는 거창·함양·산청 민간인 학살이 일개 하급 지휘관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사단장, 국방부장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지휘명령체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무대 문서철 내용 중 일부를 살펴보자.
(지리산 일대) 약 7할 이상이 공비에게 협조하여 식량보급 및 정보를 제공하는 고로 이적행위로 인하야 아군작전에 지장을 초래케 하며 현재 소각당한 각 부락은 주간에는 대한민국이며 야간에는 인민공화국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대한민국정부에 납세 혹은 국민된 의무는 전혀 없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 간주할 수 없음으로 지리산토벌작전에 적의 이용당하는 인원 및 가옥을 파괴하지 않으면 작전수행을 도저히 기할 수 없는 고로 불가분의 조치라고 생각함. - 특무대 문서철, 헌병대 보고서, "지리산 토벌작전으로 인한 민심동요에 대한 조사복명지건"
(거창군) 신원면 관내는 완전한 인민공화국이며 공비에게 일시적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협조 충성을 다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신원면 5개리 주민은 공비화되어 있었음으로 이적행위자로 칭할 바 아니라 완전한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바 차를 사살하였음은 작전상 당연한 조치로 인정됨. ... 숙청당한 지대의 거주민은 추호도 개전의 여지 전무한 자이며 금후 공비의 완전한 소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해(당)지대의 가옥 및 거주민을 처분하지 않는 한 금후 공비세력이 강화될 것이므로 당연한 처사로 인정됨 - 위 문서철, 거창경찰서 보고서(1951. 3. 8)
특무대 문서철은 민간인 학살의 불가피성만을 강조하고 있다. 치안유지의 책임회피와 적성화된 주민('순전한 적')이었기 때문에 처형이 불가피했다는 것. 이는 당시 정치권을 포함한 군부, 겅찰 등에 만연했던 부정적인 대민인식을 보여준다.
이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인 대부분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들, 곧 '비국민'이며 따라서 이들을 '공비'로 몰아 토벌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11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은 부하 지휘관들에게 '견벽청야작전'을 직접 설명하면서 "공비 100명 사살 중 상당수가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는 국제법으로도 금지된 '초토화 작전'으로, 일본군이 항일반만세력을 소탕할 때 그 잔인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눈에 띄는 것은 헌병대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사건 직후 헌병대사령관 최경록의 지시에 의해 조사된 것으로, 현장조사와 피학살자 명부를 직접 작성하고 산청·함양에서 발생한 사건조사를 하는 등 사건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해 둔 공문서라 할 수 있다.
▲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NARA / 박도 기자 제공
특무대 문서철에 수록되어 있는 문건 중 가장 먼저 작성된 것은 경남도경에 의한 것으로, 작성일자는 1951년 2월 25일이다. 도경은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독자적인 조사가 어렵다고 판단, '군경합동조사단의 편성 파견'을 제안하였다. 경남도경의 건의를 받은 신성모는 통상적인 군내사건조사기구인 헌병사령부를 제쳐 놓고 특무대를 조사주체로, 그리고 여순사건에서 자칭타칭 '백두산 호랑이'였던 김종원을 총지휘자로 삼아 철저한 조작과 은폐를 지시했다.
신성모의 지시를 받은 특무대는 1951년 3월 10일과 15일, 두 건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문건 우측 상단에 '특명,' '극비'라는 표시는 대통령의 특별명령을 수행했으며, 문서가 극비로 작성, 전달되었음을 뜻한다. 제목은 각각 '거창사건에 대한 진상과 수습대책,' '거창사건에 대한 수습결과 보고의 건'으로 되어 있다.
제목에서 보듯이 이들 보고서는 사건 자체의 문제점이나 반성을 개진하기보다는 거창사건을 비롯한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을 어떻게 은폐·조작·왜곡시킬 것인가 하는 대책 마련에 초점을 두고 있다. 특히 3월 10일자 보고서는 국방부, 경남계엄사령부, 거창경찰서와 경남도경 등 범정부 차원에서 위 사건의 조작과 은폐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이다.
국회에서 사건이 폭로된 후 국내외로 사건이 파급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특무대가 중심이 되어 군과 경찰 등 국가공권력을 동원해 사건을 조작·은폐·왜곡한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특무대가 사건의 조작과 은폐에 중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언급되거나 밝혀진 바 없다. 이 문서는 특무대의 역할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
이승만이 단속한 '부끄러운 치마 속', 그 참상
▲ 이승만 전 대통령 ⓒ 이화장
첫째, 11사단 9연대 3대대가 공식적인 작전명령에 따라 산청·함양·거창 일대의 민간인을 집단학살했다. 이 문서철에는 작명5호 부록의 원래 내용, 즉 "적의 손에 있는('치안미확보' 즉 '미수복지구')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 작전이 처음부터 민간인에까지 무차별을 지시했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최덕신 사령관의 구두명령을 받은 것이라는 당시 9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의 증언도 첨부되어 있다.
이 작전명은 재판과정에서 "작전 지역에서 이적 행위자를 발견 시는 즉결하라"는 내용으로 위변조됐다. 특무대로 이첩될 당시 헌병대 보고서에 첨부된 서류 목록에는 '현장사진'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현재 특무대 문서철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둘째, 사건의 조작과 은폐, 그리고 왜곡이 국방부와 경남계엄사, 경남도경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문서철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은 민간인 학살사건이 국내외로 비화하자 경남 거창 신원면 사건을 방문한다. 1951년 3월 10일 비밀회의에서 신성모는 경남계엄민사부장인 김종원과 특무대원 계종운, 거창 경찰서 사찰계 유봉순에게 사건의 조작과 은폐, 왜곡을 지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특무대의 개입과 역할이다. 특무대는 이승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창설된 군정보기구다. 해방 이전 미정보기관과의 접촉을 통해 군정보기관의 중요성을 일찍이 숙지하고 있었던 이승만은 남한에 주둔 중이던 미 제971 CIC 파견대를 모방하여 방첩대를 창설했다. 창설 이후 이 기구는 이승만의 정권획득 및 유지,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이용됐으며, 특히 "상부의 특명사항처리"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승만은 단정 수립 이후 정권유지와 강화를 위해서는 '정적'은 체제전복을 꾀하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단정지었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적 기관화가 가능한 방첩기관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곧 특무대였다.
실제 이승만은 거창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되자 "치마 속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지 않아"라며, 반성은커녕 외국 언론에만 신경쓰는 행태를 보였다. 이승만의 분신이었던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이러한 이승만의 심기를 의식, 최덕신에게 걱정말고 토벌작전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심지어는 100만 원의 격려금까지 내린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9연대는 유아사체 처리, 경남도경과 거창경찰서는 여론단속과 반증수집, 국회의원 무마, 유족 및 주민 협박 등을 각각 담당하도록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셋째, 피학살자의 규모가 의도적으로 축소됐다. 거창사건의 사망자는 총 517명으로 확인되며 이들의 주소, 나이, 성별, 직업 등이 구체적으로 조사되어 있다. 1960년 4·19 이후 <동아일보>에 명단이 그래도 실리기도 했는데, 사건 재판 당시에는 187명이라는 허위 숫자가 제시됐다. 총 517명의 피학살자 중 여성이 남성보다 많고, 만 1세 이상 16세 이하의 어린이가 217명에 이르러 피학살자의 42%가 어린이였다. 61세 이상도 51명으로 전체 피학살자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특무대 문서철에는 특무대 보고서와 헌병대 보고서, 그리고 거창경찰서 보고서 등에서 피학살자 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수는 보고서마다 차이를 보인다.
넷째, 유아사체가 유기돼 은폐됐다. 어린이들의 희생을 은폐하기 위해 이들의 사체는 신성모 국방장관 주재의 비밀회의 직후인 3월 11일 오전 6시에 9연대 부연대장 지휘 하에 하사관 교육대가 동원돼 처리됐다. 이 과정은 '시체처리 현황보고'라는 제목으로 작성되어 11사단장이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에게 보고됐다.
다섯째, 여성 강간 및 재산탈취행위가 은폐됐다. 통상적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여성 피해는 진실의 사각지대에 위치한다. 기록되지 않은 범죄로 가장 흔한 것이 여성이 입은 피해, 그중에서도 성적 피해와 강간이다. 여성들은 대체로 자기 경험을 축소하거나 집안 남자들의 이야기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나라의 진실위 조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여성들이 겪은 피해가 '2차적인 경험'으로 보고되기도 한다.
거창사건에서도 집단학살 전후로 여성들을 골라내서 성폭행·강간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주민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경찰조사에서도 확인됐으나 철저히 은폐됐다. 그리고 농우 20여 두등을 탈취하고 토벌작전을 핑계로 주민들에게 식사와 위로비, 정보비를 부과하며 교실 자재를 뜯어 땔감으로 쓰는 등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한 예로 거창군시국대책위원회는 토벌작전을 위해 총 100여만 원(현재 시가 약 17억 8000만 원)을 대여 형식으로 지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섯째, 산청·함양사건이 은폐됐다. 헌병사령부는 초기 조사를 통해 총 220명 피학살의 인명피해와 가옥소각, 농우탈취, 교실방화 등 물적피해를 조사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거창사건에 묻혀 철저히 은폐됐다.
다시 기무사 손에 넘어간 특무대 문서철, 요원한 진실
▲ 2005년 서울 염창동 한나라당사앞에서 열린 '과거사법 2월 제정과 한나라당의 참회동참을 촉구하는 전국 피해자 유족 결의대회'에는 경남 거창과 산청, 전남 순천과 함평, 경기 고양유족회원 등에서 100여명이 참석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처럼 특무대 문서철은 한국전쟁기인 1951년 2월 7일부터 2월 11일에 발생한 '산청·함양·거창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국가공권력의 불법행위, 즉 국가범죄를 기록한 문서다. 또 한국전쟁기에 일어난 군경 등에 의한 민간인집단학살의 구조와 지휘명령체계, 그리고 국가공권력의 범법행위를 범정부차원에서 은폐·왜곡·조작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서다. 특히 은폐의 핵심에 이승만의 특명수행기관이었던 특무대가 위치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후 특무대가 비밀기관화하면서 문서철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채 60여 년 동안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1951년에 있었던 고등군법회의에서는 특무대의 문서철이 제시되지 않았으며 1960년 4·19 혁명 이후의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951년 재판은 관련자 처벌은 있었지만 국방장관과 사단장에 대한 지휘책임을 묻지 않고 불완전한 관제재판으로 막을 내렸다. 1960년 국회 진상조사가 있은 뒤 1년 후에 일어난 5·16 쿠데타 세력은 유족회장 등을 반국가단체 혐의로 투옥시키고 유족회를 해체한다. 더구나 1954년 조성된 묘역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2010년 진실위원회는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 진실규명 및 불능 결정서'(2010. 6. 29)와 9차 보고서('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5권에 수록)에서 11사단 9연대 합동작전에 의해 산청·함양·거창 등지에서 11사단 9연대 작명 5호에 의해 소속 군인이 주민을 무차별 대량학살했음을 규명했다.
이처럼 거창사건의 진실을 담고 있는 특무대 문서철은 다시 기무사의 수중에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3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법적 근거도 없는 임의규정, 즉 '기관수집자료 관리규정'을 근거로 특무대 문서철뿐만 아니라 위원회에 법적 근거에 의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이관된 상당량의 국가기관 문서들을 비공개문서로 지정했다. 결국 규정에도 없는 자료반납으로 특무대 문서철은 다시 제공처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는 국가범법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계속 은폐하겠다는 것으로, 은폐된 진실을 밝혀야 하는 위원회의 기본 목적과 임무를 배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2005년 12월 1일 공식 출범해 2010년 12월 31일 활동을 종료한 진실위는 한국전쟁기 민간인집단희생사건 조사 등을 수행하면서 적지않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하에서 임명된 3기 위원회 위원장과 일부 상임·비상임 위원들이 위원회 역할에 대해 무지하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인사들로 채워지면서 파행을 거듭했다. 이들은 위원회 조사관 일부를 좌편향으로 분류해 이들이 작성한 기존의 조사보고서를 평가절하하거나, 조사를 통해 확인된 국가공권력의 가해사실을 불가피성으로 치부하며, 국가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문서의 공개를 제한하기도 했다.
이후 유족회의 꾸준한 요구에 의해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1995. 12. 18)'이 통과됐다. 하지만 희생자나 유족들에 대한 배·보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고, 거창유족회가 제기한 국가배상은 대법원에서 패소(2008. 5. 29. 선고 2004다33469)했다. 주요 이유는 소멸시효의 완성과 권리행사 장애 부재였다.
그동안 위 문서철과 같은 국가범죄 문서가 공개된 바 없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는 문서공개로 인해 그 정당성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 문서철 등 다량의 기관문서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하는 이유이며, 이를 근거로 재판부에서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이다.
국가의 공문서는 특정기관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국민의 재산이다. 하물며 그 문서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유린한 인권탄압의 기록임에랴. 국가는 이러한 문서들을 반드시 공개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렇게 해야만 다시는 국가가 그 같은 범법행위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옷장에 해골을 억지로 처박아 세워두면, 제일 곤란한 순간에 쓰러져서 문 밖으로 쏟아진다." - Priscilla B. Hayner, Unspeakable Truths : Confronting State Terror(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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