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앞산' 풍경, 천하절경이 따로없네
비와 눈 그친 직후 산에 올라야 절경 '만끽'... 시내버스 이용한 즐거운 산행
▲ 비가 그친 듯하자 등산객이 걸어서 올라온다. 그러나 이내 비는 다시 왔다. ⓒ 정만진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존대받지 못한다는 금언이 있다. 가까운 대상에 경외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된 풍토를 지적한 말이다. 부부 사이나 부모자식 사이에는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낯선 이들 앞에서는 교양과 범절을 갖춘 양 허례를 떠는 이들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인식 때문이다.
가까운 산이나 강을 멀리 하고 굳이 먼 곳으로 피서를 떠나고 등산을 다니는 경향도 그런 사고방식 탓이다. 세계가 알아주는 역사유산의 보물창고인 경주나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자연유산인 제주도와 고창 등지에는 무관심하면서 바다 건너 해외로 관광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무수한 것도 이유는 같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자긍심이 없고 지적 허영심에 들떠 있을 뿐더러 문화적 사대주의에 젖은 결과이다.
대구의 '앞산'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동수대전에서 견훤군에게 대패한 왕건이 숨어 지냈던 안일암, 은적사, 임휴사, 그리고 왕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고찰 법장사도 건재하다. 더욱이 공룡의 발자국과 건열 및 연흔의 화석도 남아 있어 생생한 답사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또, 대구를 대표할 만한 독립운동가 이시영 옹을 기념하는 비도 있고, '개화'의 시조시인 이호우와 현대시인 이윤수의 시비도 있다.
▲ 통신중계소에서 산성산 정상으로 올라오는 등산로가 안개에 싸여 신비로운 동양화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 정만진
뿐만 아니라 앞산은 '절경'도 보여준다. 특히 비 갠 직후나 눈 멈춘 낮에 올라 청룡산 방향을 바라보면 정말 숨이 막힌다.
산에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안다. 비가 그치면, 눈이 멈추면 산에 올라야 한다. 왜 그런가. 비가 그쳐 안개가 피어오르면, 눈이 멈춰 하얀 백설로 봉우리와 계곡 곳곳이 새하얗게 꾸며지면, 산은 거대한 산수화로 변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어수선했던 풍경들도 한결같이 여백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동양의 산수화로 눈부시게 바뀌기 때문이다.
앞산에서는 고산골, 큰골, 용두골, 달비골, 안지랑골, 매자골 등등 숱한 길 중 어느 등산로를 선택하는 것이 산수화 감상에 가장 적격일까. 정답을 먼저 말한다면, 고산골과 큰골 사이의 임도가 바로 최적의 길이다. 다른 길들은 모두 골짜기 사이로 나 있어서 거의 풍광을 즐길 조건이 안 되지만, 통신중계소(RELAY SITE)와 항공무선표지소(V.O.R Station)로 올라가는 이 길만은 능선을 타고 오르는 까닭에 앞뒤좌우 사방의 시야가 거침없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반쯤 올라 뒤를 돌아보면, 어느샌가 올라온 길이 온통 그림이 되어 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보는 즉시, 동양의 산수화가 왜 여백을 주는지 대뜸 알 수 있다.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다. 그리지 않았을 뿐,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하얀 종이, 뽀얀 안개 속에도 풍경은 있기 때문이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산을 오르면서 그것을 마음으로 보는 경험은 비가 그친 직후와 눈이 멈춘 날에만 챙길 수 있는 보석 같은 소득이다.
▲ 케이블카와 앞산 정상쪽 풍경 ⓒ 정만진
오른쪽을 보아도 산수화는 한결같이 펼쳐져 있다. 케이블카 하행선 정류소와 앞산 정상의 첨탑은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절묘의 풍경을 보여준다. 멀리 아스라한 우방타워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들이 허공에 뜬 듯 신비롭게 숨어 있다. 김광균의 시 '설야'가 왜 '먼 데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구절을 쓰고 있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가느다란 숲길 사이에 가득찬 안개를 맞으며 걸어가는 기분 또한 이렇게 비가 그친 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유쾌한 소득이다. 흰빛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반투명의 안개는 나무의 둥치며 껍질과 어우러져 선계(仙界)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얼굴에 와닿은 깨소금 가루 같은 물방울들은 예까지 올라오느라 땀을 흘린 등산객의 갈증조차 말끔히 해소해 준다.
▲ 물안개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등산로의 풍경 ⓒ 정만진
도로에서 한 시간 가량 오르면 왼쪽으로는 산성산과 청룡산에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는 앞산 정상에 닿게 되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만약 오늘 같이 비가 멈춘 날 앞산에 올라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비경을 보고 싶다면 오른쪽으로 나아가시라. 앞산 정상까지 가는 중간 지점쯤에 산불 초소가 나타나면 그 앞의 거대 바위에 올라 오른쪽을 바라보시라. 새하얗게 피어오른 산안개가 앞산 정상 아래 대덕산 봉우리와 달비골 사이를 면사포처럼 감싸고 있는 절경을 보게 되리라.
▲ 앞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덕산 방향 ⓒ 정만진
그리고 앞산 정상을 지나 대덕산 봉우리로 가다가 다시 거대 바위 전망대를 만나거든 거기 다시 멈추시라. 천혜의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으니 애써 적당한 장소를 찾을 필요도 없다. 지금껏 울창한 나무들로 좌우의 풍치를 가리던 기질은 깜빡 잊었는지 앞산은 손님에게 풀 한 포기까지도 앞을 가로막는 법이 없는 기막힌 전망을 보여준다. 바로 청룡산 쪽 방향이다.
'안개 핀 골짜기'로의 대구 산행, 외국산 부럽지 않네
여기가 어딘가? 대구에 이같은 천하절경이 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이게 어찌 된 절경의 출현인가. 달비골을 가득 메운 안개는 수줍은 듯 골짜기에 고이 숨은 채 피어오르고, 청룡산과 삼필봉,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산맥처럼 펼쳐져 있는 비슬산 자락 역시 흰구름에 반쯤 덮힌 채 신비감을 과시하고 있다. 핀란드나 캐나다 같은 삼림국가의 사진을 보는 것도 같고, 백두산 같은 고산준령의 운무(雲霧)가 재현된 듯한 감동에 젖기도 한다.
▲ 대덕산에서 바라본 청룡산 방향 ⓒ 정만진
이 길이 다만 아쉬운 것은 본격적인 등산을 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1시간 30분 이상을 걸었지만 오르막길 자체의 경사가 완만했던 탓에 '등산'이 아니라 '산책'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 청룡산의 등산로 ⓒ 정만진
이야기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 길을 등산하는 장점을 말할 때가 되었다. 대략 세 가지를 들어 앞산 최고의 여정으로 추천하려 한다. 지금 말하는 '이 길'은 청룡산 정상을 거쳐 달성군 가창면 오리 양지마을로 하산하는 여정이다.
첫째, 하산의 장점이다. 관광버스를 대절한 단체등산이 아니라면 돌아올 일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 '이름 모를 꽃' ⓒ 정만진
청룡산 정상에서 어디로 갈까? |
청룡산 정상은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헬기장에서 아래로 보면 도원지가 눈에 들어온다. 앞산이나 산성산에서 이리로 온 경우, 양지마을로 가려면 헬기장을 거쳐 앞으로 계속 직진하면 된다. 그러나 수밭고개를 거쳐 계속 비슬산으로 가거나 아니면 도원지로 하산할 사람은 헬기장에서 도원지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야 한다. |
▲ 청룡상 정상에서 하산하다가 바라본 달성군 가창면 오리 양지마을 풍경 ⓒ 정만진
땀을 뻘뻘 흘리며 하산을 하면 달성군 가창면 오리 양지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은 너무나 예뻐서 누구나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집들은 한결같이 아담하면서도 품격을 자랑한다. 본래 있던 농가보다 더 규모를 키워서는 건축을 할 수 없도록 제한이 되어 있은 데에 힘입어 저절로 최상의 결과가 탄생한 것이다.
▲ 양지마을의 접시꽃 ⓒ 정만진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청룡산 방향을 바라본다. 청룡산 정상은 비슬산에서 출발하여 13km를 걸으면 닿는 지점에 있고, 앞산에서는 5.5km 떨어진 곳에 있다. 해발 794.1m에 지나지 않으니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름처럼 푸른 빛이 완연하고 능선이 구불구불한 산이다. 그 탓에, 여차하면 길을 잃고 예상에 없던 골짜기를 헤매야 하는 곤경을 부르는 산이다. 따라서, 이 산 정상을 거치는 가장 멋진 등산로는 앞산에서 출발하여 가창면 오리 양지마을로 하산하는 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려 한다. 청룡산에서 방황하지 마시라.
▲ 청룡산의 뒷모습. 가창면 오리 양지마을 쪽에서 바라본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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